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피해자와 가해자. =========================================================================
라마스는 그의 포부에 놀랐다.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그에겐 딱히 다른 유혹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악마 심장이라는 게 있습니다. 미션을 완수해서 성공하시면 그걸 얻을 수 있죠. 미션을 완수하면 점수라는 걸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점수만 있으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강해지는 것도 가능하죠."
“그래, 그런 게 있어야 해 볼만 하지. 좋아!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어? 아까 몸풀기 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태상의 의욕이 넘쳐났지만 사실 라마스는 오늘 그에게 미션을 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오늘 하루 만에 전투감각을 익히는 연습을 통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다. 태상은 빨라도 너무 빨리 연습을 통과한 거였다.
보통 일반인들은 그 연습을 통과하는 데만 해도 3일은 거뜬히 걸린다. 그걸 하루 만에 끝낸 건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그가 너무 자신감이 높아 라마스는 일부러 그 사실을 태상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그 소리를 들으면 더욱 방심을 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이 정도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너무 무리하시면 피로가 전부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괜찮은데?”
태상이 제자리에서 뛰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했으나 라마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위해 서포트하는 계약자로서 권해드리는 겁니다. 부디 제 말을 허투로 듣지 말아주십시오.”
라마스의 간절한 말에 결국 태상이 한 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둘러 태상을 본래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의 얼굴에 미련이 잔뜩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겠다고 우기면 라마스는 들어주는 수밖엔 없었다.
라마스는 그를 오랫동안 계약자로 두기 위해선 좀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미가 급하고, 호전적이다.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미션을 주고 실전에 투입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간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하수에게 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에게 철저하게 이 세계의 위험성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한편 태상은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번쩍 떴다.
몸은 잠이라도 잔 것처럼 개운했고, 한편으로는 나른하기도 했다.
정말 라마스의 말대로 피로는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나 잠을 푹 잔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긴 밤을 보내는 방법으로 여자를 택한 것이기도 했다. 여자와 침대에서 놀다보면 나른해져 약 없이도 잠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자 없이도 이렇게 개운하게 잘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스르륵-
몸을 일으키자 누군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는지 스르륵 소리를 내며 이불이 그의 몸을 훑고 미끄러졌다. 그에게 이불을 덮어 줄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이명진의 아내 임송이. 그 여자가 분명하다.
힐끗 창문을 보니 어두컴컴한 게 아무래도 밤인 듯싶었다.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거실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뭐지? 싶어 이리저리 송이를 찾아 움직이는 데 쪽지 하나가 냉장고에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나 일 나가. 곤히 잘 자는 것 같아서 안 깨웠어.]
“이 시간에 일을 나간다고?”
시계를 힐끗 보니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한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 여자 설마....?”
에이, 그래도 결혼까지 했는데....
태상이 아닐 거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병원비 내느라 택시도 못 탄다는 여자잖아. 설마가 사람 잡을 수도 있겠는데?
결혼을 해서 이렇게 당당하게 그쪽 일 하러 간다고 말하는 가족이 있을까 싶긴 하다만은 이 몸의 주인도 만만치 않게 막장인 놈이었던 지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막장인 집안이 다 있을 수가 있지? 남자는 다른 사람 몸으로 도망치고, 여자는 남편 두고 다른 남자한테 몸 팔고....하!”
태상은 여자가 언제 들어오는지도 몰랐고,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말이다.
**
드르륵-
해가 스멀스멀 떠오르고 있는 냉기가 도는 새벽이었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인영은 잔뜩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터벅터벅 걸었다. 그 인영은 익숙하게 걸어가 불 스위치를 켰다.
“꺅!”
불을 켜고 뒤를 돈 순간 정승처럼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무척이나 놀란 듯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풀썩 주저앉았다.
정승처럼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태상이었다.
“뭐야아~ 놀랐잖아. 안자고 뭐해?”
어쩐지 그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힘이 쭉 빠진 느낌이었다. 아침엔 그렇게나 힘이 넘치던 여자가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태상은 도대체 어떤 놈이랑 잤기에 저렇게까지 힘이 없나 싶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사랑은 개뿔!
그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동정심이 들었던 잠깐의 순간이 아까워졌다.
“그러는 그쪽은 이 시간까지 뭘 하다가 온 거지?”
“뭐하긴! 쪽지 못 봤어? 일하다 왔어. 지금까지 나 기다린 거야?”
“내가 왜 당신을 기다려? 어이없네.”
태상은 송이가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팔던 뭔 짓을 하던 상관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단순히 잠을 자지 않고 이곳에 앉아 있는 건 생각할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루아침에 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태평하게 잠을 자겠는가.
그가 잠에 들었던 것은 순전히 라마스가 그를 불러서기 때문이었다. 천계에 다녀오자 몸이 가뿐해지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해서 이 시간까지 뜬 눈으로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이는 태상이 안 기다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시간까지 깨어 있을 이유가 없다 생각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비용이 나가서 아는 언니한테 부탁을 해 새벽 타임 일을 하나 더 시작한 그녀였다.
