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전투 =========================================================================
“기억은 천천히 생각하고,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해봐야 하지 않겠니?”
강회장의 제안에 명진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회사에 입성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동안 강태상의 어머니에게 회사에 나가고 싶다 어필해봤지만, 알게 된 것이라곤 그녀가 회사에서 전혀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강태상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의 모든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강회장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볼 때마다 온 몸에 식은땀이 줄줄 나곤 했다.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심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마냥 두렵고 어려운 존재인 강회장이 뜻밖에도 이렇게 웃으면서 어깨를 토닥이니 그 기분이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명진은 처음으로 강회장 앞에서 어색하지 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거절해주는 게 예의였던 지라 명진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강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미 잘 해왔던 것들이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잘 해내리라 믿는다.”
이 집안의 실세가 자신을 믿는다고 하니 절로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 자신의 삶이 진짜 시작되는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이 집안에 적응하기 위해 명진은 한 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친 적이 없었다.
명진이 의지를 다잡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기회를 주셨으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강회장은 그런 명진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럼. 그래야 내 손주지.”
“하하하.”
명진이 그의 말이 기분이 좋았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만약 강회장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절대 그리 웃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이도 그는 남의 속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었다.
“아범에게 말 해놓을 테니 내일부터 준비해서 출근하거라.”
“예.”
명진이 자신감을 담아 대답을 했다. 잔뜩 긴장했다가 조금 긴장감이 풀려서 인지 목이 탔다. 그가 커피를 꿀꺽 꿀꺽 마시자 달디 단 커피맛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한 선택이 완벽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강회장이 먼저 그에게 목을 축이자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녹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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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라고 저장되어 있던 여자에게 들은 별장 주소를 찾아 움직이자 한적한 도로로 길이 이어졌다. 그 길을 따라 좀 더 움직이자 태상의 시야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별장이 보였다.
“저긴가?”
그는 섣불리 안으로 들어가기보단 밖에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별장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바깥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별장 창문에 불이 모두 켜져 있어 짐작할 수 있었다. 차를 멀찍이 대고, 별장 근처 수풀 속에 몸을 숨긴 태상은 마침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별장 안에서 나온 남자는 쪼그려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물기 전 바닥에 침을 뱉은 후 피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는 놈이 박상현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이 어둑해진 터라 확실하게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다시 다른 누군가가 별장 안에서 담배를 들고 나왔다.
‘박상현 혼자 있는 게 아니었나?’
태상이 혹시 몰라 좀 더 몸을 숙였다.
“야! 여기서 뭐해?”
“뭐하긴, 담배 빨고 있었지.”
“웬 청승이냐?”
뒤늦게 나온 남자가 낄낄거리며 쪼그려 앉아 있는 남자의 몸을 툭툭 쳤다.
“시발, 넌 답답하지도 않냐? 이 생활 지겨워 죽겠다고. 이명진 그 새끼 믿고 지금 이러고 있는데, 연락 한 번을 안 하잖아.”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놈이 약속만 지키면 우린 더 이상 이렇게 숨어 지낼 필요 없다고. 살인사건 해결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그건 나도 아는데..! 하아..”
남자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덩달아 쪼그려 앉은 후 담배에 불을 피워 입에 물고 말했다.
“능력을 쓸 수 있게 되면 전부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게 답답하지? 나도 마찬가지긴 해. 근데 어쩔 수 없다고. 무대포로 막 능력 썼다가 일 꼬인 거 너도 겪었잖아.”
“그놈한테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만 물어보자. 아무 것도 모르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니까 참을 수가 없어. 너도 그렇잖아.”
“.....”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지 침묵하는 남자였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태상은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이 저지른 살인사건들을 이명진이 모두 해결해주기로 했다는 것과 지금 이 별장에 있는 놈들 모두가 현실에서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 그리고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남자가 생각을 정리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 연락했다가 꼬리 잡히면 일 다 망칠 거라고. 조금만 더...한 삼 일 정도만 더 참아보자.”
“...좋아, 그럼 삼일 후에 무조건 놈한테 연락해보는 걸로 하는 거다.”
“그래 임마. 빨랑 들어와. 천사 계집 일어났어. 한탕 하자고.”
“그래?”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벌떡 일어나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려 발로 비벼 끄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태상은 놈들의 수가 몇이나 되는지 알기 위해 별장 창문 아래로 접근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다섯 명의 남자가 보였다. 그들은 둥글게 서서 한 곳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 속에는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온 몸이 상처와 멍투성이었다. 그걸 단 번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였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마치 호랑이에게 물려 있는 토끼처럼 오들오들 떨며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의 앙상한 몸이 그동안 그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녀를 빙 둘러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그녀의 머리채를 쌔게 쥐었다.
“아아악!!”
