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쉐도우2
“지금… 날 살려 주겠다는 말인가?”
“한 가지 약속만 한다면 그럴 겁니다.”
“왜 살려 주려는 것이지?”
나직하게 웃던 카일이 되물었다.
“왜 살려주면 안 됩니까?”
“난 널 죽이려 했다.”
“하지만 안 죽었군요. 아니, 오히려 이렇게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냥 살려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가지 약속을 지켜달라는 조건이 붙으니 말입니다.”
사내가 카일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살려줄 생각이군!”
“음… 독심술도 합니까?”
“감시와 암살을 오랜 시간 하다 보면, 눈만 보아도 그 사람이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요? 그럼 약속을 지켜주겠습니까?”
“내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면… 하겠다.”
“좋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비밀로 해주세요. 특히 시카니스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상외의 말에 사내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약속이라는 게 고작 시카니스에 대한 비밀을 지켜달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요. 뭐… 마을에 대해서는 제국에 알려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차라리 날 죽이는 것이 비밀을 지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투가 이어질수록 생각이 바뀌더군요. 만약 당신과의 공중전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갔을 때, 당신과 같은 와이번 나이트를 여럿 만난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근접전에서는 반드시 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당신이 미래의 내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전 현재의 당신을 살려주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사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런 이유로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여기서 약속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날 믿을 수 있지? 그런 건 얼마든지 어길 수 있다.”
“방법이 있습니다.”
사내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바로 멀린이었다.
“방법?”
“제가 알고 있는 흑마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피의 서약이란 마법입니다.”
“피의 서약?”
“보통 마왕이나 악마와 계약을 할 때 사용하는 마법의 일종입니다. 영혼에 마법의 각인을 새겨, 계약을 어길 수 없게 만드는 마법이죠.”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흑마법인만큼 살아남을 수는 없겠죠.”
멀린은 덤덤한 태도를 취했지만, 사실 이 피의 서약이란 마법은 단순히 죽음을 선사하는 마법이 아니었다. 약속을 어기는 순간 대상자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영혼에 각인이 찍혀 죽어서도 고통을 받는 잔인한 마법이었다.
“흠….”
이마를 잔뜩 찌푸린 카일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굳이 흑마법까지 이용해 가며 구속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한번 믿어 보겠습니다.”
“하지만….”
멀린이 카일을 설득하려 하자 카일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비록 오늘 이 사람에게 죽을 뻔했지만, 이번 경험으로 다른 급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냥 온전히 보내 주겠습니다.”
단호한 카일의 음성에 멀린도 더는 설득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일이 사내에게 재차 물었다.
“좋다. 약속은 지키겠다.”
카일은 흡족히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을 한번 믿어 보지요.”
망설이던 사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것으로 되었다는 양 카일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사내를 응시하던 멀린이 몸을 돌려 카일의 뒤를 쫓았다.
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는, 가늘게 숨을 쉬는 에일럿을 보고 무언가 결심한 낯을 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일을 쫓았다.
“무슨 일입니까?”
발소리를 들은 카일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사내를 발견하곤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살려주려면 끝까지 책임을 져라.”
“예?”
사내의 의미 모를 말에 당황한 카일이 반문했다.
“이곳은 오크 랜드다. 전투로 기력을 소진한 나와 부상을 당해 날지 못하는 에일럿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면, 우린 곧 오크 때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사내의 말을 듣던 카일의 눈이 자연스럽게 한쪽 날개를 축 늘어트린 골드 와이번에게로 향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요. 좋습니다. 태워드리지요.”
카일은 흔쾌히 승낙한 뒤 시카니스에게로 다가갔다.
사내가 안심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에일럿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에일럿이 말을 걸어왔다.
‘아공간석 안에 있겠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알겠다.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뒤에 부르겠다. 그리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나 역시 맹약자의 죽음을 보지 않아 다행이다.’
에일럿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아공간이 나타나, 순식간에 골드 와이번을 집어삼켰다.
그사이 카일과 멀린 그리고 사내는 시카니스의 안장 위에 올랐다.
“역시 빛의 마탑에서 만들어진 스피어가 대부분이군.”
“처음 시카니스를 만났을 때부터 안장에 꽂혀있던 마법 스피어들이죠.”
“아이젠 공작과 빛의 마탑 장로가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사실인 것 같군.”
