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두 번째 접속 =========================================================================
송이는 태상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자신의 앞에 있는 쇼핑백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꿈인 줄 알았거든. 근데 꿈이 아니잖아.”
“......”
태상이 송이의 엉뚱한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기집애가 진짜 미쳤나 싶었다.
그럼 그 일이 진짜지, 꿈이란 말인가? 그는 송이가 차라리 꿈이었기를 바랐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꿈이 아니라서 싫다는 거야, 아니면 좋다는 거야?”
“....모르겠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나.”
쇼핑백을 동물원에 있는 동물 보듯 바라보는 송이였다. 태상은 좀 더 그녀가 지금 상황이 현실임을 깨닫도록 해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쇼핑백 안에 있는 옷들을 바닥에 우르르 쏟아냈다.
옷과 핸드백, 신발 등이 무차별적으로 바닥에 쏟아졌다. 비싼 것들이 바닥을 뒹굴자 송이가 비명을 질렀다.
“야아~! 너 뭐하는 거야! 이게 얼마짜린데!!”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나 그래도 비싼 건 알았다. 송이가 기겁을 하며 옷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태상은 일부러 그녀가 이것들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게 하기 위해 더욱 바닥에 던지기 시작했다. 송이가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그가 던질 쇼핑백은 아주 많았다. 그들이 쇼핑한 게 정말 집안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 좀 해에~!”
송이가 태상의 바짓단을 잡으며 늘어졌다.
“네가 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저가 인생 살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건 나랑은 별개 문제다. 이제부터 네 남편은 나니까 앞으로 바뀐 모습에 적응하도록 해. 이런 호들갑 굉장히 거슬려.”
송이가 잡고 있던 그의 바지를 놓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태상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어떻게 바뀌었는데? 그리고 왜 바뀌었는데? 알고 있었어. 네가 요즘 이상하다는 거. 갑자기 안하던 행동도 하고, 이상한 말이나 하고. 성격도 바뀐 것 같고... 이상한 거 한 두가지 아니었는데 그래도 계속 안 물었어. 네가 묻는 거 싫어하니까.”
“나도 묻는 거 별로 싫어해.”
“.......”
태상이 송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냥 즐겨.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일들을. 말도 안 되고 이상한 일 투성이겠지만 그래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해야 할 거야. 그렇게만 생각해주면 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다.”
'잠시동안 일 수도 있겠지만.'
“명진아...!”
그의 말은 송이에게 무척이나 유혹적이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 대가로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태상은 마치 천사가 그를 유혹했던 것처럼 송이를 유혹했다.
“그렇게 할 거지?”
“........”
“간단해. 그냥 묻지만 않으면 돼. 궁금증만 없애면 넌 꿈에 그리던,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송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냥 묻지 않고 즐기라고. 난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럼 된 거 아닌가?”
“.......”
송이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그녀에겐 명진만 있으면 됐다.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라겠는가.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끄덕여졌다. 이에 태상이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잘 한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그런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태상의 입술이, 그리고 그의 몸이 그녀에게로 깊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흡!”
송이가 그의 강한 힘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태상이 그녀의 등을 잡아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오히려 더욱 자신에게로 당겨 그녀의 몸을 단단하게 휘어잡았다.
“자, 잠깐만...! 하지마...”
송이가 그렇게 얘기하자 태상의 몸짓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췄다.
“하지 말라고?”
“.....”
태상은 싫다는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 그러기엔 그에게 좋다는 여자들이 너무 많았다.
송이가 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자 태상이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아슬아슬하게 입을 맞출 듯 말 듯 말했다.
“하지...말까?”
“......”
송이가 잠시 머뭇댔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의 입술 가까이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며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태상이 씨익 웃곤, 그녀의 입속에서 혀를 좀 더 적극적으로 놀렸다.
“우음...!”
둘은 서로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옷과 상대방의 옷을 벗어던졌다. 주변에 깔려 있는 옷들이 그들의 몸에 깔렸지만 이번에는 송이조차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부드러운 옷들이 태상의 힘에 밀려 이리저리 부스럭거렸다.
“하읏...! 이러..다가 임신이라도 하면 어떡할려고 그래. 콘돔 좀 껴!”
“싫어.”
"얘가 진짜 왜 이래? 진짜 그러다가 임신하면!"
“아이씨, 임신 하면 하는 거지! 콘돔 끼기 싫다고.”
임신은 늘 그의 발목을 잡아 보려는 여자들의 수단이었다. 해서 오히려 콘돔을 끼는 걸 싫어하는 여자들이 가끔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속이 빤히 보여 비웃어주던 태상이었다. 어차피 태상의 엄마에게 잔뜩 굴욕만 당하고 사후 피임약을 먹게 될 텐데 말이다.
솔직히 그땐 그렇게 해서 누군가가 나타나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결혼을 해도 사랑하는 여자랑 할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태상이었으니,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이미 결혼한 사이에 뭐가 문제이겠는가 싶었다.
아, 임신을 하면 이 여자랑 진짜 아예 살게 되는 건가?
“...그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송이가 태상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송이와 명진은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고 있었다. 송이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명진이 바라질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말이다. 둘이서도 먹고 살기 바쁜데, 아이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 임신을 하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혼도 한 사이에 뭐가 문제야?”
