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42화 (42/404)

42.고원에서 4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은 오직 가문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린넨 백작의 선언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가장 흔하고 작은 체구인 골드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와이번 나이트들도 엄청난 대우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발견한 알은 화이트 와이번의 것이었다. 설원의 학살자라 불릴 정도로 전략적 가치 자체가 남다른, 바로 그 화이트 와이번의 알. 이런 와이번을 가문의 사람이 아닌 자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자칫 변심하여 다른 가문으로 넘어간다면 백작가로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가문엔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이 될 만한 자들이 없습니다. 강력한 와이번일수록 자존심 역시 대단히 강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중간한 실력이나 자질을 지닌 자라면, 와이번이 맹약을 거절하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린넨 백작의 선언이 있고 난 뒤로 가문의 사람들, 특히 백작의 동생이자 그리핀 상단의 상단주인 펠론 자작이 직접 나서 사람을 선별했다. 직계와 방계를 막론하고 와이번의 주인을 선택하기 위해 가문의 사람들을 추렸지만, 엑스퍼트 급의 기사를 찾는 것도 힘들었다.

상인으로 시작했던 그린넨 백작 가문은 지금까지 상급 검술은 고사하고 온전한 중급의 검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문에 실력이 있는 자가 없다면, 실력이 있는 자를 이니엘과 혼인을 시켜 가문으로 들이겠다.”

결국 와이번의 주인을 찾지 못했다는 펠론 자작의 말에 한동안 고심을 하던 백작이 결단을 내렸다.

“데릴사위를 들이겠다는 말입니까?”

“이니엘과 혼인을 시킨 후 가문의 성을 주고 온전히 가문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와이번의 주인이 된 이후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제아무리 데릴사위로 데려와 그린넨이란 성을 내리고 가문의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쳐도 결국 정략결혼이었다. 온전히 가문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 펠론 자작은 생각했다.

“일반적인 정략혼이라면 그렇겠지.”

“무슨 말씀인지?”

“마침 이니엘의 호위로 도란이란 기사가 있네. 갓 20살이 되었지만 벌써 엑스퍼트에 올랐을 정도로 실력과 재능이 출중하지. 익히고 있는 검술 또한 중급과 상급 사이의 검술로 알고 있다네.”

“설마 그 기사를…?”

깜짝 놀란 펠론 자작이 그린넨 백작에게 반문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영애의 호위무사로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20살이면 사실상 최말단의 기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정도 나이에 엑스퍼트에 올랐단 건 실력과 재능이 출중하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존심이 강한 와이번과 맹약을 맺을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직계혈족인 이니엘과 혼인을 시키기엔 도란이라는 기사의 신분이 너무 떨어졌다.

“가문이 몰락해 조부의 밑에서 자랐지만, 실력과 재능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오히려 가문이 한미하니 데릴사위로 받아들이기에 적격이지. 성을 내린다고 해도 거절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배신할 가능성도 줄어들지 않겠나?”

“설마 가주께선 일부러 도란이란 기사를 이니엘의 옆에 붙여주신 겁니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네. 집안이 쇠락하긴 했지만 아직은 검술이 온전히 남아 있다고 들어 적극적으로 회유해 볼 생각으로 불러들였지. 헌데 생각보다 그 도란이라는 아이의 재능이 뛰어나더군. 해서 이니엘의 옆에 붙여주었네.”

“처음부터 이니엘과 맺어줄 생각이셨군요.”

“그래. 도란도 오랫동안 이니엘의 호위로 있었고, 서로 마음도 있는 것 같으니, 거절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네!”

“…그렇겠지요. 그럼 이번 결정도 그… 도란이라는 기사를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괜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몇 달 동안 괜히 가문의 아이들을 만나고 다녔으니 말입니다.”

“서운한가? 하지만 이번에 자네에게 일을 시킨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한 일이야.”

“이유라니요?”

“혹 내가 모르는 뛰어난 인재가 발견된다면,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을 그 아이로 하려고 했지.”

“그야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문으로 들인다고는 해도 데릴사위가 아니겠습니까?”

펠론 자작은 은근히 도란은 깔보는 말을 했다. 아쉽게도 그만한 자질을 가진 가문의 아이들은 없었지만, 만약 재능과 자질이 뛰어난 자가 있다면 그 아이가 와이번 알의 주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지. 도란과 이니엘이 혼인을 한 뒤 도란에게 이번에 찾아낸 재능 있는 아이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쳐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네.”

이니엘과 혼인을 한 도란이 그린넨 백작 가문의 성을 이어받는다면 도란도 검술을 가문에 전하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언제까지 와이번 나이트들을 외부 기사들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지. 점차 가문의 아이 중에서도 와이번 나이트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나! 어느 정도 재능과 자질만 있다면 충분히 와이번들과 맹약을 맺을 수 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와이번들이 선택하는 맹약자들은 오히려 나이가 어리고 자질이 뛰어난 기사들을 선호하기도 하니까요.”

