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피해자와 가해자. =========================================================================
“집에서 잃어버린 거니까 굳이 위치추적은 필요 없습니다.”
직원이 그 말을 듣고 그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갈 생각도 않고 멀뚱히 서 있자 태상이 얼굴을 찌푸렸다.
“못 보던 얼굴인데, 여기 들어 온지 얼마나 됐죠?”
태상의 말에 직원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예, 사실 다른 지점에서 일을 하다가 이번에 이곳으로 파견됐습니다. 이곳에서 vvip고객님을 직접 보게 된 건 처음이네요.”
직원이 예전에 일했었던 곳은 이곳에 비하면 시골이었다. 이곳은 알짜베기 진짜 부자들만 사용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손님 한 명 한 명을 대할 때마다 극진한 대접을 해야 했다. vip이건 말건 상관없이 모두 기본적으로 보통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가 이렇게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과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 적응을 하지 못해, 그 극진한 대접이 너무 과하면 손님은 참견으로 생각하고 굉장히 싫어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태상이 딱 직원에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
“그럼 좀 더 교육을 받으셔야겠네. 여기 본점 아닙니까? 이따위로 교육 받은 사람을 본점직원으로 써도 되는 건가? 시골 시장바닥도 아니고, 손님이 물건 열 땐 반드시 보안을 위해 문 닫고 나가야 한다는 상식도 몰라요?”
그랬다. 직원이 태상을 극진히 모셔야겠다는 과한 의욕 때문에 나가지 않고 지키고 서 있는 건 큰 실례이자 실수였다. 아무리 직원이라 해도 고객의 물품은 볼 수가 없는 게 철칙이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이곳은 심지어 CCTV도 설치 할 수가 없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직원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여기 한 달 이용비용이 얼만지 알라나 몰라? 그만큼 받아먹으면서 이런 식으로 직원 교육 시키면 곤란한데.”
태상이 여전히 싸늘하게 말하자 직원이 계속해서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짜증이 날 뿐이었다.
“당장 나가.”
직원이 사색이 되어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갔다. 태상은 그제야 마음 놓고 보관함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딴 놈을 직원이라고.....”
조금 캥기는 게(?) 있다 보니 조용히 있다 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사람을 자꾸 툭툭 건드리니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태상이 물건을 일일이 확인했다. 다행히 놈이 이곳까지는 손을 뻗지 못했는지 다른 이의 손이 탄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보관함에는 금괴들과 서류, 그리고 통장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태상은 그것들을 남김없이 모두 싹 쓸어 가방에 담았다.
나중에 놈이 왔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금괴 하나는 정 중앙에 놓고 미리 준비해 둔 쪽지를 넣어 놨다. 아마 놈이 이 쪽지를 보면 뜨끔할 것이다.
만족스럽게 웃은 태상이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그때, 미련 없이 나가려는 태상을 직원이 갑자기 불렀다. 태상은 괜스레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것을 찾아 가는 것이니 전혀 꺼릴 게 없긴 하지만 일단 몸이 다르다보니 찝찝하긴 했다.
더욱이 조용히 있다 하려다가 실패해서 괜스레 긁어 부스럼이라고, 그의 상황을 들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냥 참고 몇 마디 받아 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만약 이 몸이 저 금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직원이 알게 된다면 자신은 어찌됐든 도둑질을 한 게 되는 거였다.
그가 아이씨...하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직원을 바라봤다. 그는 일부러 더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긴장이 돼서 그런지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뒤를 돌자 직원이 고개를 깊게 숙이고 두 손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가 내민 것을 자세히 보자 검은색 고급스러운 카드였다.
“오늘 실수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최대한 빠르게 카드 발급해드렸습니다.”
직원의 말에 태상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도리어 그를 쏘아봤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카드 발급 하려면 신분 확인 거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절차 없이 이렇게 그냥 줘도 되는 겁니까?”
“원래 규정상 그래야 하지만 1번대 고객님이신지라 저희들이 특별히 신경을 써드렸습니다.”