사내가 안장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스피어를 보면서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카일은 처음 단 한발의 스피어를 제외하면, 스피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하자면 사용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게 옳았다. 그 정도로 사내와 골드 와이번의 근접전투 능력은 탁월했다.
이번에 카일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블랙 와이번의 능력과 위기상황에서 적절하게 마법으로 도움을 준 멀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장 바로 옆에 등자가 있다. 발을 등자에 걸면 양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카일이 안장에 앉은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사내가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와이번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최고의 방법은 바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말이 아닌 이미지도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몰랐네요.”
“어차피 와이번과의 대화는 머리 즉, 생각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구체화해 전달하면,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단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와이번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해 놓아야 한다. 불가능한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결국 와이번을 많이 타봐야 한다는 말이군요.”
“쯧.”
카일의 말에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생각이 짧군.”
“네?”
“왜 인간만 생각과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아!”
드디어 사내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카일이 탄성을 터트렸다.
“와이번을 아무리 여러 번 타고 비행을 한다고 해도, 나이트와 라이더는 와이번 본인만큼 알 수 없다. 또한 꼭 비행을 하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구상해 와이번과 공유하며 훈련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시카니스에게도 듣지 못했어요. 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훈련을 하는 건가요?”
카일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가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이 방법은 내가 만든 훈련법이다. 와이번과 맹약을 맺긴 했지만, 내가 맡은 임무 대부분은 감시와 암살이었다. 그런 만큼 와이번을 타고 다닐 일은 드물었다.”
카일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되물었다.
“근접 공중전이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와이번을 타고 다닐 일이 드물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후 국경 정찰대에서 훈련을 받고 정찰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 당시에 근접전투를 익혔다. 이후에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감시라는 임무 자체가 한곳에서 오랫동안 숨어 있는 일이다 보니, 에일럿과 대화할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 이미지를 구현해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단하군요.”
“그런가?”
사내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에게 순수한 칭찬을 받은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군. 이런 방식이면 확실히 원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어.’
카일은 곧장 머릿속에 이미지들을 떠올려 시카니스에게 전달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시카니스는 대답과 동시에 하늘 위로 날아오르더니, 동체를 뒤집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수직 낙하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른 건 멀린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을 만끽했다.
“습득이 빠르군.”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사실 사내는 속으로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와이번이 기동할 수 있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정확한 이미지를 구현하는 연습을 수없이 해야 해낼 수 있는 일이지,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놀랍군. 말로 설명한 걸 단번에 실행에 옮기다니….’
에일럿의 음성에는 감탄이 섞여 있었다. 사내와 에일럿이 지금처럼 자유자재로 기동하게 된 건, 수없이 많은 대화와 이미지를 나눈 후에야 이루어진 성과였다.
하지만 사내와 달리 카일은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에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이 전생에 살던 곳은 수많은 영상과 미디어가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더군다나 카일은 영상이나 영화를 통해, 전투기가 기동하는 방식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시카니스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지를 상세하게 그려내는 것이 쉬웠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충고한다면, 이러한 방식이 실전에서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구현한 이미지는 반드시 와이번과 함께 비행을 해보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내가 또다시 새로운 조언을 해주는 동안, 시카니스는 쓰러진 자이언트 블루 우드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럼 난 아공간석에 들어가 있겠다.’
카일와 사내가 안장에서 내려오자 공간이 갈라졌다. 시카니스는 그 틈으로 사라졌다.
“난 이만 가보겠다.”
사내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카일의 반대편으로 걸어가려 했다.
“아, 잠깐.”
카일이 걸음을 옮기려던 사내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경계의 눈빛을 띈 사내가 물었다.
휘릭
순간 사내에게로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사내는 물건을 가볍게 낚아챘다.
“이건…!”
“쓰러져 있을 때 손가락에서 빼낸 겁니다. 돌려드리지요.”
카일이 던진 것은 반지였다.
“이걸 왜 돌려주는 것이지?”
사내는 이미 아티팩트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이상 상대의 물건을 빼앗아, 전리품으로 삼는 것은 흔한 일 중 하나였다.
“뭐… 욕심이 나기는 하지만, 좋은 정보를 알려주셨으니 그 대가로 돌려드리는 겁니다.”
“정보에 대한 대가라…. 좋다. 고맙게 돌려받겠다.”
사내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반지를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내는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