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피해자와 가해자. =========================================================================
“정말 왜 그래. 이렇게 억지 부릴 거야? 빨리 비켜줘. 이러다 늦겠어!”
송이가 안절부절 못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10시가 되기 20분 전이었다. 가게와 거리를 생각할 때 나가도 벌써 나갔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태상이 워낙 완강하게 막는 터라 송이는 집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가 현관문을 딱 막고 서서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처음엔 장난으로 받아들이던 송이도 슬슬 지나치다 싶었는지 표정을 굳혔다.
“왜 자꾸 이래.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이러면 나 혼난단 말이야.”
“나가지 말라고 얘기 했고, 장난 아니다.”
“내가 일 안하면 우린 어떻게 먹고 살라고?”
“더 이상 돈 걱정하며 살 일 없을 거다. 그러니까 일 그만두라는 거고.”
송이가 힘이 쭉 빠지는지 허리춤을 잡고 있던 손을 털썩 늘어트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도끼눈을 뜨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또 그 소리인 거야? 내가 그런 꿈같은 얘기 그만 하라고 했지? 차라리 복권을 해! 그게 좀 더 빠른 길일 걸? 넌 여전히 내가 걸림돌이지? 검사도 됐으니 부잣집 여자 좀 꼬셔 볼까 했는데, 세상에 이럴수가! 어떤 돈 없는 멍청한 계집애가 네 발목 덥석 잡아서 결혼까지 해버렸네?! 이혼? 절대 안 돼! 그러니까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위장 이혼이니 뭐니 싫어. 난 싫다고!”
송이가 태상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말들을 줄줄 내뱉기 시작했다.
태상은 저 둘 사이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당연히 몰랐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병실에서 왔던 여자 한 명이 기억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 여자는 딱 봐도 잘 사는 집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명진과 사귀는 사이일 것이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귀는 건 분명 바람일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걸 송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리고 위장이혼이라는 말까지도 말이다.
태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송이의 말을 잠깐 들었음에도 상황이 절로 그려졌다.
아무래도 이명진 이놈은 그녀와 위장이혼을 하고, 다른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한 뒤 위자료를 받아 이혼을 하려는 속셈이 아닐까 싶었다. 좀 더 욕심이 많은 자라면 아내를 죽여서 아예 재산을 다 차지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야망을 가진 이에게 악마가 유혹을 했으니 당연히 망설임 없이 그 유혹에 넘어 갔을 것이다.
태상은 이명진이라는 놈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자기 여자도 못 지키는 한심하고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돈 때문에 그딴 짓을 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놈이 된 자신의 상황이 무척이나 처량해졌다. 하필 바뀌어도 이런 쓰레기 같은 놈 몸에 들어오다니. 굴욕적이고 치욕적이다.
과거에 명진이 그랬다고 태상까지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사람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관계도 다시 정립되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딴 쓰레기 짓 안 해도 너 하나 먹여 살릴 수 있으니 일 그만 두라는 뜻이었다.”
쓰레기를 연기해야 하는 건 곤욕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를 이해시키려면 그 수밖엔 없었다. 태상은 여전히 그녀가 가진 정보가 필요했고, 밤마다 그런 짓을 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보기엔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안하겠다고?”
송이는 그가 순순히 그렇게 얘기하자 어리둥절해졌다.
사실 예전엔 명진도 이러지 않았었다. 근데 검사가 되고 나서부터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야망이 커졌고, 빽 없는 자신은 결혼으로라도 인연을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하고 싶은 명진에게 송이는 점점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 되어갔다. 검사가 되었음에도 살림이 피지 않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검사가 된 명진은 직위가 올라감에 따라 씀씀이도 커졌다.
명품 옷, 시계, 구두, 넥타이....등등을 장만하기 위해 살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돈이 부족하다며 그녀를 닦달했다. 이게 다 그녀와 함께 잘 살기 위한 일이니 도우라면서 말이다.
송이는 그런 명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원하는 데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사랑 때문에 그랬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그저 이혼을 하기 싫었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안 해.”
다시 한 번 태상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송이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봤으나 그의 눈빛이 워낙 단호하고 진실해보였던 지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위장이니 뭐니 그런 거 솔직히 이해도 안 가고 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약속할 수 있어? 다신 이혼소리 안하겠다고?”
그 말에 태상이 몸을 움찔 떨었다.
사실 태상은 원래 그녀와 이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는 명진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혼만은 절대 싫다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이혼하자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물론 그 이혼은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말이다.
지금 대답을 하면 다신 이혼하자는 말을 못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해서 답을 않고 있는데 송이가 그의 대답을 독촉했다.
“빨리 안 하겠다고 대답해. 안 그럼 나 일 나갈 거야.”
그녀가 일하는 게 술집 도우미인 줄 알고 있는 태상은 그 말에 곧바로 대답을 했다.
“약속해. 됐어?”
"응!"
그제야 송이가 환하게 웃었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대답을 얻어낸 대가로 송이는 모든 알바자리를 내어 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생활하려면 알바는 해야 되는데...'
그녀가 그런 걱정을 하건 말건, 태상도 자신의 한 말을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잠깐, 검사 아내가 술집을 나간다고? 그게 말이 되나?'
그녀의 말 속에서 그가 검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 챘던 태상이다. 그런데 검사 아내가 술집을 나간다는 게 어쩐지 말이 안 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태상은 설마 싶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일하는 곳 어디야?”
“으응? 갑자기 그건 왜?”
“빨리!”
“...새벽에 다녀왔던 곳은 24시간 해장국집이고, 10시에 출근해야 했던 데는 한지병원. 거기서 청소해. 근데 그건 왜?”
