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정혜연 =========================================================================
통화를 끊자 송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불어한 거야?”
“어? 아아 응. 아는 사람 동생인데 이번에 한국으로 놀러 와서. 나 씻고 올게.”
태상은 송이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 곧장 씻으러 움직였기에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송이는 명진이 도대체 언제 불어를 배운 걸까 고민했다. 불어를 배우는 게 숨길 일도 아닌데, 그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적어도 집을 전부 치우는 송이의 눈에 불어책 한 권이라도 보였다면 이렇게 황당해하진 않았을 것이다.
태상이 씻고 나오자 송이가 그를 본격적으로 추긍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불어는 그렇게 잘하게 된 거야? 어디서 배웠어? 언제?”
태상은 송이의 질문에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아야 했다. 태상은 자라면서 불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각종 나라의 언어를 배워왔다. 더욱이 다양한 나라를 여행 다니며 즐겼기에 그 외에도 짧게 여러 언어를 알고 있는 태상이었다.
“그냥 어깨너머로 배웠어. 일하다가.”
태상이 대충 넘길 생각으로 답했다. 하지만 송이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가 요즘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동안 그의 변화가 그녀에겐 환영할 만한 것이었기에 말하지 않고 있었을 뿐 ,이상하단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아예 딴 사람이 된 것 같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생전 배우지도 않았던 불어를 능숙하게 하자 더 이상 묻어 둘 수가 없었다.
“너 요즘 들어 많이 이상한 거 알지?”
“일하고 들어 온 사람한테 잔소리하는 거냐? 내가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아직은 그녀에게 자신이 명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싫었다.
모든 일에 자신만만한 태상이지만 송이 문제만큼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녀에게 자신이 이명진이 아니라고 말하면 떠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말을 못하는 거였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꿀릴 게 없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감을 잃은 문제였다.
물론, 태상은 자신의 그런 두려운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어 뒤로 늦추고 있었다.
“그냥 말 하는 거며, 날 대하는 거며....다 좀 많이 이상해. 행동도 그렇고. 예전이랑 많이 다르잖아. 다른 사람같이.”
마침 송이가 얘기를 꺼냈으니 태상이 이때다 싶어 물었다. 그동안 그가 가장 많이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떠오른 것이다. 태상은 이명진이 어떤 놈인지 알아보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명진에 대해 가장 자세히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송이였다.
“예전에 내가 너한테 어떻게 대했어? 말 해봐. 솔직하게.”
“....그건.”
송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전의 명진은 그녀에게 스킨십을 자주하지도 않았고, 친근하게 얘기를 해주지도 않았으며, 잠자리 횟수도 많지가 않았다.
스킨십을 하려고 하면 질린 표정으로 표정을 굳히기 일쑤였고, 얘기를 하다보면 수준차이 난다며 냉소를 하기도 했다. 출세를 위해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다니느라 그의 성욕은 다른 여자들에게 쏟아야 했고 말이다. 송이가 원하고, 원해야 겨우 한 번 잘까 말까였다.
아내에게 임신하지 말라고까지 하는 놈인데, 오죽했겠는가.
그에 비해 지금의 명진은 그녀와 자주 스킨십을 즐겼고, 대화도 자주했으며 잠자리도 그녀가 질려할 정도로 과하게 많이 하는 편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그녀에게 다정해졌고, 뜨거웠다. 요즘 이게 바로 사랑받는 기분이구나...싶기도 하고 말이다.
더욱이 지금은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돈을 왕창 들고 와 그녀를 편하게 만들어주고도 있었다. 더 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고, 집안 살림만 해도 된다는 게 아직까지도 꿈처럼 믿어지지 않는 송이였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에게서 다른 여자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명진의 향기는 짙은 여자 향수냄새였다. 그리고 그 냄새는 늘 바뀌었다. 여자 만나러 다니는 걸 화를 내면 이게 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런 거 아니냐며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곤 했다.
그 모든 악몽 같은 일들을 다시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니 송이는 목이 메어왔다.
"예전에는....."
송이의 눈가에 물기가 맺히자 태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 때문에 우는 건 봐줘도, 다른 남자 때문에 우는 꼴은 절대 못본다.
태상이 성큼 다가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꺄악!"
송이가 놀라거나 말거나 태상은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송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상기 된 표정으로 태상을 바라봤다. 그가 이제부터 뭘 할지 잘 알면서도 그녀가 모르는 척 물었다.
"뭐, 뭐하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태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예전에 있었던 일 전부 다 잊어. 아니, 내가 기억조차 안 나게 만들어줄게. 임송이 네가 누구 껀지 확실하게 알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송이의 목소리가 옅게 떨려왔다. 태상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후 자신의 상의를 거칠게 벗어던졌다.
송이가 파들파들 떨며 그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무슨 소리긴, 지금부터 널 전부 다 씹어 먹어서 내 걸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지. 기대 하라고.”
