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92화 (92/404)

92.쉐도우1

‘맹약자에 대한 애정이 깊군.’

시카니스의 무뚝뚝한 음성이 머릿속을 울리자, 카일이 눈이 반사적으로 대지에 박혀있는 골드 와이번에게로 향했다.

고통으로 떨리는 골드 와이번 에일럿의 황금빛 홍채는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흠….”

잠시 사내를 응시하던 카일은 골드 와이번을 향해 말했다.

“공격하지 않는다면 구속을 풀어주겠다.”

사내에게 고정돼 있던 에일럿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카일을 향했다.

“물론 도망을 치면 붙잡혀 있는 맹약자의 안전은 장담하지 못한다.”

풀어주겠다는 말에도 에일럿은 그저 카일의 얼굴만 뚫어지게 볼 뿐이었다.

“시카니스! 풀어줘라.”

카일의 말에 에일럿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시카니스가 천천히 물러났다.

쿠웅

에일럿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몸 여기저기서 흘러내리는 핏물과 축져진 날개만 보아도 한동안 날아오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카일은 에일럿이 몸을 완전히 일으킨 것을 확인한 뒤, 기절해 있는 사내를 바닥에 던져 놓았다.

“멀린 님! 이자의 몸에서 아티팩트를 찾아 주십시오.”

“잠시만….”

사내의 품을 뒤적이던 멀린은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오, 이거 보통 아티팩트가 아니군요.”

멀린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반지를 여러 각도로 관찰했다.

“일루젼 마법이 인첸트된 아티팩트 아닙니까?”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마법에 이런 상급 마나석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중급 정도면 충분하지요.”

“그럼…?”

“마법사는 효율을 중요시 여깁니다. 4서클 마법에 상급 마나석을 썼다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일루젼 마법 이외의 다른 마법이 인첸트 되었다는 말이지요.”

“다른 마법이라면.”

카일의 얼굴에도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상급 마나석에 더블 인첸트 마법이라면 필시 대단한 마법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마법은 아니고, 일종의 통신 마법이 추가된 것 같습니다. 장거리에서 간략하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마법이지요.”

“신호라면?”

“약간의 진동과 소리입니다.”

“아!”

멀린의 말에 카일은 모스 부호를 떠올렸다.

“단순하기 짝이 없으나, 서로 약속된 신호기와 암호가 있다면 장거리 통신이 가능하지요.”

“장거리라면 얼마나 먼 곳까지 통신이 가능합니까?”

멀린이 볼을 살며시 긁으며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뭔가를 계산해 보는 것 같았다.

“마나석에 따라 다르지만 이렇게 상급의 마나석을 사용한 경우라면, 거리의 제한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놀랍군요.”

카일이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문질렀다.

카일은 모르고 있으나 사실 이곳에도 영상은 물론이고, 소리까지 전달할 수 있는 통신 마법이 존재했다.

다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작은 통신석이 아니라 상당한 크기의 마법진과 마나석, 그리고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했다. 또한 막대한 자금이 소모되었으므로, 통신 마법진을 설치한 귀족은 극히 드물었다. 기껏해야 대귀족이나 왕성이 통신 마법진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대부분의 귀족들은 지금 사내가 끼고 있는 반지와 유사한 통신 아티팩트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다핸 남작령 같은 소형영지는 아직도 전령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카일은 다른 영지로 간 적이 없었기에 이러한 정보를 모르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좀 문제가 있군요.”

반지를 보던 멀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입을 열었다.

“문제라니요?”

“통신 마법을 약간 변형시켜 일정한 신호를 끊임없이 방출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설마! 추적을 위한….”

“정확합니다. 그 때문에 상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카일의 뇌리로, 화이트 와이번의 알에서 나오는 신호를 추적해 온 힐튼 남작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음… 그럼 이 반지는 쓸 수 없겠군요.”

“하하! 그럴 리가요. 5서클의 각인 마법사가 여기 있잖습니까. 인첸트된 마법을 새로운 마법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살짝 뒤트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멀린이 눈을 감고 사내의 반지 위에 손을 올렸다.

“디텍트(Detect)”

멀린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다.

“트랜스뮤테이션(Transmutation)”

순간 청색의 빛이 섬광처럼 퍼졌다가 사라졌다.

멀린은 손을 물린 뒤 사내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더는 신호가 송출되지 않을 겁니다.”

카일이 반지를 살피고 있는 사이, 기절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눈을 껌뻑이던 사내는 반지를 쥐고 있는 카일을 발견했다.

“깨어났습니까?”

카일이 고개를 들어 사내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왜… 죽이지 않았지?”

잠시 침묵하던 카일의 입술이 열렸다.

“왜 죽여야 합니까?”

“내가 널 죽이려 했으니까.”

사내의 말에 카일이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기를 바라는 겁니까?”

“아무리 죽음을 안고 살아간다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말대로 비록 사로잡혔다고는 하지만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죽고 싶지도 않으면서 그런 건 왜 물어봅니까. 이제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 묻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내가 대답할 것 같은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카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날 고문한다고 해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고문이라니, 그럴 리가요.”

