00054 자선파티 =========================================================================
웅성웅성
태상의 발언에 순간 사회자도 넋을 잃고 멘트를 하지 못했다.
다들 태상의 발언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데 반해, 강회장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송이는 눈이 왕방울 해져 태상을 봤고, 세연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세연에게도 한 번에 일 억 정도 쓸 만한 자금력이 있긴 했지만 이 상태에서 더 나가게 되면 강회장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건 세연도 피하고 싶은 최악의 결과였다. 그러니 결국 그녀는 강회장이라는 호랑이를 등에 업은 태상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삼천을 부르면 얌전히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했는데, 도리어 일억을 던져버리는 행동에 세연은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이, 일억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
“......”
장내에 침묵이 돌자 사회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자도 좌중에 있는 이들도 그의 카운트다운이 사실은 아무 소용없음을 잘 알았다. 태상이 건 일억원이라는 낙찰가를 뒤집을 생각이 있는 이가 이곳에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물론 일억원을 단 번에 융통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러지 않았다. 태상의 뒤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가 무서웠고, 또 밉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강회장의 힘은 자금력에서 나오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넓디넓은 인맥에 있었다.
결국 그 작품은 태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송이에 비해 강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연신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의 임팩트라면 일억 원이 아깝지 않았다.
이제 오늘 이 자선파티에 온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소식을 건너들을 모든 이들이 태상을 얕보지 못할 것이다. 강회장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바로 기선제압이었다. 그리고 오늘 태상은 그 기선제압을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해냈다.
몸이 바뀌었을지 몰라도 태상은 태상이다. 오늘 강회장은 그걸 새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가 바로 유일하게 강회장의 마음에 차는, 그의 핏줄이란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강회장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송이는 입술을 깨물며 아득한 정신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방금 전 태상이 간 크게 1억을 내뱉었다는 게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1억....1억.....”
송이가 1억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계속 혼자서 작게 중얼거리다가 돌연 그녀는 태상을 힐끗 바라봤다.
‘너 정말 내가 아는 명진이 맞니?’
이 남자가 정말 내가 아는 남자가 맞는 건지, 그동안 설마설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들을 더 이상 속에 묻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그녀의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만들었다.
송이가 아는 명진은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도 태연한 얼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1억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저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술품에 1억원을 내야 한다는 사실도 펄쩍 뛰겠는데, 정작 그런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태연하니 송이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쩐지 체한 기분이 들어 송이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원하게 뻥 뚫리기는커녕 점점 더 답답해져만 갔다.
도대체 그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송이는 새삼 3일 동안 깨어나지 않고 잠들어 있었던 명진을 떠올렸다. 그때 일하러 다니지 말고 그의 곁을 지킬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송이는 더 이상 그의 변화를 외면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마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변해버린 명진이 좋아서 무시했던 것들을 직면해야 할 때가 온 듯 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갑작스러운 입양 이야기와, 자선파티는 깊은 혼란을 준 것이다.
“왜 그래? 속 안 좋아?”
이를 모르는 태상은 자꾸만 가슴을 두드리는 송이 때문에 걱정이 돼 물었다.
송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답답하다 싶더니 이러네.”
“고생했어. 이만 일어나자.”
태상이 옆자리에 있는 강회장에게 이만 나가자고 말했다. 이 정도 임팩트라면 목적했던 바를 모두 이룬 것이기에 강회장도 더 이상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것도 여운을 남기기 좋다 생각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회장과 태상, 송이가 파티장을 나서자 자선 경매장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도대체 태상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것과 그와 강회장의 사이가 도대체 어떤 사이인지에 대해서가 가장 말이 많았다. 그들은 강회장이 데려 온 태상의 정체를 알기 위해 각자 자신들의 정보라인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머지 경매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하지만 주최자는 이번 자선파티가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회장이 경매 물품을 수거해 가는 사람들을 통해 주최자에게 일억 원 이상의 보상을 해주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태상의 등장을 다룬 기사는 없었다. 강회장이 태상과의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정재계 사람들 속에서는 암암리에 그의 존재가 퍼지기 시작했다.
태상은 강회장에게 부탁해 세연이 이명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직은 놈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뜻밖으로 세연이 나타난 바람에 그의 존재가 알려질 위험이 있었다.
강회장이 태상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놈이 무슨 수를 쓸 지도 몰랐다. 가족들과는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었기에 놈을 완전히 케어할 순 없었다.
그러니 강회장에게 신신당부를 하며 꼭 들어주어야 한다 말했다.
세연은 강회장의 말을 절대 거부할 수 없을 테니, 강회장만 알겠다고 하면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사실 세연은 강회장이 당부하지 않아도 태상에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픈 아이에게 괜히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태상이 한시라도 빨리 기억을 되찾게 하기 위해 노력 해야겠다 생각한 세연이다. 다시 병원도 예약하고, 외국의 저명한 의사를 초청해 태상에게 보일 생각이었다.
태상이 다시 돌아오면 강회장도 예전으로 돌아오리라.
세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태상이 해내리라고. 자신의 아들을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빛을 볼 수 있을진 모를 일이었다.
