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43화 (43/404)

43.사라진 오크

“음….”

맨 앞에서 달려가던 카일이 갑자기 멈추더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인가요?”

카일의 바로 뒤에서 이니엘 영애를 업은 채 따라오던 시안느가 물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카일의 말에 옆으로 다가온 주안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짧은 풀들만 보일 뿐 아무런 위협이나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네. 몬스터는 물론이고 작은 동물 하나 보이지 않는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영문 모를 대꾸를 한 카일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문제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유심히 주변을 살피던 카일은 높은 둔덕 위로 급히 뛰어올랐다.

“우리도 따라가요.”

시안느가 급히 카일의 뒤를 따르자, 주안을 비롯해 보틀러와 피툰 역시 카일을 따라 둔덕 위로 뛰어 올라갔다. 카일은 지금까지 고원을 지나면서 되도록 높은 지대를 피해 아래쪽으로 빙 둘러 지나가곤 했다. 둔덕을 오르다가 자칫 몬스터들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엔 카일이 직접 언덕 꼭대기로 올랐으니, 일행들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카일이 곤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자 뒤따라 올라온 시안느가 물었다.

“헉헉~. 무슨 말인가요?”

“이곳이 이렇게 평온할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벌써 오크 무리를 만나도 여러 번 만났어야 합니다. 헌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크 무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오크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기본적으로 오크들은 동물과 같습니다. 자신의 영역을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거나,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적들을 공격해 몰아내거나 죽입니다. 오늘 아침 오크들의 영역에 들어온 이상 분명 오크 정찰병들을 만나도 여러 번 만나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요?”

“항상 정찰을 하던 병력들이 갑자기 정찰을 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이유라 생각하십니까?”

그제야 카일의 말을 이해한 주안이 얼굴을 딱딱히 경직시켰다.

“이곳을 영역으로 하고 있던 오크들에게 문제가 생겼단 말이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카일이 서 있는 땅은 수백 마리의 오크들이 하나의 부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장소였다. 더군다나 워낙 넓은 고원지대인 이곳에 사는 오크들은, 깊은 숲에서 살아가는 오크들보다 넓은 곳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니 오크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 하루를 꼬박 달렸건만 오크를 만나지 못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개한 오크들이기에 매일같이 정찰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미개하고 본능에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는 습성이 강합니다. 더군다나 집단생활에 어느 정도 지성을 가지고 있는 오크들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무방비하게 방치할 리가 없습니다.”

“…음.”

“무엇보다 전 지금까지 오크 정찰대를 만나기 위해, 오크 부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문제가 생겼습니다.”

뜻밖의 말에 카일을 제외한 일행들 전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카일이 오크 부락으로 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무슨 말인가? 오크 부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다니!”

주안의 얼굴빛이 벌게졌다. 분노한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카일에게 다가섰다. 지금 남아 있는 인원으로 오크들에게 발각이 된다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특히 이니엘 영애는 귀족 아가씨인 만큼 전투 상황에 완전히 무방비했고 그런 그녀를 지켜야 할 시안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주안 기사단장을 바라보며 덤덤히 답했다.

“제가 아무리 이곳의 지형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이곳은 결국 오크 랜드와 경계를 이루는 산맥 위 고원지대입니다. 오크를 모두 피해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오크를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오크를 찾아가는 것이 어찌 같다 할 수 있느냐!”

“그럼 추적대를 달고 언제까지 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겁니까?”

“추적대….”

“아무리 엑스퍼트 급의 기사라고 해도 시안느 경이 영애를 업고 달리는 이상 걸음이 늦어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맹약석으로 위치가 추적당하고 있으니, 추적대를 뿌리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크들을 찾아가려 했단 말이냐?”

“이용할 수 있다면 오크들이라도 이용을 해야지요. 더군다나 오크 정찰대는 고작해야 열 마리도 안 되는 소규모입니다. 그 정도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닙니까?”

열 마리의 오크라면 기사단장 주안 혼자서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숫자였다. 거칠어진 숨을 고른 주안이 입을 다물었다.

“정찰대만 적당히 건드려 놓아도 주변의 모든 오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겁니다. 그때 우리는 놈들을 피해 멀리 우회하여 이곳을 통과하면 됩니다.”

카일의 설명을 듣고 있던 보틀러가 한 마디 거들었다.

“이곳으로 주변의 오크들을 불러들이고 약해진 틈을 이용해 돌파하겠다는 말이군.”

“더불어 이곳에 몰려든 오크들이 뒤쫓아 온 추격대와 충돌하게 될 테니, 시간을 벌기엔 제격입니다.”

논리정연한 카일의 말에 입을 벙긋거리던 주안 기사단장은 별달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오크 부락을 향해 가고 있다는 말만 듣고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아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카일의 계획이 제대로 흘러간다면 일행은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덤으로 추적대와 더욱더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항상 냉철하게 상황을 살피는 주안 기사단장이 이 정도의 일을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강행군이 이어지고 영애를 보호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깊어지면서, 냉철함 대신 초조함이 자리 잡기 시작한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하지만 추적대에는 대단한 실력자들이 많아요. 오크들이 과연 얼마나 버텨 주겠어요.”

