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6화]차원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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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 경은 발걸음을 옮겨 상점가의 입구로 향했다.
'일단 차원 상점을 들려 봐. 넌 비범한 놈이니까, 분명히 이용할 수 있을 거다.'
'차원 상점은 상점가 입구에서 반대편에 있는 허름한 골목길로 들어가면 바로 나오니까, 기억하라고.'
라고 말해도 말이지. 상점가 반대 편,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골목을 바라보며 도미닉 경은 생각했다.
지금 있는 재화로 충분할까?
도미닉 경은 인벤토리를 열어 크레딧과 가차석 부분을 보았다.
크레딧은 월세로 살기엔 넉넉했으나 가차석은 옷을 한 벌 맞추는 바람에 잔고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어쩐다..."
도미닉 경은 한참 동안 골목길 앞에서 고민했다.
본디 상인들이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법이었고, 특히 이런 뒷골목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은 유독 불안정하고 위험한 것들을 비싸게 팔았다.
인벤토리에서 크레딧 하나를 꺼낸 도미닉 경은 한참 동안 그 동전을 쥐었다가 펴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도미닉 경이 어디 역경을 두고 피하거나 도망갈 위인이던가?
도미닉 경은 결국 부딪혀보기로 마음먹고 골목길을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골목길의 어둠 속에 한 발을 내딛자 스토리 모드 로비에서 스테이지를 누르듯 세상에 바뀌었다.
고풍스러운 선술집.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카운터에는 머리가 검고 흰 두 명의 여성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유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장식되어 있어 빈티지한 느낌이 가득하면서도 간단한 미니게임으로 치장되어 모던함을 겸비한 이 낡은 선술집은 그 자체로 고풍스러웠으나, 어떻게 보면 이질적이기도 했다.
"선술집 뉴 테... 아니, 차원 상점에 오신 걸 환영해요. 혼자신가요? 일행분이 더 있으신가요?"
도미닉 경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촉수가 가득한 붉은 문어를 보았다.
세상에, 문어가 말을 한다고? 그 사실에 크게 충격받은 도미닉 경은 이내 가차랜드의 분위기를 생각하며 나름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래. 이런 세상인데 문어가 말을 하는 것 정도야.
도미닉 경의 반응을 보고 문어는 자신이 다른 모습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죄송해요. 바로 이전에 오신 손님이 외신 쪽 분이어서 실수했네요. 잠시만요."
문어는 정수리가 갈라지며 신성한 빛을 내뿜더니 이내 그 갈라진 틈 사이에서 메이드 복을 입은 사람이 기어나왔다.
그 메이드는 한쪽 팔이 여전히 문어의 촉수처럼 되어 있었고, 동공이 가로로 쭉 찢어진 형태라는 것을 제외하면 붉은 머리에 몸매가 좋은 여성이었다.
"저희 차원 상점을 들리신 건 처음이신가요? 아니면 혹시 그저 선술집을 이용하고 싶어서 오신 건가요?"
붉은 머리의 메이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도미닉 경에게 방문 목적을 물었다.
도미닉 경은 여기가 선술집도 겸하고 있구나. 라고 그저 간단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아는 사람이 차원 상점을 들러보라고 해서 왔소. 그나저나 여긴 뭐 하는 곳이오?"
도미닉 경은 당당하고 솔직하게 되물었다.
메이드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친절하게 말했다.
"차원 상점은 차원 간 화폐의 환전을 주로 하는 곳이죠. 물론 가끔은 한정판 상품을 팔기도 해요. 대개 각 차원의 특산물 같은 거 말이죠."
메이드는 촉수로 된 팔을 휘둘러 카운터 쪽을 한 번, 벽에 붙은 문을 한 번 가리켰다.
"특산물을 사시려면 카운터를, 환전을 하시려면 저 방 안으로 들어가시면 된답니다."
"환전이라. 그게 뭐요?"
도미닉 경은 그렇게 되물었다.
척박한 페럴란트에서는 대체적으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나마 화폐는 동화가 주로 이용되었고, 은화나 금화는 귀족이나 상인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도미닉 경도 가차랜드에 와서 화폐가 이리 흔하다는 사실을 보고 놀란 적이 있을 만큼 페럴란트에선 화폐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런 곳이다 보니 환전이란 개념은 알지도 못했고, 알아도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다.
"환전을 모르다니, 신기하네요.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 정도의 개념은 알고 계셨거든요."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죠. 화폐로 무언가를 산다는 개념조차 희박한 곳에서도 손님은 오거든요. 메이드가 그렇게 말했다.
"가차랜드의 사람들 중에서도 가차랜드 태생은 있지만, 대부분 외부 차원에서 초대되어 온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외부에 자신이 이룬 업적과 재산을 두고 여기에 오곤 하죠."