태상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송이는 호랑이 아래에 깔린 사슴처럼 눈만 깜빡이며 그가 자신을 언제 덮칠지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상이 의도했던 데로 이명진에 대한 송이의 생각은 쏙 들어간 상태였다.
삐그덕-
최고급 침대임에도 불구하고 태상의 힘을 버티지 못한 침대가 살려달라는 듯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내 송이의 신음에 묻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때를 가리지 않은 열기가 침대를 후끈하게 달궜다. 그 끝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고 말이다.
**
며칠 후.
“당신이 절 살려주신 그 분이신가요?”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의사가 호들갑을 떨어 왔더니 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여자가 일반병동에 떡하니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태상이 도착하자 여자가 그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의사는 그녀가 깨어나긴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며 충격으로 인한 실어증 증세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실어증이 아니라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닫은 것뿐인 듯 했다.
태상에겐 저렇게 멀쩡하게 말을 하는 것 보니 말이다.
“맞아. 상태가 굉장히 빨리 호전됐다며?”
“...네. 천사가 도와줬어요.”
여자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태상은 저 증오가 천사를 향한 것인지, 악마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천사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는 것을 태상은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 보안을 위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무시한 게 분명했다.
“절 살려주셔서 정말...감사합니다.”
싸늘했던 여자의 눈동자가 사라지고, 다시 본래 평범한 눈동자로 변했다. 그녀는 태상에게 아주 깊게 고개를 숙였다. 태상이야 원래 깨려던 미션에서 우연히 그녀를 구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인사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감사 인사를 한 여자가 태상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천계에서 제 손을 잡아주셨죠...”
“무사했으면 됐어. 앞으로 순진하게 악마 계약자들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잘 살아. 기껏 살린 목숨 허무하게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의 말에 갑자기 여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의사가 1인실로 그녀를 옮겨두었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태상은 여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이 여자가 왜 이래?’
설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놔라 할 생각인가?
태상의 불안한 생각과는 달리 여자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로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목숨이에요. 제 남은 평생을 당신께 받쳐 뜻깊게 쓰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세요!!”
“뭐?”
이건 또 뭔 소리가 싶어 황당해 하는데 여자가 말했다.
“당신의 노예로 거둬주세요.”
노예라는 말은 요즘 같은 21세기에선 잘 쓰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여자는 너무나도 단호하게 그에게 자신을 노예로 거둬달라 청하고 있었다. 태상은 이 여자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노예로 거둬서 뭐에 쓰라고?”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전부 할 수 있습니다. 죽으라면 죽고, 누군가를 죽이라면 죽이겠어요. 이미 너무 더러워진 몸이지만 원하신다면 취하셔도 좋아요.”
한 마디로 진짜 그의 노예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태상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알아서 잘 살라고 말했는데, 굳이 그런 취급을 받으며 남은 인생을 살겠다는 걸까? 하지만 그건 그가 그녀의 심정을 몰라서였다.
모든 게 다 끝났다 생각하며 좌절해 있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손을 잡아 준 태상은 마치 신과 같았다. 그가 자신을 봐준 순간, 그녀에겐 유일한 행복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으며 안식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짜 자신을 구해주러 왔을 땐, 만약 자신이 정말 살아남는다면 평생 그의 종이 되어 따르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정말 여자는 살아남았다.
믿었던 천사들에게조차 배신당한 상황에서 태상은 유일한 구원이었기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주었던 구원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바치고 싶었다.
“절 받아주지 않으시면, 이대로 자결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그가 없는 곳에서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일들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 살 바에야 그냥 죽는 게 낫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태상이 곁에 있어 준다면 그녀는 살 용기를 낼 것이고, 그를 위해 살아갈 생각이었다.
“.......”
태상은 단호한 표정인 여자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의 말을 무엇이든 들어주는 이가 곁에 있는 건 그에게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저 여자의 눈빛에서 전혀 거짓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를 속일 이유도 없고 말이다. 진짜 자신이 그녀를 거두지 않으면 저 여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될 것이다.
‘애꿎은 목숨 하나 날리는 것보다 내가 요긴하게 쓰면 좋겠지.’
태상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여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아! 정..혜연이요.”
태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지자 혜연이 얼굴을 붉혔다.
“혜연이라....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너도 이제부터 내 길드원이 되는 거다. 두 번째 길드원.”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혜연이 감격에 차 눈물을 흘렸다.
“몸 상태는 완전히 나은 건가?”
“천사가 보상이라며 제 몸을 모두 고쳐줬어요.”
그녀의 말에 태상이 속으로 생각했다.
‘병 주고 약 주고네.’
괜스레 혜연을 위해 최고의 의사를 불러와 수술시켰건만 천사가 다 치료를 했다고 하니 허무해졌다. 천사가 그녀의 몸을 치료해준 덕분에 살아나긴 했지만 둘 모두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태상은 그녀와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퇴원하자.”
“네.”
혜연은 태상의 말에 마치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