태상이 그들에게 번호를 말했을 때 1-11704번이라고 했었다. ‘-’ 앞에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vip고객인데, 무려 1번 대이니 vip를 넘어선 vvip 고객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 보니 직원이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카드를 발급해온 듯싶었다.
“전에 있던 카드는 바로 도난 정지 시켰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화를 낸 효과가 있었는지 시키지도 않은 뒤처리까지 이미 깔끔하게 했고 말이다. 정중한 직원의 태도에 태상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안도했다는 티는 내지 않고 도리어 까칠하게 카드를 휙 빼앗듯 받아 들고 말했다.
“일단 받기는 하겠는데, 다음부턴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군요. 이래서야 보안을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절차 없이 카드를 만들어 주는 곳에서?”
“아! 저기 그게 아니라...!”
직원이 화들짝 놀라 변명을 하려 했지만 태상은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이런 곳에다가 이것들을 보관 했었다 생각하니 화가 나려고 했다. 만약 그에게 문제가 있지 않았다면 저 직원을 당장 잘라버렸을 것이다.
그가 당황한 직원을 놔두고 보관소를 나왔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금덩어리 중 하나를 팔아 현금을 마련하는 거였다.
그리고 이 많은 돈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다른 장소도 찾고 말이다. 다행히 그가 이용하는 귀중품 보관소는 이곳 하나만이 아니었다. 태상은 다른 곳으로 택시를 타고 움직였다. 이젠 더 이상 택시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몇 시간 후.
볼 일을 마치고 돌아 온 태상의 두 손에는 쇼핑백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명진이 사놓은 옷들이 그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차도 당장 지르고 싶었지만 절차가 필요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명진의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이 쇼핑백들을 보면 기함을 하지 않을까 싶다. 송이한테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진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생각하라고 떠넘길 생각이었다.
답을 안 해주면 그녀가 어떻게 짐작하겠는가.
아니, 그것보다 설명을 해준다 해도 그걸 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자기는 명진이 아니라 강태상이라는 사람인데 당신 남편 그 개자식이 자신과 몸이 바꿔치기 했고, 자신은 재벌3세라서 그 돈을 가져 온 거라는 말을 지껄여봤자 인 것이다.
철저히 질문에 무시해주겠다고 다짐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 태상은 각오를 한 것과는 달리 휑한 집 안을 목격해야 했다. 그는 쇼핑백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송이를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여자가 어디 갔나 싶었다.
잠깐 마트에 갔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불행이도 그건 아닌 듯 했다. 식탁에는 반찬들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식탁보가 있었고, 그 위에는 짧은 쪽지가 하나 있었다.
[미안 명진아. 나 일 다녀올게! 이따 봐!]
“이 여자가 진짜...!”
일하는 게 좋지 않은 이상 이렇게 고집을 피우면서 일을 나가는 건 설명이 되질 않는다. 도도한 척 콧대 세우는 여자는 만나본 적 있긴 하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도대체가 이렇게 고집 쌘 여자는 처음이었다.
송이가 일을 하건말건 그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집을 비워주면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생기니 더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은 그에게 송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직 그녀에게 알아봐야 할 이명진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
골랑 몇 푼 벌겠다고 그의 시간을 허무하게 쓰게 하는 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런데 그때였다. 씩씩거리며 물 한 잔을 마시고 있던 태상의 귓가에 어디선가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크기를 더했기에 확실하게 이 집안에서 울리고 있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뭐지 싶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자 어제 집에 들어와 벗어두었던 빨래더미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옷가지를 들어 보자 병원에서 입고 왔던 주머니가 범인이었다. 그곳에 손을 넣어 잡히는 무언가를 꺼내자 핸드폰이었다.
“빙고.”
배터리가 거의 간당간당해 있었지만 찾았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었다. 발신인을 보니 송이였다. 그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태상은 다짜고짜 송이에게 물었다. 송이는 그의 목소리가 화가 난 것 같아 보인다는 기분이 들어 혹시나 싶어 물었다.