창문 사이로 여자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불행이도 이곳은 인적이 드문 별장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구하기 위해 경찰을 불러주지 않았다.
“어이, 꿈속에서 뭐하다 왔냐? 천사들한테 살려달라고 빌었냐?”
“큭큭큭, 그래봤자 그놈들은 널 구해주러 못 와. 알아?”
“널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그러니까 빌려면 우리한테 비는 게 더 빠를걸~? 네가 잘 빌면 변기 정도로는 써줄 의향이 있거든~킥킥킥.”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여자를 성폭행 한 듯 했다.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몸을 떨며 울고만 있었다. 저 여자는 분명 천사 계약자일 것이다. 그러니 악마 계약자인 저들이 저렇게 심하게 여자를 대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들은 상대진형 쪽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범죄라고 여기는 지구의 법칙을 귀찮게 여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마계에 가게 되면 천사 계약자를 죽이는 건 공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건 천사 쪽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었고 말이다.
태상이 염려하던 상황이 이곳에서 작지만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기척을 내지 않고 움직여 차를 주차해두었던 곳으로 향했다. 저들은 심심함을 여자에게 풀고 있기에 아직 죽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죽고 싶을 만큼의 일들을 당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만약 그때까지 목숨을 붙잡고 있다면 태상은 그녀를 구해줄 생각이었다.
지금은 아무리 그라 해도 나설 수가 없었다. 이곳을 사로나와 함께 왔다면 당장 구해주었겠지만, 마나건이 없는 이곳에서 다섯 명의 남자를 혼자서 감당해 내는 건 아직 그에게 무리가 있었다.
‘운동을 배우든가 해야지 원.’
그가 구해주지 못하면 경찰에라도 신고하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실 그것도 어려웠다. 만약 경찰이 이곳에 출동하게 되면, 그들은 천사 계약자인 그녀를 두고 그냥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태상이었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사람 한 명 죽이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당연히 여자는 죽을 것이고, 악마 계약자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릴 거다. 그건 상황을 최악으로 만드는 거였다.
결국 그들에게 붙잡힌 여자가 얼마나 버텨주느냐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태상은 결국 이 일을 완전히 끝내려면 사로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저 별장에 있는 놈들이 이번 일을 꾸미는 놈들 모두가 모여 있는 것으로 보이니 그나마 일망타진하기 쉬웠다.
사로나에게 받아 두었던 그녀의 연락처로 태상이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동생 상태를 확인하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지 오늘 밤에 접속해서 듣기로 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진 것이다.
혹시 몰라 그녀의 핸드폰 연락처를 받아두길 잘한 듯싶었다.
잠시 후 신호음이 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Allô?]
“사로나.”
사로나는 프랑스인이었기에 당연하게도 상대편이 하는 말은 프랑스어였다.
“Qui est-ce?”
태상은 누구인지 묻는 사로나의 질문에 그가 능숙하게 프랑스어로 대답해주었다.
“나 태상이야. 이곳으로 와 줄 수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
사로나는 태상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떼고 잠시 번호를 바라보다가 다시 귀에 가져다댔다.
[태상? 정말 태상이야?]
“응.”
[맙소사. 여긴 지금 새벽이라고! 시차는 생각 안 해주고 전화를 하면 어떡하니?]
“너 밤에 일하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의 시차는 7시간이다. 사실 시차를 따지면 그와 그녀가 맞물릴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런데도 그동안 태상이 사로나와 문제없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새벽부터 일하고 늦은 오후에 잠을 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로나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태상은 당연히 몰라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가 태연하게 알고 있었다고 말하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건 무슨 상관이야? 악마 계약자 놈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아냈어. 최대한 빨리 와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됐어?”
[....방금 휴가 냈어. 의사 선생님께 전용기에 의사까지 대동한다니까 믿진 못하셨지만 괜찮다고는 허락하셨고.]
“좋아! 너희 집이 어디라고 했지? 지금 당장 짐 싸. 아니다, 짐 쌀 필요도 없네. 그냥 몸만 와. 다른 건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전용기 바로 보낼 게.”
[지, 지금 당장?]
“그럼 언제까지 늦장 부리려고? 지금 한 시가 급한 거 알잖아.”
[나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건 알지만, 이건 너무 급해! 동생한테 아직 여행 간다고 얘기도 못했단 말이야.]
“지금 얘기하면 되겠네.”
태상이 당황해하는 사로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빨리 서두르라며 재촉하던 그는 기어코 사로나에게서 알겠다는 말을 받아낸 후 통화를 끊었다.
태상은 별장을 뒤로 하고 차를 몰았다. 어디선가 여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지만 태상은 고개를 저어 털어버렸다.
저 여자가 당장 죽는다 해도 태상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냉정한 얘기지만, 저 여자를 희생시켜서라도 그는 반드시 이 일을 조용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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