메이드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촉수의 끝자락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친절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역사에 기록되거나 영웅으로 구전되는 이들은 사라진 이후에도 사람들이 공물을 바치거나 제사를 지내기도하고, 혹은 어떤 지역을 영웅의 이름을 달아 그의 명예를 지켜 주기도 해요. 아, 죄송해요. 영웅은 저희가 가차랜드의 사람들을 부르는 애칭 같은 거랍니다. 가끔 이 호칭에 기분 나빠하시는 분들도 계셔요."
"아무튼, 그런 재화가 아무리 많아도 쓸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그래서 저희 차원 상점이 있는 거랍니다. 당신이 있던 차원에서 당신에게 바쳐진 명예, 명성, 재화 등을 가차랜드의 재화로 바꿔 주는 일을 하는 거죠."
뭐,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과금이라고 부르기도 하구요. 메이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잘 오셨어요. 차원 상점은 하나가 아니거든요. 그 많은 차원 상점에서 저희 뉴 테라를 찾아주신 건 정말 행운이나 다름없어요. 저희 선지자님께선 수수료를 거의 받지 않으시거든요."
대신 이야기를 조금. 이라고 덧붙은 메이드는 입을 닫았다가 환하게 웃었다.
"실수했네요. 사장님. 사장님이요. 사장님께선 돈에 연연하지 않으시거든요. 이미 한 행성을 다스리시는 분이라."
세상에. 도미닉 경은 차원 상점 주인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메이드의 입에서 나온 엄청난 규모에 말을 잃었다.
척박한 변방 페럴란트에서만 살아온 도미닉 경은 행성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 환전을 원하시는 건가요?"
메이드가 살갑게 웃었다.
도미닉 경은 그 미소를 보며 충격에서 벗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내가 페럴란트에서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는데, 괜찮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을 여기로 초대한 이가 당신이 페럴란트에 쌓은 재산을 확인하고 저희 쪽으로 보내줄 거거든요."
그 사이에 있을 개인 정보나 민감한 내용들은 거래가 끝나는 즉시 파기될 테니 안심하세요. 라고 메이드가 말했다.
메이드는 환전을 원하는 도미닉 경을 가게의 뒷방으로 안내했다.
뒷방의 문에는 '대출 안 합니다.'라는 문장과 '대출 받지도 않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메이드가 촉수로 된 팔을 들어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약간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도미닉 경이 메이드를 바라보며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냐는 듯 바라보자,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들어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행동을 취했다.
도미닉 경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메이드가 문을 닫았다.
"크'투아? 손님 안내했으면 빨리 서빙하세요. 분석 결과 3.3%의 손님이 불만을 표시하기 직전입니다."
"네, 네. 갑니다. 아이 님."
문을 닫기 전,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도미닉 경은 겨우 형체만 볼 수 있는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는 일자로 된 하나의 길만 있었고, 문은 자신이 들어온 곳과 복도의 끝에 있는 문뿐이었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래. 돈을 만지는 일인데 신중할수록 좋겠지.
어두운 공간에서 도미닉 경은 나름 이 복도에 대해 납득하며 걸음을 옮겼다.
반대편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도미닉 경이 들어온 문 쪽과 반대편을 가로막는 커다란 철장과 유리 벽이었다.
철장과 유리 벽 반대편에는 시가를 피며 무언가를 바라보는 중년의 남성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계속 줄담배를 핀 것인지 재떨이에 꽁초가 가득했다.
"환전하러 왔는가?"
건너편의 남성이 도미닉 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세 번 뻐끔거린 남자가 마침내 고개를 돌리며 도미닉 경의 한쪽밖에 없는 눈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 페럴란트 출신. 맞는가?"
도미닉 경은 자신이 언제 자기소개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영웅적인 삶인가 보군. 명예가 한 지역에 퍼져 있어. 명성도 나쁘지 않고. 재산은... 세상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많다니. 재밌군."
철장 너머의 남성이 무언가를 보며 도미닉 경의 자산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종이에 숫자를 적어 유리창 사이의 틈으로 도미닉 경에게 넘겨주었다.
"그 정도가 자네가 필요한 수치. 그걸 가지고 은행에 가면 가차석으로 교환해 줄 것이다."
남자가 박수를 쳤다.
"가로되, 너는 복되도다. 천국에 그리 많은 재산을 쌓았노니."
남자의 모습에서 얼핏 신성함이 느껴졌다.
그 신성함에 멍해진 도미닉 경이 정신을 차려보자 언제 장소가 바뀐 것인지 자신은 다시 차원 상점의 입구에 서 있었다.
"환전이 끝나신 모양이네요. 보아하니 원하시는 바를 얻은 것 같구요."
방금 전 자신을 방으로 인도한 메이드가 웃으며 다가왔다.
"다음에 또 들려주세요. 언제나 저희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차원 상점의 문이 닫혔다.
당황한 도미닉 경이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자,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이 황당한 상황이 기가 막혀 그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6d 23h 59m 59s 후에 다시 방문해 주세요.'라는 문패만이 닫힌 문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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