[집에 들어갔어?]
“어.”
역시나 태상은 자신이 집에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송이는 태상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그치만 말없이 안 나가면 그동안 일한 거 보수도 못 받는단 말이야. 이번 달까지만 할게.]
“거기 아까 말했던 한지병원인지 뭔지 거기냐?”
[으응? 응....그건 그런데, 설마 오려는 건 아니지?]
송이가 설마해서 물었지만 그는 이미 신발을 신고 있었다.
“거기서 손 하나도 까딱하지 말고 기다려라.”
당장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천방지축 계집애를 잡으러 가기 위함이었다.
“한지 병원으로 가줘요. 최대한 빨리.”
택시에 올라다 오만원권을 내밀면서 말하자 택시운전사가 돈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준 효과 때문인지 택시는 이리저리 차를 몰더니 금새 한지병원이라고 적힌 병원 앞에 그를 내려주었다.
태상이 택시에서 내리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병원은 딱 질색인데.”
그녀가 한지병원에서 청소를 한다는 말을 흘려듣긴 했었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태상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안내데스크에 있는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간호사는 딱 보기에도 잘빠진 명품을 걸치고 있는 호남형 미남이 걸어오자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저렇게 귀티가 나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간호사는 사무적이던 표정을 지우고 활짝 미소를 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호감 가득 담긴 그녀의 얼굴과는 달리 태상은 와락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여기 청소하는 사람들 어디로 가면 볼 수 있습니까?”
“혹시 뭔가 물건을 분실하셨나요?”
간호사는 딱 보기엔 태상같은 남자가 청소하는 사람과 친분이 있어 보이진 않아 그렇게 물어싿. 그녀는 병원 내에 분실물 신고센터가 있다며 그곳으로 안내해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 친절은 태상에게 전혀 쓸모없는 친절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언제 물건 분실했다고 했습니까? 청소하는 사람들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냐고 물었지?”
“......”
태상의 말에 간호사가 할 말을 잃고 얼굴을 붉혔다. 그 옆에 있던 간호사가 속으로는 키득거리며 고소하다는 듯 그녀를 비웃다가 대신 말했다.
“저쪽으로 쭉 가시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는데 그곳에 계세요.”
태상이 동료 간호사의 말을 듣고 휙 몸을 돌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에게 졸지에 사오정 취급을 받게 된 여자는 손 부채질을 하며 태상을 마구 욕했다.
귀가 간지럽지도 않은지 태상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 철문을 열었다. 기름칠도 제대로 안 해주었는지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나는 묵직한 무게의 문이었다. 문 앞에는 관계자외 출입금지 표시가 적혀 있었지만 태상은 보고도 깔끔하게 무시해주었다.
청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했던 지라 그곳에는 청소 도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외에 병원복들과 침대 시트가 있기도 하고 말이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지나쳐 송이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자 관계자로 보이는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누구시죠?”
“여기 임송이라는 직원 있죠?”
“임송이요?”
여자가 영 모르는 눈치이자 태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병원 청소부로 일한다고 들었는데요.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여잡니다.”
“아...! 누군지 알 것 같네요. 젊은 아가씨 말씀하시는 거죠?”
보통 청소부는 아주머니들이 많이 하는데, 송이는 젊은 나이에 청소부를 해서 그녀의 기억에 남았던 게 떠올랐다. 태상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임송이씨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지금 근무 시간인 걸로 알고 있는데.”
“임송이, 이제 근무 안 할 겁니다. 제가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네?”
여자가 당황한 얼굴이 그대로 들어났다.
“명진아?”
그때, 뒤쪽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태상은 이 목소리가 송이의 것임을 깨닫고 재빨리 뒤를 돌았다. 역시나 그녀가 청소복장을 한 채 한 손에는 대걸레를 들고 서 있었다. 태상은 그 가관인 꼴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