태상은 그제야 모든 게 자신의 오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바보도 아니고, 도대체 그걸 왜 기억하지 못한 거지?
방금 전까지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이명진의 아내이니, 자신에게 무언가 또 다시 수를 쓴 건가 싶기도 했다.
“너 뭐냐?”
태상이 황당해서 송이에게 물었다. 송이는 경제적인 문제를 뒤로하고, 태상이 약속해준 것 때문에 기분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귀엽게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긴, 우리 자기 와이프지!”
그녀의 귀여운 애교에 헛웃음이 나왔다.
딱 봐도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던 지라 그녀에게 도저히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술집에 다니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고 말한다면, 자신이 이명진이 아니라는 걸 털어놓는 꼴이 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때, 송이가 깨끔발을 들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며 그의 입술에 내려 앉았다.
태상은 그녀가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송이는 드물게 용기를 내서 한 일이었지만, 태상은 여자의 이런 적극적인 태도가 아주 익숙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잠시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 스쳐갔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기에 꺼림칙함도 들었고, 어차피 이 몸이 자신의 것도 아니니 무슨 상관이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어차피 둘은 결혼한 사이기에 섹스를 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가 임신할까 전전긍긍해하던 엄마도 없는 상황인데 뭘 망설이나 싶었다. 그냥 즐기면 되는 거 아닐까?
태상은 가볍게 내려 앉은 그녀의 입술을 깊게 취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가벼웠으나, 그 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며,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던 태상은 돌연 벌떡 일어났다.
“왜에?”
송이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른하게 물었다.
“시작하려고.”
“응? 뭘?”
태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송이였다.
"넌 몰라도 돼."
"...또 일 하려고?"
태상의 말에 송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명진도 송이에게 이렇게 자주 몰라도 된다며 차갑게 일괄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지만 송이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었다.
"밥이라도 먹고 나가. 금방 차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송이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됐어. 넌 그냥 좀 더 쉬어라."
".....아냐, 밥이라도 먹고 나가."
송이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태상은 정말 입맛이 없었기에 그런 송이를 계속 말렸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억지로 눕힌 태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여기서 쉬어."
송이가 체념하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태상이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그런 태상의 모습을 불안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샤워를 하고 나와 나갈 채비를 하자 송이가 그를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어디를 가는건지, 언제 들어오는 건지 묻지도 않았다. 명진은 그런 것들을 묻는 걸 질색했기 때문이다.
태상도 그녀에게 얘기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지금 가려는 곳은 누구도 몰라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장소는 태상의 어머니, 아버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태상만이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태상을 유난이 예뻐하셨다. 회사 일은 아버지가 모두 도맡아 하긴 했지만, 그를 후계자로 낙점하진 않았다. 그가 점찍은 후계자는 태상이었다. 그래서 알짜들은 모두 아버지가 아닌, 태상에게로 옮겨졌다.
할아버지는 태상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고 선택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마음에 차지 않는 후계자였다.
할아버지가 그놈에게 그 장소에 대해 알려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가서 그곳에 있는 것들을 빼와야 했다.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태상의 주변 환경들이 껍데기라면 그건 알맹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에게 몸을 빼앗겼기에 가족들을 빼앗을 순 없지만, 놈이 그토록 원하던 돈을 빼앗기면 적잖이 분해할 것이다. 놈이 회사를 차지하는 꼴도 보기 싫고 말이다.
놈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어. 다녀올 테니까.”
“으응...”
송이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태상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다 여겼다. 대신 그녀에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처음이었던지라 그도 무척 어색했지만 말이다.
“9시쯤이면 들어 올거야.”
그의 말을 듣자 송이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처음이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게 말이다.
송이를 두고 나온 태상은 택시를 잡았으나 이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택시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송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젠장, 돈 좀 줘. 차비가 없어.”
천하의 강태상이 구걸을 하다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태상과는 달리 송이는 그러냐며 대수롭지 않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집을 나왔다. 여자한테 돈을 줘본 적은 있어도 받은 적이 없던 지라 굉장히 어색했다. 아무리 몸이 바뀌었다 해도 이런 짓은 두 번은 못할 것 같았다.
삼 만원을 받아 움직인 태상이 도착한 곳은 한 귀중품 보관소였다. 하지만 일반 귀중품 보관소처럼 보이는 이곳엔 어마어마한 것들이 잠들어 있었다.
태상은 근처 가게에서 넉넉하게 물건이 들어갈 가방을 하나 장만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야 그곳에 들어 있는 것들을 빼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들로 보이는 정장 입은 보안 요원들이 태상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안내 데스크로 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카드 없이도 비상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열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 그러셨군요. 카드는 새로 발급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이 그 한 마디에 곧장 말을 알아듣고 반응을 했다.
“일단 바쁘니 발급은 나중에 하고, 볼 일 부터 봅시다.”
카드를 발급 받으려면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절차에서 신분확인을 해야 하는데, 몸이 바뀐 그가 태상의 민증을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직원은 당당한 태상의 태도에 전혀 의심을 하지 못하고 곧장 그에게 안내를 했다.
“예. 번호가 몇 번이십니까?”
“1-11704번.”
보통 카드로 인증한 뒤 비밀번호를 적어야 문이 열리는데,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특별한 비상 비밀번호까지 설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태상은 그 비상 비밀번호를 이용해서 금고를 열 생각이었다.
직원이 안내하자 비상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란을 열어주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마스터키를 사용해야 비상 비밀번호를 입력 할 수 있었다.
“혹시 위치 추적은 사용해 보셨나요? 저희 카드에는 위치추적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데, 그걸로 혹시 모를 도난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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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선추코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