카일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사내 역시 지지 않고 강렬한 눈빛으로 카일을 쏘아보았다.

“흠… 그렇군요! 당신의 의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기 있는 와이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일이 손을 들어 참담한 꼴을 하고 있는 에일럿을 가리켰다. 황금색의 와이번은 꼬리에서부터 머리까지, 상처가 없는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무엇보다 한쪽 날개가 부러졌는지 축 늘어져 있어 당장 하늘을 날 수도 없어 보였다.

설령 날 수 있다고 해도, 저런 상처를 입고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블랙 와이번을 피해 도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아있었구나!”

안도한 것처럼 사내가 낮은 음성을 토해냈다.

‘그렇다. 아직까지는 살아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에일럿이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 어떤가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날 죽이려 했던 저 와이번 역시 죽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카일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와이번을 죽이겠다 했나.”

“왜, 죽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왜 죽여야 하지? 깔끔히 나 하나만 죽이면, 에일럿은 얼마든지 다른 맹약자를 찾아 떠날 텐데.”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이곳에 맹약을 맺을 자가 있어 보입니까?”

“그건….”

카일의 말에 사내의 말문이 막혔다.

“설령 당신의 말대로 당신을 죽인다고 해도, 심각한 상처를 입은 골드 와이번이 이곳 오크 랜드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카일의 말대로 이곳은 오크 랜드였다. 아무리 최상위 몬스터 중 하나인 골드 와이번이라고 해도, 날개가 부러진 와이번이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웃기는군.”

카일이 고민에 휩싸인 사내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무슨 말이냐?”

“저 와이번은 맹약자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헌데 당신은 고작 와이번의 목숨과 이곳에 온 하찮은 이유를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웃길 수밖에요.”

사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사내가 받은 임무는 그저 마을을 살피고 특이 사항을 보고하라는 것뿐이었다.

카일의 말대로 고작 감시 업무가, 목숨만큼 소중한 에일럿보다 중요한 비밀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설이던 사내는 작게 속삭였다.

“난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다?”

“우리는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린다. 난 검은 여우 쉐도우 123호라 불린다.”

“검은 여우라면… 제국!”

“그렇다.”

사내의, 그러니까 123호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난번 검은 여우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는 당신과 달리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일의 말에 사내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사내의 안면엔 놀라움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검은 여우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이냐?”

“내가 만났던 남자는 제국의 검은 여우 제4 지부 소속의 보틀러란 인물이었습니다.”

“보틀러라면 나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그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신이 죽인 것인가?”

사내의 물음에 카일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는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에게 기습을 받아 죽었습니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다.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가 왜 검은 여우를 죽인단 말이냐.”

“주군의 명이라 들었습니다. 후안 백작이 페링 남작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아이젠 공작 각하께서….”

“제겐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이런 오지에 살고 있는 제가, 어떻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제국의 후안 백작과 페링 남작에 대해 알았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와 맹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럼….”

“그날 저녁 맹약자를 잃은 시카니스가 날 찾아왔습니다.”

사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제국의 첩보조직인 검은 여우가 아이젠 공작에 의해 통제되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게 장악된 건 아니었다.

특히 국외 조직과 쉐도우의 경우 공작의 영향력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존재였다.

때문에 공작은 화이트 와이번 알에 대한 비밀은 물론, 후안 백작과 페링 남작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보틀러를 죽여버린 것이다.

검은 여우, 쉐도우 소속의 요원들이 아이젠 공작의 마수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까닭은 많은 요원들이 거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요원으로 탄생했고, 그 과정에서 제국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 당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쉐도우 소속의 요원들은 공작보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다.

다만 우연한 기회에 와이번과 맹약을 맺게 된 123번 쉐도우의 경우 독자적인 작전에 빠르게 투입되었다. 그 탓에 개인적인 성향이 강했고, 다른 쉐도우들과 달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다소 떨어졌다.

그렇기에 샤론 마을 감시처럼, 황실에 알려지면 안 되는 공작가의 비밀 임무에 투입된 것이다.

“이번 임무도 공작의 개인적인 일이라는 소리군.”

사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사내도 이번 일이 공작의 개인적인 명이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마을 안에 상당한 경지의 엑스퍼트들이 있다고 해도, 이런 벽지 마을을 감시하는 임무에 쉐도우를 보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탓이었다.

물론 가끔씩 공작의 사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내려진 지시에 따라 누군가를 감시하거나 암살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맡은 임무는 마을을 감시하고 특이 사항이 있을 시 보고하는 것이다.”

체념한 듯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제국 황실이나 공작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인 에일럿을 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마을을 감시하는 일이 전부란 말인가요?”

“처음부터 말했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사내의 말에 카일의 사납던 기색이 풀어졌다. 검은 여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시카니스와의 맹약을 눈치채고, 암살자를 보낸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한 가지 약속만 해준다면, 그대와 와이번 모두 풀어주도록 하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희소식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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