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고스트1
“아마도 앞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군요. 며칠 뒤면 제가 이곳을 떠날 테니까요.”
뜻밖의 소식에 막 발걸음을 내딛던 사내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을 떠난단 말인가?”
“일이 생겨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한껏 아쉽다는 기색으로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적으로 만나 목숨을 걸고 전투까지 벌였으나, 짧은 순간 나눈 이야기만으로도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이곳을 떠나야 하는 카일로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 묘한 섭섭함을 느낀 것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반지에 추적마법이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일정한 신호를 지속적으로 송출해 추적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멀린 님이 신호를 보내는 추적마법을 없앴습니다. 미리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내가 손에 끼워진 반지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추적마법이라…. 그래, 날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군.”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에 잠시 금이 그어졌다. 손안에서 반지를 굴리던 사내는 본래의 무덤덤한 낯으로 돌아왔다.
“가보겠다.”
그리고 사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흠. 그냥 사라져 버리는군요.”
멀린이 아쉬운 눈초리를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정확히 하자면 멀린은 사라진 반지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티팩트에 각인된 마법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돌아가도록 하지요.”
카일의 말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금 123호의 신호가 끊겼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혹 아티팩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상급 마나석을 이용해 4서클의 일루젼 마법이 인첸트된 아티팩트 입니다. 6서클 마법사가 직접 인첸트한 만큼 아티팩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흐려진 말꼬리에는 무려 6서클의 고위마법사가 만든 아티팩트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기 어렵단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고위 마법사의 아티팩트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는 이유는 그만큼 안정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가능성은?”
“발각되었을 경우입니다. 123호의 마지막 전언은 ‘상급 엑스퍼트 추정자와 다수의 엑스퍼트 발견’이었습니다.”
“녀석은 와이번 맹약자다. 아무리 상급 엑스퍼트가 있다고 해도 쉽게 당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최악이 온다고 해도 도주할 수 있지 않겠나.”
“만약 주변에 와이번 나이트가 있었다면 도주도 힘들었을 겁니다.”
“지난번 보고에서 녀석의 도그 파이트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라 들었다. 도주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 같은데…?”
공작이 쉐도우 123호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바로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최초의 쉐도우라는데 있었다. 또한 공작의 말마따나 녀석은 무척 수준 높은 도그파이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123호가 쉐도우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을 때에는, 국경수비대에서 직접 공작에게 녀석의 잔류를 희망하는 서한을 보내오기도 했었다.
“123호가 보내온 보고 중 다수의 엑스퍼트 발견이라는 부분이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이들 모두 와이번 나이트였다면 123호라도 도주가 어려웠을 겁니다.”
“다수의 와이번 나이트가 그런 촌구석에 숨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최근 크로노스 왕국의 남부 방면 하늘 탑이 폐쇄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들의 우회기동을 대비해 배치한 병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왕국에서 제국을 공격할 수도 있겠군.”
오크 랜드를 우회한 제국이 왕국 남부를 공격할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여지도 얼마든지 있단 뜻이었다.
“네. 때문에 저희 검은 여우들은 샤론 마을에 나타난 상급 엑스퍼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쉐도우 123이 보내온 보고에 적힌 다수의 엑스퍼트들이 모두 와이번 나이트라면, 상급 엑스퍼트는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일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해당 상급 엑스퍼트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검은 여우가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와이번 나이트에 젊은 상급 엑스퍼트라는 것을 감안하다면….”
공작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희는 대상자가 레드 와이번의 오너라는 추측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음… 레드 와이번이 투입 되었다라….”
“최악의 경우 왕국의 기습공격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습이 이뤄진다면 방어가 가능한가?”
“오크 랜드와 인접한 제국의 남서부는 크로노스 왕국과 마찬가지로 낙후된 곳입니다. 레드 와이번을 보유한 상급 엑스퍼트가 다수의 와이번 나이트를 이끌고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면, 지금으로서는 막아내기가 어려울 거라 판단됩니다. 왕국과는 달리 제국의 서남부에는 하늘 탑이 존재하지 않아 먼저 발견하고 대처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나?”
“낮은 확률이지만 아티팩트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6서클 마법사가 만든 아티팩트의 신뢰성이 높기는 하지만, 간혹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보고되고 있긴 합니다. 아티팩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면, 아티팩트가 파손된 상황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혹 123호가 배신했을 가능성은? 123호는 다른 쉐도우와는 달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지 않나. 그러니 변심해 제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지 않나? 가족도 없어 딱히 통제할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그 역시 완전히 무시할 순 없습니다. 엑스퍼트에 오르면서 독이나 마법에 대한 방어력도 높아졌고, 와이번과 맹약을 맺으면서 정신 마법에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티팩트에 추적마법을 걸어놓았습니다만….”
