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40화 (40/251)

00040  전투  =========================================================================

“용케 맞췄네. 맞아. 네 말을 듣고 두 가지로 악마 계약자 능력을 좁혀놨었거든. 순간이동을 하는 놈이거나, 요정들처럼 투명화를 쓰는 놈이거나로 말이야. 그래서 좀 무식한 방법으로 너랑 수색하면서 계속 무력화를 썼었지.”

무력화가 그게 가능한 능력이었나 곰곰이 떠올려 본 그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무력화라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 원래 무력화는 한 번 쓰면 딜레이가 엄청 길다고.”

그들이 느릿하게 움직이긴 했어도 아예 거북이처럼 기어간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나중에는 속력을 높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사로나는 말이 되질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태상의 표정을 보고 진짜 그가 그렇게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둘 사이에서 침묵이 돌았다.

사로나는 괜스레 목이 말라져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물 잔을 들어 꿀꺽 마셨다.

“내가 생각하기엔 네 무력화가 일반적인 무력화랑 다른 것 같은데 맞아?”

“보통 사람들이 쓰는 무력화가 어떤지 본 적이 없어서 뭘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모르겠네.”

“네 능력이 정확히 어디까지 무력화 시킬 수 있어?”

태상이 잠시 팔짱을 끼고 뭐라고 말을 할지 고민했다.

“음...내가 지금까지 사용해봤을 때, 악마가 사용하는 능력을 쓰지 못하게 만들 수 있고, 체력, 힘, 방어 모두 약화시키던데?”

사로나가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되지 않은 손님이 힐끗힐끗 그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사로나는 그들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하다고?!”

“진정하고 앉아.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

사로나가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털썩 자리에 다시 앉았다.

“진짜야? 해본 적 있어?”

“해본 적 있어. 저번에 c등급 미션에서 악마한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자신만만해 하던 것처럼 둘이서도 다섯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상대하고도 남았다. 자신이 이 미션에서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질 않을 정도였다.

“네 능력이 사실이라면 굳이 내가 필요 없었던 거 아니니?”

“아니, 필요해. 내 무기는 마나건인데, 우리나라는 일반인이 총기소유를 할 수 없는 나라거든. 구하려면 구할 수야 있겠지, 근데 사용까지 하는 건 무리야.”

총을 사용하면 수습할 절차가 굉장히 까다로워질 것이다. 그건 절대 피하고 싶었다. 그런 점을 봤을 때, 깔끔(?)하게 검을 사용하는 그녀가 제격이었다.

결국 사로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주어야 했다. 처음 S등급을 받았을 땐 어떻게 이 인원으로 해결을 해야 할지 막막하게만 느껴졌는데, 태상의 능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니 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무력화에 딜레이가 짧고, 방어, 체력, 그리고 능력에까지도 무력화가 먹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겠는가. 그들이 능력자이기에 다섯을 상대하기 힘든 거였지, 능력을 잃은 일반인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미 태상에게 환약을 받아 섭취한 후였다.

아마 접속을 끊은 후 현실로 가게 되도, 지금처럼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고, 태상의 능력 덕분에 다섯 명의 능력이 잃은 상태라면 못할 게 없다. 그들에게 잡힌 여자도 구해낼 수 있을 거란 희망도 들었다.

“전용기 빨리 보내줘. 당장 너희 나라로 갈게.”

사로나가 의욕을 보였다. 태상이야 환영할 일이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S등급 미션은 악마 계약자를 잡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을 꾸민 악마를 잡아야 끝이 나는 거였다. 그러니 악마 계약자들을 처리한다고 S등급 미션이 다 해결 되는 건 아니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태상과 사로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일찍 접속을 끊었다. 지금 그들은 천계보다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

거대한 활주로에서 비행기 한 대가 매끄럽게 바퀴를 굴리며 내려앉았다. 잠시 후,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그들의 뒤를 따라 내려왔고, 미리 대기를 하고 있던 이들이 아래쪽에서 고개 숙여 귀빈을 맞이했다. 하지만 정작 귀빈대접을 받고 있는 사로나와 그녀의 동생 아이라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한가득 깃들어 있었다.

그녀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그녀들을 맞이하는 직원이 매끄러운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대 감사합니다.]

[회장님께서 귀빈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언니, 이거 꿈이야?]

아이라가 사로나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로나는 자신도 적응이 되지 않고 있었지만 동생에겐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꿈 아니야. 모처럼 여행 온 거니까 재밌게 놀다가자. 알았지?]

[응!!]

아이라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생애 첫 외국여행이었기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즉 데리고 여행을 다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라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아픈 아이가 아닌데, 지례 겁에 질려 여행을 다닐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

물론 이게 완전한 여행인 것은 아니지만 아이라는 여행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사실은 사람을 죽이러 가는 여행이라고 털어 놓을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제부턴 좀 더 신경 써서 아이라와 여행도 다녀야겠다 생각하며 그녀를 안내하는 이들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처음 보는 이국 풍경에 아이라는 창문에 딱 달라붙어 밖을 구경하기 여념 없었다. 사로나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창문 밖을 구경했다. 매끄럽게 큰 진동 없이 움직이던 차는 곧 하늘을 닿을 듯 높게 올려진 휘양 찬란한 호텔 앞에서 멈춰 섰다.

