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7화]하우징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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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 경은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은행에서 나왔다.
물론 도미닉 경은 망자들과 싸우면서 수천의 귀신을 잡아본 경험이 있기에 그 비슷한 느낌의 표정을 지었다.
차원 상점에서 환전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인기!) 3580 + 3580 가차석 (첫 충전 보너스)]
[페럴란트 금화 2개! (타 차원 상점 대비 150% 이득!)]
페럴란트 금화라니.
정작 자신은 페럴란트에 있을 때 금화는커녕 은화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자기 자산에는 금화가 있었던 모양이다.그것도 2개 이상.
혹시나 이게 그저 종이에 아무렇게나 적혀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도미닉 경은 바로 스마트 폰을 켜 지도 앱을 통해 가까운 은행을 찾았다.
"여기 7140 가차석입니다. 20 가차석은 주말인지라 수수료로 빠져나갑니다."
도미닉 경은 자기 앞에 올려진 보석이 가득한 주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종이 쪼가리가 돈이 된다니. 금융에 무지한 도미닉 경은 머리가 복잡해졌으나 이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생각을 정리했다.
7140 가차석.
'상점에서 2,580 가차석이나 35만 크레딧이면...'
손에 가차석이 넉넉해지니 도미닉 경은 왈록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집을 사는 데 저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집이 있으면 다양한 혜택이 있다고 했으니 우선은 집을 구해볼 생각이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미닉 경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상점 지구를 향해 걸어갔다.
...
"그러니까, 이번엔 저희 당에서 탱커 하나만 청문회에 올리면 된다는 말인가요?"
"그래. 대신 이번 탱커 너프 공략은 취소하기로 약조했지."
근접 딜러 연합의 수장이자 행정부 의회의 의원, 배불뚝이 트롬이 자기 보좌관에게 말했다.
자기 사무실의 고급스러운 의자에 몸을 파묻은 트롬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더 받아오셨겠지요?"
보좌관은 트롬의 정치생활 초기부터 같이 해온 충신이었기에 트롬의 한숨에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금의 한숨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한 욕심쟁이의 한탄 같은 것이었다.
"탱커 노조에서 이번 딜러 내려치기에 대해서 눈감아 준다더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의원님께서 원래 정치란 멀리 봐야 하는 법이라고"
보좌관은 충심어린 마음으로 트롬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으나, 트롬은 버럭 화를 냈다.
"탱커에게 꼬투리를 잡힌 게 문제야. 그게 문제라고!"
원래라면 트롬은 이 정도로 화를 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트롬은 탱커에 대한 자격지심, 즉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알잖나. 내가 잘 생겨서 여성 성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여캐도 아니지. 무엇보다 지속 딜러라 순간 화력이 강한 다른 딜러들에게 얼마나 비웃음을 당했는지!"
트롬은 분노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숨이 차오르는 만큼, 그의 얼굴도 빨개져갔다.
"그런데 보라고. 탱커들은 생긴 것에 상관없이, 그리고 스킬셋이 상관없이 인기가 넘쳐! 왜냐? 사기라서지! 생각해 보라고. 다들 때리는 것에 밸런스를 맞추는데, 혼자 맞는 것에 밸런스를 맞춰. 밸런스 기준이 다르니 탱커가 약하고 소외된다며 찡찡대고, 탱커가 사기라는 말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 탱커의 권위를 지키겠답시고 싸우지. 딜러들은 그런 게 있나? 아니, 없어! 왜냐? 딜러야말로 밸런스가 가장 잘 맞는 직업이니까!"
엉망인 논리였으나, 이는 그가 근접 딜러 연합에서 의원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논리였다.
그의 말은 딜러가 너무 많아져 천시를 당하기 시작한 딜러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니까.
"탱커, 탱커는 사라져야 할 것들이야. 탱커가 없으면 딜러의 자리가 하나 더 생기잖아. 일자리 창출! 보스를 잡을 때 더 빨리 잡겠지? 랭크 상승! 모든 면에서 탱커는 필요 없는 것들이라는 걸 왜 다들 모르는 거지?"
분노에 가득 차 이젠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트롬의 속마음에는 위험한 사상이 담겨 있었다.
"의원님. 진정하고 목소리를 조금 낮추시지요. 누가 들으면 다음 총선에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보좌관의 말에 트롬은 숨을 고르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아무튼, 탱커는 없어져야 해. 딜러, 그중에서도 근딜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탱커 따위가 아니라. 라고 투덜거린 트롬은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좌관?"
"그렇습니다, 의원님."
보좌관은 사실 트롬의 사상이나 이론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으나, 그저 트롬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트롬은 보좌관의 충성심을 믿지 않았다.
이 극단적인 근딜주의자는 자기 스펙을 상승하는 대신, 정치와 공작으로 이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삑. 하고 그의 안주머니에 넣어진 녹음기가 꺼졌다.
...
"어서 오세요."
가차랜드 서부 부동산.
도미닉 경은 집을 사는 법을 스마트 폰으로 검색했다.
