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두 번째 접속 =========================================================================
남자도 자신의 목소리가 허공에 사라질 것을 알았기에 뻗은 손을 축 늘어트리고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널 먼저 버린 것도 나고, 떠난 것도 나인데....왜 이렇게 네가 그리울까?”
남자, 명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지금 네 옆에 있는 놈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네 남편은 나고, 그놈은 가짜일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명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를 버리고 얻은 대가가 너무나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하던 가난에서도 벗어났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도 생겼다.
그는 영원히 벗어나고 싶지 않은 튼튼한 울타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것들과 다시 송이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온다 해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만약 지금의 상태로 그녀까지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뀐 강태상이라는 놈은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놈이었다.
그런 인생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되었으니 포기했던 사랑도 갖고 싶어졌다. 송이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도 자신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에겐 그녀를 유혹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고아 이명진에겐 없는 따듯한 가족과, 돈이 바로 그것이었다. 명진은 그것들로 송이를 유혹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오늘은 이렇게 인연을 만든 걸로 만족할게. 다음에는 절대 이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명진이 잠시 벗어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지긋지긋하던 계단이 이젠 옛 추억이 되어 그날들을 그리워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주고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그 끝에는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정도의 값이 나가는 고급 외제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게 명진이 원하던 삶이었다. 비록 남의 삶을 훔쳐서야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었다.
부릉- 부릉-!
명진의 차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움직였다.
잠시 좁은 골목을 달리느라 속도를 내지 못했던 명진의 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말로만 듣던 일들이 일어났다. 그의 차 곁에는 차들이 잘 서지 않는 것이다. 작은 기스에도 인생 망하게 하는 외제차의 옆에서 운전을 할 간 큰 사람은 몇 없었다.
명진은 그런 이들을 속으로 한껏 비웃어주며 차를 몰아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지나도 차로 10분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대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강태상의 할아버지가 사는 곳이었다.
명진이 차에서 내리자 고용인이 그에게서 열쇠를 받아갔다. 명진은 익숙한 듯 그에게 열쇠를 건네주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향해 고용인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도련님이라....’
들을 때마다 적응이 잘 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적응이 안 되는 것 뿐이지 듣기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회장님이 보자고 하셨다죠?”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이는 그가 누리는 모든 부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 대외적으로는 물러나야 했지만 뒤로는 여전히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이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가 바로 강태상의 할아버지였으며, 그는 태상을 아주 신뢰하고 있었다.
명진은 이곳에서 눈을 뜨자마자 집안사람들의 관계를 가장 주의 깊게 봤다. 현재 대외적으로 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태상의 아버지는 완전히 바지사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권력은 그의 할아버지가 갖고 있었고, 그 할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뛰어넘어 태상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있었다.
중간에 자신이 들어오는 바람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자신에게 옮겨졌는지는 아직 밝혀내지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해서 명진은 가족 중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의 할아버지였다.
똑똑똑
“저 태상입니다.”
명진이 문을 두드리고 기척을 내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호랑이 얼굴이 걸려 있는 벽 장식품 아래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읽고 있는 강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명진이 깍듯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
강회장은 명진이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아무런 답도 해주질 않았다. 마치 그가 없는 사람인 것 마냥 계속해서 읽던 책을 넘겼다. 명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을 드러내고, 그의 말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책의 마지막장이 넘어가자 강회장이 돋보기를 벗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냐?”
강회장이 드디어 명진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명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예의바르게 웃으며 말했다.
“집중해서 읽으시는 것 같아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
강회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명진은 더욱 고개를 숙이며 강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강회장이 이내 고개를 휙 돌려버리고 말했다.
“나가봐라.”
“....예.”
또다.
가끔 강회장은 이런 식으로 명진을 부른 뒤 허무하게 돌려보냈다. 명진은 분명 이 행동에 무언가 숨은 뜻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그를 모시는 고용인들을 닦달해 봐도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명진은 결국 얌전하게 허리를 숙여 다시 한 번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명진이 나가자 홀로 남은 강회장은 문을 힐끗 바라 보며 혀를 찼다.
“어찌 저놈이 저리 변했누....기억이 사람을 변하게 한 건가 아니면 아예 사람이 바뀌어 버린 건가. 알 길이 없구나.”
오랜 세월을 산 노인답게 그의 안목은 예리했다.
강회장은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회사를 물려 줄 후계구도를 바꾸어야 할지 고민했다.
‘유언장을 다시 작성해야할 듯싶군.’