태상은 자선파티를 보낸 후부터 송이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송이의 변한 태도가 무척 신경 쓰였지만 그는 지금 인간계가 아닌, 천계에 서 있었다. 그가 천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라마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그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메디노가 있는 곳을 찾았다고?”
“네. 하지만 20명의 계약자들로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단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메디노는 지금 다시 계약을 맺기 위해 마계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인간계에 있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려면 천사나 악마도 일정한 힘이 필요하다.
태상이 현실에 있는 악마 계약자를 죽였기에 자동으로 악마는 계약자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해서 놈은 다시 계약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를 찾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미션을 준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영 가망이 없어?”
“네.”
라마스가 너무 단호하게 가망이 없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태상은 난감함에 자신의 뒷머리를 헝클였다.
“그래서 아예 없던 일로 하자고?”
“아니요. 그럴 순 없습니다. 그가 또 다시 인간계를 넘보면 그땐 문제가 더 심각해질 테니까요.”
“그럼 어쩌자고.”
라마스는 태상이 가본 적 있던 그곳에서 또 다시 천사들끼리 회의가 열렸다고 말했다. 라마스는 미션이 이번 전쟁의 승패가 걸린 아주 중요한 미션이라는 것을 어필했고, 그 덕분인지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단다.
“인원증폭?”
라마스의 말에 태상이 꽤 괜찮은 방법이라며 진즉에 그랬어야 했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라마스의 말에 태상은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라마스가 말한 인원증폭 대상이 계약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랑 같이 움직이라고!?”
“네, 맞습니다. C급 천사 3명이 태상님을 보좌하게 될 겁니다.”
천사들과 함께 싸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인지라 라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더욱이 A등급 악마를 잡으러 가는 미션에서 C등급 천사 3명이 더 추가 된다 해도 막막했던 미션에서 탈출구가 생긴 것 같지도 않았다.
“C등급 천사 3명이 도와준다고 치자. 그 천사들은 도대체 뭘 해줄 수 있는데? C등급 천사들이 얼마 정도의 힘을 쓰는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천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들이 미션에서 태상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라마스는 천사들은 오로지 태상이 시키는 일을 목숨을 다해 따를 것이라 말해주었다.
“C등급 천사들을 이용해서 이 미션을 성공으로 이끄는 건 전적으로 태상님께 달렸습니다. 그들은 태상님이 하는 말이라면 죽으라는 것도 단순히 시늉이 아니라 말 그대로 따를 겁니다. 본인들도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따르는 거니, 아끼지 말고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라마스의 말은 태상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는 일단 천사 문제는 뒤로 하고, 메디노가 숨어 있는 마계 깊숙한 곳의 상황을 물었다.
“좋아, 그럼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메디노가 숨어 있는 곳에 대해서부터 얘기해줘.”
지금 C등급 천사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한다 해도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괜스레 시간을 버리기보단 다른 문제로 돌려보잔 심산이었다.
“알겠습니다.”
라마스가 손짓을 하자 태상이 있던 주변 배경이 바뀌었다. 하늘은 어느새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았고, 땅은 붉고 울퉁불퉁해졌으며, 나무는 온통 시커맸다. 태상이 주변을 한 번 쭉 훑자 라마스가 말했다.
“이곳이 바로 메디노가 숨어 있는 마계입니다.”
“마계는 다 이렇게 칙칙해?”
태상의 물음에 라마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 이런 식이긴 합니다.”
“취향 한 번 독특하네. 주변이 꽤 조용한데 왜 미션에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 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한 거야?”
“메디노가 숨어 있는 곳에 악마 계약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마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량하던 벌판에 건물이 세워지고, 악마 계약자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세하게 세어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100명은 되어 보이는 계약자들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가장 눈에 띄는 태상과 라마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태상은 그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변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메디노는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여기 어디에 숨어 있다는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 풍경이 갑자기 앞으로 쭉 밀리면서 이동되기 시작했다.
“이곳을 지나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메디노가 숨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저 많은 악마 계약자들을 뚫고 지나갈 방법이 없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우리 쪽 계약자들을 좀 더 데려 갈 순 없어? 어차피 악마 죽이는 일이니까, 환약을 쓸 필요 없잖아.”
“불가능합니다. 만약 이번 일이 전투가 아닌 전쟁이 되어버린다면 메디노의 계획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절대 다른 악마가 이번 일에 관심을 가져선 안 됩니다. 그러니 소규모의 인원으로만 메디노를 죽여야지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20명 정도의 계약자들로 뭉쳐 메디노를 죽이는 것은 전투지만 100여명 이상의 인원이 뭉쳐 죽이는 것은 전쟁이 된다.
테상은 라마스의 말에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정말 저 많은 악마 계약자들을 뚫고 메디노를 죽이기 위해 20명의 인원이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저 많은 수의 악마 계약자들을, 아무리 C등급 천사 3명과 함께 싸운다지만 감당해낼 수 있을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B등급 천사들이었다면 한 번 다 같이 싸워 보자 하겠는데, C등급은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가 않았다.
“뭔가 더 지원해줄 수 있는 거 없어? 너무 막막하잖아.”
태상이 라마스에게 앓는 소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했다.
“장비와 소비물품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