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 [221화]변수 출현
* * *
도미닉 경은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방금 전까지는 3층의 불빛이 파편들 사이로 슬쩍슬쩍 보였으나, 3층과 제법 멀어졌는지 이젠 점보다도 작게 보일 정도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떨어지는 것일까. 거의 2분 정도 떨어지고 있던 도미닉 경이 생각했다.
도미닉 경의 옆으로 와인 병과 와인 잔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3층의 가면 무도회장에 있던 것이 충격에 같이 떨어지고 있는 듯했다.
도미닉 경은 공중에서 와인 병과 잔을 낚아채 가볍게 한 잔을 따랐다.
처음엔 평소대로 따르려고 했지만, 낙하하고 있어 병 안의 액체가 하늘로 솟구치는 바람에 도미닉 경은 잔을 거꾸로 들고 땅에서 허공으로 술을 따르는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잔을 뱅글뱅글 돌리며 색깔을 보고, 코를 킁킁거리며 향을 맡았다.
물론 도미닉 경은 술에 그다지 조예가 없었기에 그저 보여주기용이었다.
그리고 와인을 한 잔 마신 도미닉 경은, 이 와인이 제법 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상당히... 아주... 너무 달았다. 포도 주스에 설탕을 1:1 비율로 타도 이것보다는 덜 달 것 같았다.
뜻밖에 도수는 높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너무 과하게 단 탓에 도미닉 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와인 병의 입구를 코르크 마개로 봉인한 도미닉 경은, 그 와인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메리에게 주면 꽤 좋은 정보를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도미닉 경이 다시 위를 바라보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중간에 딴 짓을 했는데도 땅에 떨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3층과 2층의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지..."
도미닉 경이 허공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으로 내려올 때에도 제법 깊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던전은 층과 층 사이가 기묘할 정도로 넓은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이 땅에 다시 발을 디딘 것은 이렇게 한숨을 쉬고도 10분의 시간이 더 지난 이후였다.
탓. 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주먹을 쥔 손으로 땅을 내려찍는 포즈를 취한 도미닉 경.
그 자세 그대로 땅에 착지한 도미닉 경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물론, 이는 도미닉 경이 예상했던 결과는 아니었다.
특수 능력 [시네마틱]의 효과가 발동되면서 자동으로 히어로 랜딩 자세를 취한 것뿐이었다.
아무튼 [시네마틱]의 효과로 낙하 충격을 전혀 받지 않은 도미닉 경은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족 슬라톤 벡스가 먼저 떨어졌으니,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역겨운 살점덩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 떨어졌거나, 혹은 먼저 떨어져 어디론가 숨거나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이상한 곳이군."
도미닉 경이 근처에 있던 낡은 물병을 들어 올렸다.
메리의 정보에 따르면 2층은 유모 캐서린이 있는 곳이었고, 메이드들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곳은 아무리 봐도 메이드의 거주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여긴 마치... 일종의 창고처럼 보였다.
도미닉 경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거미줄을 검을 휘적거려 제거한 뒤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2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 도미닉 경의 관심사는 오로지 슬라톤 벡스의 척살이었다.
그것이 마족들과의 전쟁으로 도미닉 경에게 각인된 후천적 본능이었으니까.
도미닉 경이 본능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미약하게 남아 있을 마족의 역겨운 냄새를 찾아서 말이다.
...
도미닉 경이 마족을 찾아 걸음을 옮긴 그 시각.
마족 슬라톤 벡스는 처참하게 뭉개진 살점을 질질 끌며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쳤다.
슬라톤 벡스는 현재 너무 진명을 많이 들어 이성이 거의 날아간 상태였으나, 그래도 일말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성은, 더 이상 진명을 들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몸이 정상이 될 때까지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슬라톤 벡스의 판단은 나름 정확했는데, 그가 진명을 더 들었더라면 두 가지 중 한 가지 상황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는 그의 이름이 이 차원에 묶여 더 이상 불멸의 존재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거의 모든 힘을 여기에 남긴 채 추방되는 것이었다.
전자는 불멸성의 훼손이 기다렸고, 후자는 끔찍한 삶이 기다렸다.
그야말로 어느 것을 골라도 죽음 혹은 그보다 더한 삶이 기다리는 절망적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슬라톤 벡스의 도망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도미닉 경... 도미닉 경!"
슬라톤 벡스의 가장 큰 입이 이를 갈았다.
그가 가진 수백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이성은 진명의 영향을 벗어나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이성이 점점 강해졌으나, 그만큼 슬라톤 벡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도 강렬해졌다.
바로 도미닉 경이 슬라톤 벡스에게 준 굴욕을 말이다.
꼴사납게 도망치던 살점 덩어리가 멈칫했다.
이대로 돌아가 도미닉 경을 습격할까? 인간이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 무사할 리 없잖아?
슬라톤 벡스가 나름 논리적인 생각을 시작했다.
슬라톤 벡스의 이성이 완전히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살점 덩어리에 붙은 여섯 머리가 고개를 저었다.
가려움을 못 이겨 마구 긁어낸 상처가 가득한 피부를 보라.