마음에 차지 않으면 자식도 버릴 수 있는 냉정한 자가 바로 강회장이었다. 아무리 그동안 무척이나 아끼고 총애했다 해도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태상이 저렇게 변해버릴 것이라 생각지 못했기에 강회장은 그동안 그에게 많은 것들을 미리 넘겨주었었다.
그가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강회장이 책상에 설치되어 있는 빨간색 버튼을 누르자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고 고용인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내일 외출 할 터이니 준비하게.”
“예, 회장님.”
강회장의 손에 들린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카드가 순간 반짝이며 빛을 내뿜었다.
**
“너무 좋다~~!‘
송이가 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태상에게는 그리 흡족하지 않은 크기였지만 지금까지 계속 좁은 곳에서 살았던 송이는 이곳이 대궐처럼 느껴졌다.
태상은 기뻐하는 송이의 모습이 나름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챙겨 온 짐 빼고는 따로 정리할 게 없었다. 그가 미리 이삿날 전에 가구를 들여놨기 때문이다. 송이는 제일 먼저 주방을 탐험하며 연신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아니 어떻게 식료품까지 다 채워놨어?”
“일 시킨 사람이 일을 잘 했나 보네.”
받은 만큼 잘 한 듯 했다. 송이가 연신 감탄을 내뱉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챙길 필요 없다고 했잖아.”
송이는 걸레를 들고 미련이 남은 듯 이곳저곳을 닦아 봤지만 이미 충분히 그에게 돈을 받은 이들이 청소를 해놓은 터라 먼지 하나도 나오지가 않았다.
태상이 소파에 앉아 한가로이 있자 송이가 결국 포기를 했는지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할 일이 없어.”
그녀가 챙겨 온 것들도 이미 새 걸로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괜히 챙겼나봐. 정말 다 버려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챙기지 말라고 했잖아. 말 안 듣더니...”
“그래도 추억이 있던 거니까, 챙기고 싶었어.”
“.....”
그녀가 말하는 추억은 자신과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그것들을 모두 버리는 게 더 좋았다.
“그냥 버리지? 어차피 이제부턴 쓸 일 없잖아? 새롭게 시작하는 건데 저런 구질구질한 것들을 굳이 쌓아 둬야 하나?”
그녀가 저 물건들을 모두 버리게 됐을 때, 비로소 그녀는 태상과 진짜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진과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버리게 될 테니 말이다.
그의 속뜻을 몰랐던 송이는 많은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결국 그것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쓸모가 없는데 굳이 쌓아두고 살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가 가져온 것들은 이 집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래....어울리지 않네. 이 집에는....”
송이가 버리겠다는 것에 동의를 하자 태상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짐들을 들었다.
“버리러가게?”
“어.”
태상이 미련의 싹을 지워버리도록 나서서 그녀가 챙겨 둔 짐을 모두 버리고 돌아왔다.
“근데 말이야. 너 이제 휴가 슬슬 끝나지 않았어?”
시원한 에어컨을 틀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송이가 문득 기억이 났다는 듯 물었다. 태상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뭔 소리야?”
“일 말이야. 이렇게 오래 쉬어도 돼?”
“.......”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는데, 명진의 직업이 이래봬도 검사였다. 하지만 태상이 검사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겠는가. 덕분에 태상이 난감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검사 그거 굳이 해야 돼나?”
“검사를 안 하면 우리 뭐 먹고 살아?”
“너 안 굶길 자신 있는데? 갖고 있는 재산만 해도 평생 먹고 살아.”
“치....그래도 사람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 게을러지지 않는다고.”
그녀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태상은 돈을 버는 것보단 강해지는 데에 더 시간을 쏟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그러다가 총을 쏘는 거나 체력을 단련하면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강해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해서 그는 관심도 없는 일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만 두는 게 낫다 생각했다.
“말도 안 돼. 그 말 농담인 거지?”
송이가 놀라 물었다.
그는 농담 맞냐는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눕혀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더워~”
답을 해주지 않는 태상이 미워 송이가 투정을 부렸다.
"에어컨 빵빵하게 돌아가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태상이 어림없다는 듯 말하고 눈을 감았다.
“뭔가 오늘 하루 종일 나 혼자만 분주했네. 정말 네 말대로 몸만 와도 됐는데.”
송이가 허무해져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태상은 못 들은 척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지 진짜 잠에 들려는 생각은 없었던 태상이다. 잠이 쏟아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라마스를 보고 자신이 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잠들었다고?”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리둥절해서 말하는 태상에게 라마스가 사과를 해왔다. 왜 그런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녀가 일부러 그를 부르기 위해 잠이 오도록 만들었다고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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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