방금 사내가 언급한 정신 마법은 결코 쉬운 마법이 아니었다.
고차원적인 마법일 뿐만 아니라 정신력이 강한 대상, 특히 소드 엑스퍼트의 경우 정신 마법에 강력한 저항력을 가지 있어 마법을 걸기도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맹약자는 와이번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기에 정신 마법을 펼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음… 아티팩트에 문제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니, 차라리 123호가 배신한 상황이 가장 좋은 상황이군.”
“현재로선 그게 최선입니다.”
“답답한 상황이군. 지금 서남부에 보낼만한 기사단이 있던가?”
“황실 기사단의 경우 두 개의 기사단에 문제가 생겨, 빼낼 수 있는 기사단이 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귀족 회의 기사단뿐입니다.”
“흐음….”
공작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황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두 기사단을 오크 랜드로 밀어 넣어, 목표했던 대로 기사단이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화이트 와이번의 알도 수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숨겨진 힘인 블랙 와이번과 아끼고 있던 아들까지 잃었다.
공작으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작전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귀족파, 공작의 세력이라 할 수 기사단을 서남부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물론 서남부의 귀족들이 귀족파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공작에게는 그리 중요한 전력은 아니었다.
이대로 왕국의 와이번 나이트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면 오히려 왕국을 침공할 명분을 얻을 수도 있으니, 전쟁을 바라는 공작으로서는 서남부 영지들이 공격을 받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남부에서 분란이 일어난다면 아무래도 남부에 있는 각하의….”
“그만!”
“송구합니다.”
아이젠 공작이 손을 들어 사내의 말허리를 끊었다.
“페이트. 내 밑에서 일한 지가 얼마나 되었지?”
대뜸 던져진 공작의 질문에 페이트의 표정이 경직됐다.
“십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십 년이라…. 그럼 공작가… 아니,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겠군.”
셈을 하듯 허공에 시선을 두던 공작이 의자에서 일어나 투명한 와인잔에 피처럼 붉은 와인을 따랐다.
“그것은…!”
일말의 불길함을 감지한 페이트가 더듬거렸다.
“십 년을 같이했으니 이번엔 충고 하나만 하지. 머릿속 비밀은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아니야.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 123호에 대한 정보가 들어온다면 바로 보고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부복하고 있던 페이트가 황급히 일어나 방 안에서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양 집무실 한쪽에 고여 있던 어둠 속에서 중년의 사내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이용가치는 충분히 있지.”
공작은 태연히 말을 받았다.
“서남부의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을 내뱉은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앉았다.
일국의 공작을 대한다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집어치워.”
“뭐 공작 각하께서 그렇다면야….”
사내의 무례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공작은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상황은 들었겠지?”
“충분히 들었습니다.”
“해결 방법은 있겠지?”
“서남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해결을 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흠… 두 가지 방법이라….”
“복잡한 방법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첫 번째 방법은 샤론 마을에 있다는 병력을 직접 쓸어버려 공격의 의지를 단번에 꺾어 버리는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은 남부 영지와는 멀리 떨어진 다른 곳을 공격해, 왕국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는 겁니다.”
사내의 말에 공작이 턱을 문질렀다.
“간단한 방법은 아마도 샤론 마을을 공격해 왕국의 병력을 단번에 일소시키는 것이겠군.”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니?”
“첫 번째 방법이든 두 번째 방법이든 목표만 다를 뿐 공격하는 방식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이후의 결과가 다를 뿐이지요.”
“이후의 결과라….”
“왕국의 남부 오지마을을 공격해 상주한 병력을 일소시키는 일은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복잡할 겁니다.”
“아, 그렇군! 오크 랜드와 인접해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샤론 마을을 공격할 수 있는 곳은 우리 제국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
“바로 그겁니다. 오크 랜드를 가로질러 다수의 와이번 나이트를 보낼 곳은 제국뿐입니다. 그럼 왕국도 바보가 아니니, 샤론 마을이라는 곳의 방어를 강화하고 전력을 집중시킬 겁니다. 어쩌면 보복전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되려 상황이 복잡해지고 전투가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군.”
“오크 랜드 상공이 제국과 왕국의 주된 전장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국의 서남부로 와이번 나이트들이 집중될 겁니다.”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겠군.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대로 다른 곳을 공격한다면 어떻겠는가.”
“왕국의 중요 거점을 타격한다면 제국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거둬지진 않겠지만, 무작정 제국의 소행이라 밀어붙일 수는 없을 겁니다. 여기에 고스트 기사단이 동원된다면 왕국으로서는 더욱더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지금 직접 가겠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