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자선파티 =========================================================================
“근데, 정말 여기에 강회장님이 오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강회장님이 참석하신다는 소문 듣고 모두 모인 거거든요.”
그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들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세연은 자신의 표정을 숨기며 호호 웃음으로 대신 대답을 했다.
“세연씨가 왔으니 진짜겠죠.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로 강회장님이 참석하시는 걸까요?”
“그러게요. 다들 이 파티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나 싶어서 부랴부랴 온 거거든요. 살짝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사람들이 세연에게 애교를 피우듯 말했다.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세연도 왜 강회장이 이 파티에 참석 하는지 모르기에 그들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난감함에 괜스레 와인으로 목을 축이던 그녀는 곧 강회장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말했다.
“마침 오시네요.”
세연이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고 강회장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강회장이 혼자 들어 온 게 아니라 양 옆에 한 남자와 여자를 대동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데 양 옆에 세우셨지?’
그때, 함께 들어오던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리고 남자는 마치 그녀를 아는 듯 눈동자를 잠시 크게 떴다.
남자는 그녀의 아들인 태상의 또래였다. 여자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긴장이 가득 보이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나 호감을 보일 만큼 세연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아버님.”
그녀가 강회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강회장도 그녀를 보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온 게냐. 온다는 소식 못 들었다.”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이런 곳에 참석하시는 거면 제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제가 함께 했을 텐데."
그녀의 시선이 태상과 송이에게 가 있다는 것을 강회장이 모를 리 없었다. 세연이 태상과 송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기어코 그에게 물었다.
"누군데 데려 오신 거에요?"
강회장은 힐끔 태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지 못한 일이었으나 오랜만에 만나는 어미가 반가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생각대로 태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주먹을 꽉 쥔 상태였다. 어색하게 꾸벅 인사하는 송이와 달리 태상은 세연을 바라만 볼 뿐 어떤 인사도 하질 않았다.
뭐하고 해야 할지 저도 막막할 것이다.
겉으로는 처음 만나는 사이기에 웃을 수도 없고, 자신의 처지가 새삼 떠오를 테니 마냥 기쁘진 않을 테고 말이다. 아들 뻘 되는 이가 인사도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게 기분이 나빠진 세연은 좀 뾰족한 어투로 말했다.
“그쪽은 예의라는 게 없어요? 상대를 봤으면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해야지?”
그녀를 온실 속 화초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물론, 그렇게 크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품위와 권위의식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카리스마를 갖게 만들어주었다.
강회장은 태상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 둘 사이를 끼어들어 옹호했다.
“이 아이는 내가 앞으로 데리고 다닐 아이다. 네 아들처럼 생각하고 대해주거라.”
사실은 진짜 그가 그녀의 아들이지만, 그걸 얘기할 수 없으니 강회장이 태상을 위해 말을 해준 거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역효과가 되어 세연의 머리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요즘 들어 태상에 대한 총애가 나날이 식어가고 있어 불안해 죽겠는데, 앞으로 데리고 다닐 아이라고 하니 쌓여 온 그녀의 불안감을 터트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더욱이 그는 한 번도 누군가를 그녀에게 소개하며 아들처럼 대해주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태상 빼고는 다른 이에게 자비로움을 베풀지 않는 강회장이었다. 누군가를 쉬이 가까이에 두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조차 마음에 차지 않아 내치는 강회장이다. 그런 차가운 사람이 유일하게 곁에 두었던 것이 바로 태상이었다.
그런데 태상을 버리고, 이젠 저 처음 보는 남자를 곁에 두겠다고 그녀에게 말한 것이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강회장이 온다는 말에 정재계 사람들이 모두 모인 곳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의 발언은 공식적인이라는 거다.
세연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다 듣고 보는 자리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강회장이 말이다. 모든 이들이 후계자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눈치 챌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세연은 도대체 이 청년이 누구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강회장이 혹시 지금까지 숨겨 둔 혼외 자식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만약 저 청년이 강회장의 혼외자식이라면 왜 뜬금없이 그가 자선파티에 참석한 것인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강회장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 남자를 소개시키려고 자선파티에 나선 게 분명하다.그래서 그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곳에 온 거다.
생각이 정리가 되자 세연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태상의 몸이 움찔 떨리며 그녀에게로 손을 뻗으려 했으나 세연이 다행이 균형을 잡고 섰다.
“지, 지금 저한테 아들로 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말까지 더듬으며 묻자 강회장이 그녀에게 확인사살을 하듯 말했다.
“그래. 아들이라고 생각하거라.”
도대체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와 강회장의 마음을 홀렸는지 모르겠으나 이대로 당할 순 없었다. 그녀의 아들, 태상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다른 후계자라니! 말도 안 됐다. 그녀는 설마 아니지요? 하는 눈빛으로 강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님, 저희한테는 태상이가 있잖아요. 멀쩡한 아들이 있는데, 어떻게 저 남자를 제 아들처럼 대해요. 장난으로 하신 말씀이시죠?”
강회장이 장난을 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수습해보려 했다. 강회장이 못 마땅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뭔가 말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옆에서 세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태상이 한 발작 나서며 세연의 어깨를 부축했다.
“얼굴이 창백하시잖아요. 이제 그만하시죠?”
공식적인 자리였던 지라 태상이 강회장에게 존댓말을 썼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상이 말하자 강회장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회장은 태상에게 아직 공식적으로는 알리지 않겠노라 약속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더 가게 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쩝. 알았다 이놈아. 안 잡아먹으니 그만 노려 보거라.”