무안해하는 주안의 모습에 이니엘이 카일의 말을 반박했다. 뒤쫓아 오는 추적대는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였다. 모두 엑스퍼트 급의 기사들이니 오크 무리는 순식간에 도륙 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오크 무리의 수가 적을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오크 랜드이지요. 아무리 무리의 크기가 작더라도 수백은 될 겁니다. 일단 오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피를 보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평원 일대의 오크들이 피 냄새를 맡고 더 많이 몰려들 겁니다. 더군다나 초원의 오크들은 숲속 오크와는 달리 빠르고 집요하지요.”

“….”

“이곳 고원에는 거대한 들소가 살고 있습니다. 대규모로 무리를 이루어 오크 랜드와 이곳 고원 일대를 돌아다니며 풀을 찾아 살아가고 있지요.”

바람에 살랑이는 풀들을 보며 카일이 말했다. 오크 랜드에 수많은 오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오크 랜드의 평원에 대규모로 서식하는 거대한 들소 무리 때문이었다.

“들소와 오크들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갑자기 들소 이야기를 꺼내는 카일을 이니엘 영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일은 이니엘 영애의 반문에도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크들은 들소를 사냥할 때 일단 한 마리를 정해 상처를 입힙니다. 그리고는 상처 입은 소를 몇 날 며칠을 따라다닙니다. 물을 먹고 풀을 뜯거나 휴식을 취하려 할 때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같은 곳을 공격해 상처를 입히지요. 들소가 더 이상 무리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말입니다.”

“집요하군요.”

“그렇습니다. 이곳은 넓은 초원이라 매복할 곳도 적당치 않을뿐더러, 들소들이 워낙 빠르고 강하기에 한두 개의 창을 몸에 박아넣는다고 잡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거든요. 때문에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상처를 입히고, 마침내 지쳤을 때 한 번에 공격해 숨통을 끊어 놓지요.”

“오크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그와 같이 공격을 가할 거란 말이냐?”

“그보다도 더 집요하게 공격을 할 것입니다. 추적대는 사냥감이 아닌 자신들을 공격한 적일 테니까요.”

“수백의 오크 무리라면 추적대를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확실하게 발은 묶어 둘 수 있다는 말이군.”

보틀러는 카일의 설명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렇습니다. 오크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면 분명 추적대의 발을 묶어 둘 수 있을 겁니다. 오크가 남아 있다면 말입니다.”

“이곳에 오크가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인가요?”

“하루 동안 오크 부락으로 곧장 향했지만, 오크 정찰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이 주변에 오크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어디로 오크가 사라졌다는 말인가요?”

“세 가지 중 하나일 겁니다. 오크들이 이곳에서 모두 떠났던가, 아니면 강대한 적들이 부락을 침입한 적이 막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모두 전멸을 했거나….”

흐려지는 말끝을 주안이 마무리를 지었다. 갑자기 오크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버리고 떠날 리는 없었다. 그 말인즉슨 강대한 적과 싸우고 있거나 이미 전멸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펑

불길한 침묵이 좌중을 감싸 안았을 때, 멀리서 희미한 폭음이 전해져왔다.

“벌써!”

주안이 눈을 크게 떴다. 카일이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속도를 더 올려야겠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행들은 자리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시안느는 이니엘 영애를 고쳐 업고 움직였다. 그녀의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점점이 맺혀 있었다.

* * *

둔덕 너머 야영을 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은 곳으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가고일 무리를 피해 산의 후면에서 하루를 보낸 힐튼 남작 일행이었다.

“모두 6명입니다.”

카일 일행이 머물렀던 자리의 바닥을 꼼꼼하게 살핀 일칸이 다가와 말했다.

“역시 누군가 영애를 안고 달리기 시작한 모양이군.”

“영애의 걸음이 느리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하루 정도 걸려 놈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방심하지 말게! 이곳은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곳이니.”

“명심하겠습니다.”

-펑

일칸이 조아리고 있던 머리를 드는 순간 어디선가 폭음이 울렸다.

“무슨 일이냐!”

깜짝 놀란 힐튼 남작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당황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트랩입니다.”

급히 다가간 일칸이 바닥을 관찰했다. 꼼꼼히 살피는 그의 눈으로 축 늘어진 가는 줄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곳에 저 서클 신호용 스크롤을 묶어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드러났단 말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정도 폭음이면 멀리까지 소리가 퍼져나갔을 겁니다.”

“…제법 영악한 자가 일행에 있는 모양이야.”

힐튼 남작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실로 오랜만에 후작의 곁을 떠나 외유를 나온 그는 이미 다핸 남작령으로 이니엘 일행을 몰아넣었다는 말에 상황이 쉽게 해결될 줄로만 알았다.

마파린 후작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를 이곳에 보낸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니엘 영애 일행이 오크 랜드로 향한 것이다.

아무리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지만 백작가의 영애가 목숨을 걸고 오크 랜드로 들어갈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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