[저희는 이곳까지만 안내하라는 명을 받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네. 감사했어요.]

[별 말씀을요. 좋은 여행 되십시오.]

끝까지 정중과 예의를 잃지 않는 이들이었다. 사로나는 문득 태상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전용기를 갖고 있고, 저런 사람들을 부리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알기론 태상이 계약자가 된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점수로 이런 부를 일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에 결국 그가 가진 이 모든 것들이 천사들에게 소원을 빌어 생긴 게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자신의 것이라는 게 된다.

사로나가 아이라와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 섰다.

모든 게 낯선 타국에서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었던지라 평소와는 달리 그녀가 반가운 얼굴을 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상!]

“왔어?”

그녀에게 다가온 이는 바로 태상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 호텔에서 사로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여자아이가 그녀의 동생이라는 것을 눈치 챈 태상이 시선을 돌려 아이라에게 프랑스어로 인사했다.

[안녕? 꼬마 아가씨?]

[당신이 강태상인가요? 언니 친구라고 들었어요. 저희가 여행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들었고요. 언니랑 절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아이라의 명랑한 목소리가 더해지자 태상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사로나의 동생은 친 자매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다른 분위기를 냈다.

[나도 말로만 듣던 아가씨를 만나게 되서 영광이야. 부디 한국 여행이 즐겁길 바라.]

태상이 사로나와 아이라가 투숙할 숙소를 안내해주겠다며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아이라는 숙소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사로나와 태상은 잠시 둘이서만 은밀히 얘기를 나눴다.

[몸은 어때?]

태상이 말한 몸은 능력이 써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태상처럼 그녀도 환약을 먹었기 때문에 이제 이곳에서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맞았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이 쌔졌어. 스피드도 빨라지고. 아마 여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다칠 걸?]

사로나가 자신만만해했다. 태상은 설마 그렇게까지 해도 안 다치겠냐며 헛웃음을 지었다. 태상은 농담으로 생각했지만 사로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밤이 되면 움직일 거야. 그때까진 동생이랑 자유롭게 구경 다니도록 해.]

[난 한국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는데...]

[걱정 하지 마. 가이드 준비해뒀어.]

그때, 아이라가 구경을 끝냈는지 태상과 사로나에게 달려왔다. 아이라는 두 사람의 팔을 탁탁 잡더니 말했다.

[우리 구경 가요!]

아이라의 말에 사로나와 태상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아이라는 당연히 태상이 그들과 함께 움직일 거라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원래 계획에는 당연하게도 그런 예정이 잡혀 있질 않았다.

[아이라, 태상은 우리랑 같이 다니...!]

[그래, 가자. 아이라 혹시 한국음식 먹어 본 적 있어?]

[아뇨? 없어요!]

아이라가 신나서 태상과 함께 먼저 숙소를 나갔다. 뒤에 남게 된 사로나는 난감함에 한숨을 쉬었다. 태상이 아이라를 실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맞춰주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오기까지도 굉장히 과할 정도로 대접 받아 온 그녀였다. 태상이 이렇게까지 해줄 줄 몰랐기에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었다.

사로나는 일단 간단하게 챙겨 온 짐 속에서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들고 나왔다. 둘은 벌써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

아이라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잔뜩 신나게 여행을 즐기고 돌아 온 아이라의 얼굴이 시무룩해져 있었다. 사로나와 태상은 그녀가 왜 신나게 여행을 즐기다가 마지막에서 저 얼굴이 됐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외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라 괜찮겠어? 잔뜩 시무룩해져 있던데.]

잠시 바깥에서 태상이 기다리기로 하고, 아이라를 재우고 나온 사로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음...굉장히 실망한 눈치여서 신경이 쓰이는데.]

태상의 말에 사로나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괜스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걔가 병원에서 자라서 좀 자기 생각에 빠지곤 해. 그냥 신경 쓰지 않아주면 된다고.]

어째 협박이 살짝 들어간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놀리면 맞을 분위기였기에 그만하기로 하고 태상이 입을 다물었다.

사로나가 이렇게 창피해한 이유는 바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아이라는 태상을 사로나의 남자친구라고 오해했고, 그가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굉장히 실망해하며 시무룩해했다.

아이라의 오해 때문에 사로나는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냥 시무룩해한 것도 아니고, 굉장히 아쉬워하는 티를 팍팍 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정말 고마웠어. 네가 함께해서 아이라가 굉장히 기뻐했거든.]

[안타깝게도 계속 같이 있어주진 못해. 알다시피 가정이 있는 몸인지라.]

[태상!]

결국 태상은 사로나에게 어깨를 한 대 맞아야 했다. 만약 그때 그녀에게 무력화를 쓰지 않았다면 전치 4주는 입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태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