오히려 태상이 그렇게 나오자 송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이렇게 얘기해주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원했던 말을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아 늘 송이가 먼저 그 말을 해야 했다. 심지어 청혼도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성격이 변하더니 그 후로는 그녀가 원하는 말만 쏙쏙 해주기 시작했다.
그게 당황스럽긴 하지만 솔직히 좋았다. 그가 돈을 펑펑 쓰게 해주는 것보다 그게 더 말이다.
하고 싶다고 임신이 곧장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송이는 감동을 받아 펑펑 울었다. 그녀가 서럽게 우는 바람에 태상은 순식간에 흥이 식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우는 여자랑 하는 독특한 취향이 없었기에 태상이 움직임을 멈췄다.
“뭐야? 왜 울어.”
“흑...흑흑...”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긴 했지만 태상은 송이의 눈물을 슥 닦아 주었다.
“감동적이어서. 요즘에 너, 나한테 되게 잘해주잖아.”
“골랑 그걸로 감동적이야?"
태상은 솔직히 자신이 그녀에게 뭘 그렇게 잘해줬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네가 그런 말 먼저 해줄 줄 몰랐어. 계속 싫다고만 해서.....”
경제적인 사정이 안 된다는 것도, 그가 일 때문에 바빠 싫어한다는 것도 이해는 됐지만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녀의 말에 뭘 싫다고 했는지 몰라 잠시 생각하다가 그게 임신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참나, 별게 다 감동이네. 근데 지금 그 얘기를 꼭 이때 해야 되나?”
태상이 불만을 가득 담아 말하자 송이가 웃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긴 했다. 송이는 모르겠으나 태상은 조금 많이 급했다. 식은 줄 알았던 녀석이 어느새 기세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를 가져도 된다는 말에 감동해 우는 여자를 보는 건 생각보다 자극적이었다.
그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아 진한 키스를 했다.
**
집을 계약하고 최대한 빨리 이사를 하겠다는 말을 해서인지 이삿날은 금방이었다. 송이는 거의 버릴 게 대부분인지라 할 것도 없으면서도 집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이사 준비를 했다.
“이거 전부 버리고 올게~”
송이가 양 옆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태상에게 말했다.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못마땅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데도 집에 있는 살림을 가져가겠다며 송이가 고집을 피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도 쓸 만하고...이것도 쓸 만한데....
집을 이리저리 뒤지며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계속해서 저렇게 중얼거리며 짐을 늘리고 있었다. 태상은 궁상도 저런 궁상이 없다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행동을 강하게 막질 못했다.
“이래서 베갯머리송사는 당해낼 수가 없었던 건가.....”
그녀가 단호하게 다 버리고 가라는 그를 그런 식으로 공략을 한 덕분에 이 상황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했다.
송이가 즐거움에 절로 콧노래를 부르며 쓰레기장으로 걸어갔다. 두 손에 든 쓰레기봉투의 무게가 제법 나갔지만 전혀 무겁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보다도 훨씬 이사에 대한 기쁨이 컸던 것이다.
그녀가 오늘 이사 가는 집은 정말 입이 쩍 벌어 질 정도로 넓은 곳이었다.
“앗?”
그때였다. 이사 갈 집을 상상하며 설레어하던 송이가 깜짝 놀라 옆을 봤다. 그녀의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를 누군가가 대신 들어주었던 것이다. 설마 명진인가 싶어 봤는데, 그녀의 짐작과는 달리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무거우신 것 같아서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정확히 얼굴을 볼 수 없는 남자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봉투를 든 남자의 덩치가 제법 커서 위압감이 들긴 했지만 그의 정중한 태도가 송이의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그녀가 그의 말에 고맙다는 듯 수줍게 배시시 웃었다.
“아!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할게요. 비싼 옷에 냄새 베어요.”
송이가 다시 쓰레기봉투를 달라는 표시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쓰레기봉투를 주는 대신 직접 성큼성큼 걸어가 쓰레기장에 그것을 내려 놓았다.
“여기에다 두는 거 맞죠?”
“아...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남자는 쓰레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는지 걸어가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송이는 굉장히 비싸 보이는 시계와 옷을 입고 있어 이곳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말이다.
감사 인사를 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남자가 송이를 불렀다.
“저기....!”
“네?”
송이가 걷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자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송이의 얼굴이 담기자 옅게 떨림이 전해졌다.
“굉장히 바쁘신 것 같은데, 제가 도울 일이 있나요?”
남자의 말에 송이가 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이내 송이는 남자의 속셈을 눈치 채고 나쁘지 않은 기분에 호호 작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 저 결혼했어요. 아쉽지만 그쪽이 도와주겠다는 손길은 다른 아가씨한테 양보할게요.”
“.....”
남자는 송이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유부녀라는 것에 놀란 듯싶었다. 가뜩이나 이사로 기분이 좋았는데, 이런 일까지 일어나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남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게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놈의 인기는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을 모른다니까?”
송이는 집에 있는 명진에게 자신이 이런 여자라며 자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가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한편,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굉장히 복잡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송이야....”
그의 목소리는 끝내 그녀에게로 향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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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해요! 제게 많은 힘이 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