제 어미 쓰러질까 전전긍긍하는 게 눈에 보여 강회장이 말했다. 그것을 본 주변 사람들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 강회장이 태상의 한 마디에 말을 멈추고 물러났다는 사실에 놀란 탓이다.
그리고 그 놀람은 세연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놔요.”
자신의 어깨를 잡은 태상의 손이 거북스러웠던 그녀가 발버둥 쳤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
“놀라셨잖아요. 그러다 쓰러지면 어떡하려고요. 여기 청심환 가져와.”
태상이 웨이터에게 청심환을 가져오라 말했다. 태상의 걱정대로 그녀는 지금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고, 눈동자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거 놓으라고 했잖아요!”
세연이 입술을 깨물고 손을 버둥댔다. 태상은 결국 그녀의 어깨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자신에겐 아니지만 세연에겐 그가 낯선 남자일 뿐일 테니 불쾌할 만도 했다. 태상이 손을 놓자 세연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표독스럽게 태상을 바라봤다.
차마 강회장의 앞이니 그에게 뭐라 따질 순 없었다.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어디서 뭐하는 놈인지 따지고 화를 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세연은 태상을 째려보다가 강회장에게 퉁명스럽게 인사를 하고 파티장을 나가버렸다.
태상은 그녀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바라봤지만 강회장이 그를 불렀다.
“어서 따라 오거라. 그리고 마음 약해지지 말거라. 곧 오해는 다 풀릴 거다.”
그의 말에 태상이 작은 목소리로 강회장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내가 말 했잖아. 잘 좀 대해달라고. 그거 하나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매번 하는 대답이지만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거다.”
강회장이 매정하게 말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강회장은 방금 전 일이 없었던 것 마냥 사람들에게 다가가 태상을 이명진이라 소개하며 안면을 익히게 했다. 물론 태상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기에 상대하기가 아주 쉬웠다. 그들과의 대화는 모두 태상이 주도했다.
그 모습을 뒤쪽에서 강회장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이름, 관심사 모두가 이미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상이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것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자 호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송이는 태상의 옆에서 그의 보조를 잘 해주었다.
대화에 과하게 끼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반응을 해주며 무던히 섞여 들어갔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가 굉장히 불편하고 힘들어 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기에 슬며시 대화에서 빠져나가며 송이를 테이블 의자에 앉혔다.
“힘들지?”
태상이 송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자 송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밖이니까 참고 있는 거야. 집에 들어가면 혼날 줄 알아.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서 가는 거라고? 소개 시켜 줄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겠지!”
송이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싶어 소곤소곤 태상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정작 태상은 지금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녀가 이런 자리를 마냥 어색해하지 않고 잘 대처해준 게 무척 기분 좋았던 것이다.
송이가 대견했던 태상이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본격적으로 자선 경매가 시작되려는지 무대 위로 사회자가 올라왔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자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던 악단이 손을 멈췄다.
“아아-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자선 경매가 시작 되겠습니다.”
태상은 송이를 에스코트해서 미리 자리를 잡아 놓은 강회장 옆에 와 앉았다.
“잘 하는 것 같더구나.”
“당연한 걸 뭐.”
태상이 별 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돈은 준비해뒀으니 넉넉하게 낙찰 받거라. 네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지.”
“여기서 입양 얘기까지 했으면 내일 신문에 나왔겠네. 너무 과하게 힘주는 거 아냐?”
“새롭게 시작하는 건데, 설마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넘길 생각인 게냐? 그건 절대 안 된다. 기선제압을 해야지!”
강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이 경매는 시작되어 첫 번째 물품이 올라왔다. 직원이 들고 온 것은 미술품이었다.
사회자가 그 미술품을 누가 기부해주었는지 소개를 했다. 그리고 경매는 곧장 시작됐다. 모두 좋은 의미로 쓰일 돈이기에 경매 물품의 가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경매가는 쑥쑥 올라갔다. 백에서 이백으로, 그리고 곧 사백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기부를 목적으로 했기에 경매는 치열하다기 보단 훈훈한 기운이 맴돌았다. 태상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팻말을 들어 올려 간단하게 말했다.
“이천.”
그의 말에 일순 파티장에 속삭이는 목소리로 떠들썩해졌다.
돈에서 자유로운 그들이긴 하지만 괜히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더욱이 오늘 처음으로 등장하는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모두들 그의 횡보를 유심히 살펴야 했다.
뭐하는 사람일까?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뒤에 강회장이라는 호랑이의 비호를 받게 된 걸까.
숨겨둔 자식일 확률이 가장 높긴했다. 둘의 얼굴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게 가장 설명이 되는 말이었기에 거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이나마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더욱 태상을 주시했다. 그때, 다른 한 쪽에서 팻말이 들어올려지며 말했다.
"삼천."
태상이 시선을 돌리자 팻말을 들고 있는 세연이 보였다. 파티장을 나간 줄 알았는데 다시 되돌아 온 듯 했다.
강회장이 그녀의 행동에 쯧쯧 혀를 찼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태상의 신고식을 망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제 살 깎아먹기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태상은 그녀의 의도를 단 번에 파악했기에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감히 강회장에게 맞설 생각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전부 태상을 위하는 마음 때문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녀의 피가 섞인 강태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을 잘 아는 태상은 표정을 굳히며 다시 한 번 팻말을 들어 올렸다.
"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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