몸이 무척 피로하고 힘들었는데, 남편이 이렇게 애교를 부려주니 쭉 빠졌던 힘이 다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늘 딱딱하고 차가운 편이었던 명진인데, 요즘에는 좀 사람같이 표정도 다양하고 안 하던 귀여운 짓까지 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에겐 그리도 다정하면서, 자신에겐 늘 차갑고 퉁명스러운 남자였다. 그런데, 이런 귀여운 짓을 하다니!
그에게서 색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왜 갑자기 이러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알콩달콩한 신본부부 느낌을 이제야 느낄 수 있는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송이가 쪼르르 달려가 태상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태상이 가만히 있자 송이가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부볐다.
“아아~ 피곤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야. 오늘 완전 진상 손님 한 명이 있어서 경찰까지 출동하고 난리도 아니었거든.”
24시간 하는 감자탕 음식점에서 일을 하고 온 송이는 술에 취해 손님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크게 곤욕을 치르고 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태상은 그녀의 두 어깨를 손으로 잡아챘다.
“진상 손님? 그쪽은 막 타입 안 가리고 다 받나?”
“진상 손님도 손님인데 그럼 어떡하니? 가려 받으면 소문나서 안 돼. 직업정신 몰라? 직업정신?"
“직업정신 좋아하시네, 그렇게 몸 함부로 굴리다가 나중에 고생한다. 정신 차리고 살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딱해서 충고해주는 거야.”
태상의 삐딱한 말에 송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언제 자신이 일하는 것에 터치한 적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송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한 적도 없었는데, 저런 식으로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병원에서 약을 잘못 먹기라도 한 건지, 사람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너야말로 정말 괜찮은 거야? 정말 너 같지가 않아."
태상이 그녀의 말에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싶어 서둘러 다시 화재를 돌렸다.
"지금 그 얘기 할 때야? 말 돌리지 마라. 그 일 계속 하면서 살 거냐? 그렇게 돈이 부졳해?"
"고작 그런 일로 일을 그만두라고?"
송이가 말도 안 돼는 소리를 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태상은 진지했다.
진상 손님을 받았다가 큰일이 난 거라면 오늘 제대로 당할 뻔 했다는 뜻이 된다. 그게 무슨 플레이였든 아무리 그쪽으로 잔뼈가 굵었어도 여자인 만큼 굉장히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씩씩하게 행동한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겨우 돈 때문에..! 하아~"
태상이 말을 하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원하는 돈, 잔뜩 안겨 줄 테니까 그만 둬라. 보고 있기 짜증난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송이는 그가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했다. 그에겐 그렇게 해줄 능력이 없다는 걸 그녀가 빤히 잘 알았다.
“나 피곤한데 잠 좀 자고 하자. 응? 그때 돈 잔뜩 안겨줘도 늦지 않잖아. 나 10시에 또 나가봐야 해.”
이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면, 돈 준다는 말에 당장 혹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시큰둥했다. 태상은 어이가 없어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잠을 자자고? 돈 준다는데?”
“난 지금 돈 보다 잠이 더 먼저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거든.”
송이가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리곤 깨금발을 들어 그의 입에 촉! 하고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눈은 이미 반쯤 감긴 상태였다.
“안자고 나 기다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힘이 잔뜩 솟아났어. 나 씻고 올게.”
덕분에 태상은 화장실로 사라지는 그녀를 속수무책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태상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장난으로 취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멀뚱히 그녀가 사라진 화장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태상은 정작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몸이 바뀐 상태이니, 자신은 아까 전에 했던 말을 지킬 수가 없었다.
돈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인간인데 모아 둔 돈이 있을 리도 없었고, 모아 두었다고 해도 그게 태상의 마음에 찰리도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땡전 한 푼도 없는 거지 신세라는 게 새삼 와 닿았다.
“진담으로 한 건데 졸지에 농담취급 받겠네.”
한 번도 이런 굴욕적인 일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여자한테 돈도 못 주고 몸 팔아 벌어 온 걸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태상은 자신이 지금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돈부터 찾아야겠어.”
몸을 찾을 수 없다면, 돈이라도 찾아야 했다. 평생 돈 아쉬운 적 없었던 그에게 생긴 첫 번째 난관이었다.
놈은 아마 지금쯤 자신이 부자가 되었다며 희희낙락해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들을 기만해 속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부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돈보다 숨겨 놓은 돈이 더 많은 법이다. 겉으로 보이는 돈이 만원이라면 숨긴 돈은 삼 십만 원 정도가 된다. 그건 아주 기본적으로 그곳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만들어진 당연한 일들이었다.
태상이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님은 그에게 은밀히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었다. 상속세를 최대한 적게 떼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놈은 만원에 넋을 놓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만원에 초점을 맞춰 그걸 다시 되찾겠다고 발버둥치는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겐 숨겨 둔 돈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찾는지에 대한 방법을 모두 알고 있다.
그곳엔 자신의 몸을 차지한 명진은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그걸 찾을 수만 있다면 태상은 이 몸을 한다 해도 평생 일할 필요 없이 먹고 살 수 있었다. 물론 송이에게 한 말도 지킬 수 있고 말이다.
태상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향해 중얼거렸다.
“원래 있는 놈들이 더한 법이거든.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난 이제 시작했다.”
반드시 놈은 자신이 한 선택이 얼마나 안일하고 멍청한 선택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반드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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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