이 문명의 이기는 참으로 편리한 것이었다. 과거 페럴란트에서 비둘기나 화살, 북소리나 뿔피리로 정보를 전달할 때로 되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부동산이라고 적혀 있거나 공인중개사라고 적힌 곳을 찾아가라는 말을 찾은 도미닉 경은 마침 눈에 띈 부동산이라는 문구에 발길을 옮겼다.
"집 보려고 오셨나요?"
"그렇소."
이곳의 공인중개사는 도미닉 경의 겉모습을 보고 그다지 돈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지 조금은 불친절했다.
그러나 직업 정신은 투철했던지, 도미닉 경의 외형과 어울리는 장소를 몇 군데 보여 주었다.
"여긴 원룸인데요, 건물주 분이 중세풍 인테리어를 좋아하셔서 내부를 이렇게 꾸미셨어요. 다만 너무 고증에 신경 쓰다 보니 벽난로가 들어가서 기록된 평수보다 실제 평수가 좀 작아요. 다리를 펴기엔 좀 불편한 정도? 여기가 월 22 가차석이구요. 여긴 좀 외곽인데, 그만큼 싸요. 월 17 가차석 정도예요. 외곽이라 그렇지 제법 크고 좋은"
도미닉 경의 외견은 가난한 기사처럼 보였다.
새로운 옷을 입었더라면 조금은 나았겠으나, 저번 전장에서 엉망으로 구른 나머지 내구도가 심하게 닳아 수선을 맡긴 상태였기에 예전 옷을 입고 나온 탓이 컸다.
도미닉 경은 공인중개사의 말을 유심히 듣더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매물로 나온 곳은 없소? 보아하니 2,600 가차석 정도면 집을 살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 그런 매물을 찾으시는구나?"
공인중개사는 도미닉 경이 그래도 보이는 것보다 돈이 더 많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바닥의 프로였고, 프로는 어느 때라도 손님을 박대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속으로는 욕하더라도 겉으로는 웃는 것. 그것이 프로인 것이다.
공인중개사는 그래도 간만에 건수를 잡을 수 있겠다 싶었는지 방금 전보다 확연히 환한 표정으로 새로운 자료들을 가지고 왔다.
"여긴 2,490 가차석이구요, 사시면 바로 소유주가 되실수 있어요. 빈방이 된 지 좀 오래된 거라. 대신 여기도 외곽에 있구요, 교통이 좀 불편하긴 해도 차고가 있어 탈 것을 보관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건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데요, 예전에 영주였다는 사람이 거금을 들여서 지은 성이에요. 짓다가 파산해서 매물로 나왔는데, 대신 좀 비싸요. 최소 6,000 가차석은 주셔야"
도미닉 경은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성처럼 된 건 도미닉 경의 기사도를 자극했으나 너무 커서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평범한 사각형의 공간은 내부만 잘 꾸미면 꽤 멋진 곳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없었다.
하나씩 무언가가 빠진 느낌. 도미닉 경은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건물들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혹시 예산이 어떻게 되시나요?"
공인중개사는 미끼 매물에도 흔들리지 않는 도미닉 경을 보며 꽤 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정말로 부동산에 대해 몰라서 고민했을 뿐, 공인중개사가 생각한 것처럼 거물은 아니었다.
"7,000 가차석까지는 생각하고 있소."
"7,000 가차석!"
공인중개사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진정한 부자들에 비하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가차랜드는 집값이 다른 차원에 비해서 싼 편이었다.
도미닉 경이 가진 돈이라면 도심에서도 꽤 괜찮은 장소에 집을 얻을 수 있었고, 외곽으로 가면 마을 하나를 사 영지처럼 꾸밀수도 있었다.
방금 전 미끼로 내밀었던 건축물, 도시 내부에 테마파크로 재건될 것이라는 루머가 있는 성도 5,000 가차석 내외였으니 7,000 가차석이면 하우징에 진심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은 공인중개사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신가요?"
마침내 도미닉 경이 여러 개의 건물을 추가 구매할 것이라는 망상을 끝낸 공인중개사가 승부수를 띄웠다.
"배산임수. 정확히는 산 바로 아래 있지만, 매력적인 집이죠."
공인중개사가 내준 자료에는 석재와 목재로 된 2층의 건물이 있었다. 뒤에는 적당한 크기의 산이,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건물 주변에는 석재로 된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아래쪽 구석 3픽셀은 바다 판정이라 해산물을 얻을 수도 있고, 혹시나 농사나 재배에 관심이 있으시면 위쪽으로 확장해서 농지를 얻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 도미닉 경은 외눈을 찌푸리며 건축 도면을 바라보았다. 사실 보더라도 이 설계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중세 시대 장원이었던 탓에 시설이 조금 낙후되어 있"
"여긴 얼마 정도요?"
공인중개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7,400 가차석이지만, 매물이 나온 지 꽤 되었으니 거래 수수료 합쳐서 6,980 가차석만 내시면 됩니다."
"그렇소이까?"
도미닉 경은 한참을 이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사겠소."
도미닉 경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집을 얻은 기쁨에 행복한 미소를 이었다.
그리고 공인중개사는 어마어마한 계약을 따낸 기쁨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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