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222화]변수 출현
* * *
도미닉 경은 캐서린의 안내받아 1층으로 내려갔다.
2층에 있는 메이드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괴상한 생명체가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모양이다.
"...도미닉 경?"
"무슨 일이오?"
도미닉 경은 좀처럼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웃음이 과도한 전투로 인해 행복해져서인지, 혹은 반드리치 요새에서 죽어 나간 이들의 복수를 이룰 수 있다는 기쁨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미닉 경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혹시 공주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같이 계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공주?"
도미닉 경이 캐서린의 말에 반문했다.
"아."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라는 말이 메리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메리는 3층에 있었소. 거미의 모습이었기에 천장에 붙어 떨어지는 건 피했지만... 그 이후는 내가 2층으로 떨어진 탓에 알지 못하오."
도미닉 경이 캐서린에게 친절하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다치진 않았습니까?"
"글쎄. 내가 보고 있을 땐 천장이 무너지거나 파편이 튀는 건 없었소."
"그렇다면 멀쩡하실 확률이 높군요. 다행입니다."
캐서린이 약간은 안심한 듯 어깨에 들어간 힘이 살짝 풀렸다.
도미닉 경은 그런 캐서린을 물그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궁금증이 생긴 듯 캐서린에게 물었다.
"도대체 메리의 정체가 뭐요? 어째서 이 탑에 있고, 어째서 당신들과 사이가 나빠 보이는 거요?"
"...그렇군요. 아직 공주님께선 당신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진 않은 모양이군요."
캐서린이 도미닉 경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들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저희는 메리 공주님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만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우호적이라고?"
도미닉 경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서로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였소만."
도미닉 경은 5층에서 있었던 메리와 캐서린의 신경전을 기억했다.
"그야, 공주님께서 예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셨으니까요."
캐서린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메리 공주님께선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법은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법은 법이지요."
전하께서는 그런 공주님이 마음에 든다는 모양입니다만 아니, 아닙니다. 라고 캐서린이 말을 흐렸다.
"메리 공주는 왜 같혀 있는 거요?"
도미닉 경이 캐서린에게 다시금 물었다.
"공주는 도살자 왕이 납치해 이 던전... 첨탑에 가두었다고 했소."
"반은 사실이로군요."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일은 아니랍니다. 당시 머첸타이드 왕국의 국왕과 저희 전하 사이에 비밀리에 오간 밀약 때문이지요."
"밀약?"
도미닉 경이 되물었다.
"그거 아시나요?"
캐서린이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도미닉 경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차랜드 이전에, 수많은 세계가 만들었다가 사라졌다는 사실 말입니다."
도미닉 경은 말없이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캐서린의 눈에는 두려움과 회한,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분노와 체념이 모두 담겨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수많은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겠군요. 그건 동양풍일수도, 정통 판타지 일수도, 혹은 먼 미래를 다루거나 대체 역사를 다루기도 하죠."
캐서린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약하게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저희 세계는 JRPG 세계관이었습니다. 네. 턴제로 진행되는 RPG 세계관이었죠. 모든 것이 캐릭터 설명창 옆의 로딩 바의 속도로 순서가 정해지는 세계. 그게 바로 저희 세계였죠."
"메리 공주는 그 세계에서 트로피 와이프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네. 운명이 정해진 세계예요. 굴레라고도 하죠. 용사가 최종 보스를 무찌르면, 바로 사랑에 빠져 용사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그런 운명."
"하지만 저희 세계에 두 가지 버그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버그지요."
"...바로 용사가 엔딩 직전에 튕겨 버리는 버그와 최종 보스인 도살자 왕이 용사가 할 대사를 뱉는 버그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약간의... 계기였죠. 라고 캐서린이 중얼거렸다.
"혹시 안 팔린 게임의 결말을 아시나요?"
캐서린이 거기까지 말하고 침묵했다.
도미닉 경이 답을 말하기 전엔 말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모르겠소."
도미닉 경은 고개를 저었다.
도미닉 경이 아는 페럴란트는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캐서린이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잊혀져요. 가치가 사라지죠. 가차랜드식으로 말하자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죠."
1200부. 팔린 숫자예요. 사실 그중 1000부도 번들로 묶여 공짜 부록으로 뿌려진 거예요. 라고 캐서린이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회장이 드물게 저희 세계를 좋아하던 이들 중 하나였죠. 저희는 운이 좋았어요. 그런 대단한 사람의 눈에 들다니."