진명의 영향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진명의 영향이 남긴 잔재는 여전했다.
지금 상황에서 도미닉 경을 잡아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으나, 그만한 대가는 치르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은 잠시 후퇴하는 것이 맞다. 라고 슬레톤 벡스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필멸자인 이상, 심한 부상을 순식간에 치료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마족인 자신은 그저 먹어치울 것만 있다면 얼마든지 부상을 딛고 완벽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그렇게 생각한 슬라톤 벡스는 다시금 어둠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모전으로 간다면, 승자는 자기 일 거라는 생각과 함께.
...
도미닉 경은 어둠 속을 걸었다.
안 그래도 나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수준까지 나빠졌으나, 현재 도미닉 경은 마족에 대한 증오로 인해 예민하고 짐승적인 감각이 고개를 든 상황이었다.
예민해진 후각이 역겨운 유황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를 따라 도미닉 경이 걸음을 옮겼다.
도미닉 경의 발에 질척한 무언가가 밟혔다.
끔찍한 물컹함으로 봤을 때, 이는 슬라톤 벡스가 지나가면서 남긴 잔해물일 것이다.
도미닉 경은 귀를 활짝 열었다.
슬라톤 벡스는 살점 덩어리기에 움직일 때 철벅 철벅 소리가 났었다.
근처에 있다면 그 소리가 잡히리라.
아쉽게도 바람이 슬쩍 스쳐 지나가는 소리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말인 즉, 슬라톤 벡스는 아직 도미닉 경에게서 먼 곳에 있다는 소리였다.
도미닉 경이 계속해서 그 단서를 쫓아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미닉 경은 어둠을 넘어, 다시 빛이 닿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는...?"
도미닉 경이 갑자기 밝아진 탓에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미로처럼 얽힌 복도였는데,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꽤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은 다소 다르지만,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복잡한 복도와 크게 다를 것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 슬라톤 벡스를 추적했다.
그야말로 마족에 대한 증오가 만들어낸 집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복도엔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역겨운 점액질의 잔해물이 남아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 잔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방패를 들어 올린 상태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도미닉 경.
잔해는 복도를 일흔 다섯 번 꺾어도 여전히 어디론가 이어져 있었다.
도미닉 경이 막 일흔 여섯 번째 골목을 꺾으려던 그때.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도미닉 경의 등 뒤에서 깐깐한 목소리의 여성이 말을 걸었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이를 쳐다보았다.
그곳엔, 2층의 보스 유모 캐서린이 있었다.
...
"잠시 도미닉 경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유모 캐서린은 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미닉 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자기 상태를 잘 몰랐으나, 캐서린의 눈으로 본 도미닉 경은 마치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광인... 아니, 그 보다도 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눈은 퀭한 상태, 동공은 축소되어 사백안인 상태였는데, 눈 아래에 깊은 그늘이 져 마치 뱀이 먹이를 노리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또한 입은 찢어질 것 같이 활짝 벌려져 입꼬리가 광대에 닿아 있었는데,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잇몸이 활짝 보일 정도였다.
헝클어진 앞머리가 그 무시무시한 표정을 살짝살짝 가림으로서, 더더욱 무시무시한 표정이 완성되었다.
유모 캐서린도 그 섬뜩한 표정에 순간 흠칫했으나, 예법에 밝은 유모답게 거의 내색하지 않은 채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던전 내에 이상 현상이 발견되었다고 메이드들이 말했습니다. 혹시 아는 것이 있습니까?"
도미닉 경이 행복에 겨워 말했다.
"그는 슬라톤 벡스요."
도미닉 경이 더욱 크게 히죽거렸다.
"마족이며, 반드리치의 복수이며, 내 숙적이며,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요."
도미닉 경은 이제 완전히 악마처럼 미소 지었다.
"그는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오. 왜냐하면, 내가 있기 때문이오."
유모 캐서린은 도미닉 경의 말을 들을 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도미닉 경이 완전히 논리를 벗어난 말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 정도로 도미닉 경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온갖 군상들을 겪어온 캐서린은 도미닉 경을 정의하는 말을 떠올렸다.
미친놈.
그야말로 도미닉 경은 미친놈이었다.
세상에. 욕설에 대한 저의 불경을 용서하소서.
캐서린이 도미닉 경에 대한 설명을 떠올린 것만으로 죄책감이 들어 성호를 그었다.
"그나저나 메이드들이 알려주었다고 했소?"
도미닉 경이 캐서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겠군."
도미닉 경이 캐서린에게 한 발자국 다가 갔다.
갑자기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 방금 전까지 복도를 밝히던 초 하나가 꺼졌다.
그 때문인지 캐서린은 도미닉 경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필 꺼진 불이 캐서린의 뒤편에 있었고, 그 불은 도미닉 경의 얼굴을 비춰주던 것이었으니까.
"날 그곳으로 안내해주시오."
도미닉 경이 캐서린에게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캐서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보스로서 그러면 안 되긴 했으나...
캐서린은 도미닉 경에게 겁을 먹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