"결국 이스터에그의 형식으로, 저희 세계의 일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게 바로 이 던전의 시작이죠."
캐서린이 고풍스러운 벽지를 손으로 매만졌다.
"전하께서는 참 어설픈 분이시랍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길 원해 선택한 방법이 납치질 않나, 그녀를 지키겠답시고 첨탑 입구가 있는 곳에 서서 침입자를 처단하질 않나, 그러면서도 공주가 자기를 미워한다는 걸 직접 보기 무서워 가장 먼 곳에 자기 거처를 꾸미질 않나..."
캐서린이 문 앞에 도착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우아하게 몸을 돌려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공주를 첨탑에 가둔 이유를 물으신다면, 전하의 어설픈 사랑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캐서린이 문을 열었다.
그곳은 갑옷을 입은 훤칠한 남자의 초상화와 메리 공주의 초상화가 같이 있는 공간이었는데, 여기저기 아기가 신을 법한 꼬까신이나 색동 저고리가 잘 관리된 채로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가 바로 제 방이랍니다. 네. 보스 룸이죠. 하지만 싸우지 않아도 좋아요. 이미 전 졌다고 인정한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온 이유는 1층에 가는 길이 여기 밖에 없어서예요."
캐서린은 혹시라도 도미닉 경이 공격할까 봐 속사포처럼 할 말을 내뱉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은 캐서린의 말에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른 상태였기에 캐서린을 공격할 의도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다들... 뒤틀린 모습을 하는 거요?"
도미닉 경이 캐서린에게 물었다.
"메리의 원래 모습을 본 적이 있소."
"3층에서 인가요?"
"그렇소. 3층에서."
캐서린이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저희는 처음부터 괴물은 아니었죠. 주방장 앙드레가 앙트레와 앤트리로 변하기 전엔 그는 후덕한 인상의 모자라지만 요리 실력이 뛰어난 주방장이었고, 존 도우와 제인 도우 남매는 사실 왕실 극단에서 존과 제인 쌍둥이를 연기하던 단 한 명의 배우였죠. 저도 지금은 이런 몸이지만"
캐서린이 긴 치마를 살짝 들춰올리자, 그곳엔 뾰족한 가시 모양의 금속 의족이 있었다.
그 의족에 달린 홀더에는 날카로운 단검과 비수가 가득 매달려 있었는데, 의족의 갈라진 틈 사이로는 실린더와 톱니바퀴가 슬쩍 보였다.
"저도 원래는 평범한 유모였답니다. 그것도 다 늙어가는 유모였죠."
캐서린이 다시 치마를 내려놓았다.
"모든 건 저 아래, 저주받은 모래시계에서 비롯되었답니다."
"저주받은 모래시계?"
"손잡이와 칼날이 뒤바뀐 검이라고도 하죠."
캐서린이 어딘가를 조작한 뒤 바닥을 두어 번 톡톡 걷어찼다.
그러자 바닥에 깔린 카페트가 걷히더니, 1층으로 향하는 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용사가 가진 아티팩트 중 하나였어요. 원래의 이름은 세이브와 로드라고 하죠. 회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도미닉 경의 눈이 크게 떠졌다.
회귀라면, 얼마 전에 겪었던 바로 그 일이 아닌가.
그런 커다란 힘이 이 던전의 지하에 숨겨져 있단 말인가?
"왜 모래시계냐고 묻는다면, 그 힘을 쓸 때 검이 모래시계 모양으로 변하기 때문이에요. 왜 손잡이와 칼날이 뒤바뀐 검이냐고 묻는다면, 평소엔 그런 모양으로 있기 때문이니까요."
캐서린이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도미닉 경에게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재밌게도, 그 힘은 많은 사람의 손에 의해 사용되었으나,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답니다."
도미닉 경이 캐서린의 말에 나름의 대답을 꺼냈다.
"...가짜라는 거요?"
"아뇨. 발동은 제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를 바꾸는 데에 성공했지요. 그러나 모순되게도, 이 힘은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습니다."
도미닉 경은 안 그래도 혼란한 머리가 더욱 혼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도미닉 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캐서린은 역으로 방긋 웃으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1층으로 내려가보죠. 당신이 말한 그... 슬라톤 벡스는 메이드들의 말에 따르면 이 아래에 있는 모양이니까요."
도미닉 경이 캐서린의 말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생각이 도미닉 경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긴 했으나, 순식간에 도미닉 경은 그 모든 잡념을 떨쳐 내고 단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바로 슬라톤 벡스를 처치한다는 목적, 그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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