와이번은 당장의 경지만을 보고 맹약을 맺지 않았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맹약자의 나이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와이번은 짧게는 백 년에서 길게는 2백 년 이상을 살아가는 생물이었다. 긴 세월을 사는 와이번은 독특하게도 여러 명의 맹약자와 맹약을 맺기보다는 한 명의 맹약자와 오랫동안 함께하길 원했으므로, 젊고 재능이 뛰어난 자일수록 맹약을 맺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와이번과 처음 맹약을 맺는 나이는 대부분 20~30대가 가장 많았다.

때문에 왕국에서도 뛰어난 검술과 경지로 이름을 알린 자들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계약을 거부당한 사례가 심심찮게 나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파린 후작가의 힐튼 남작이었다. 그는 최상급의 기사를 바라보고 있지만 와이번과의 계약은 실패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 * *

지난날 기사 도란이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으로 선택된 과정을 떠올리던 기사단장 주안은 안타까운 눈으로 영애를 바라봤다.

당시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을 찾던 펠론 자작을 수행한 주안은, 기사 도란이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으로 내정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가문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니엘 영애는 단순히 와이번의 알 때문에 백작이 도란을 데릴사위로 들이려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기사단장인 주안은 백작이 오래전부터 도란의 검술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아니었어도 두 사람이 혼인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화이트 와이번의 알에 발견되면서 도란이 죽음에 이르렀으니, 이니엘 영애가 애지중지 여기는 와이번의 알이 오히려 영애에게는 재앙이 된 셈이었다.

“고마워요, 단장님.”

위로와 격려가 담긴 기사단장 주안의 말에 이니엘 영애가 밝게 미소지어 보였다.

* * *

“크아악~.”

눈 앞에 나타난 수천 마리의 오크를 담담히 바라보던 장년인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뚫고 지나간다.”

장년인이 뽑아 든 검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츠즈즉-!

다가오는 오크들을 향해 장년인이 검을 휘두르자 둥글게 뭉친 오러가 빠르게 날아가 오크 수십 마리를 꿰뚫었다.

최상급의 엑스퍼트의 전유물인 오러탄이었다. 물론 최상급 엑스퍼트라도 오러탄을 남발할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열 번 정도 오러탄을 쏘아 보낼 수 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뒤따라오는 무리들의 돌파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돌파하라!”

장년인이 오러탄을 날리며 오크 무리 안으로 난입했다. 오크들의 더운 피가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피를 맞으며 40여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오러를 피워 올렸다. 그들은 장년인이 만들어 놓은 틈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촤아악-

기사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갔다. 그러나 오크들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과감하게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취이익~.”

“크응, 킁.”

“인간… 죽어라.”

“이곳은 우리 땅이다~.”

사내들이 엑스퍼트의 실력자이긴 했으나 수천의 오크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마치 강대한 파도가 몰아치듯 끊임없이 달려드는 오크로 인해 하나둘 지쳐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찔러 넣은 검이 중간에 뚝 멈췄다. 오러가 바닥을 드러냈는지 넘실거리던 푸른 기운도 사라졌다. 몸 안으로 파고든 소드를 손으로 부여잡은 오크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취이익~. 같이… 죽자!”

오크가 양손으로 더욱더 힘을 주어 검을 부여잡았다.

-푸하왁

그때였다. 잔뜩 녹슨 창날이 검을 부여잡은 오크의 가슴을 뚫고 나와 사내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커억.”

전혀 생각지 못한 잔인한 수였다. 그래도 엑스퍼트 기사의 실력이 어디 간 것은 아니라, 사내는 몸을 비틀어 간신히 창날이 심장에 박히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급소를 피했을 뿐, 상처는 제법 깊었다. 그러나 주변에는 여전히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몰려 있었다. 곧이어 옆구리로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허억~.”

사내가 힘겹게 옆을 돌아보자 반쯤 부러진 검을 손에든 오크가 자신의 옆구리로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취익~. 죽어라.”

오크의 숨결에는 순간이나마 통증을 잊을 정도로 역겨운 악취가 섞여 있었다.

“이놈이!”

가슴엔 창이 옆구리엔 검이 박혀 있었으나 아직은 힘이 남아 있던 사내가 쥐고 있던 검을 놓아버리고, 손을 뻗어 오크의 목을 틀어쥐었다. 단번에 목뼈를 부러트리려는 것이다.

퍼억

그때 사내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날아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커다란 돌도끼를 손에 든 오크가 왼쪽 무릎을 내려친 것이다.

“크악~.”

사방에서 오크가 몰려드는 상황에서 무릎이 박살 났으니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퍽

돌도끼가 또다시 날아들었다. 두 번째 목표는 어깨 위였다. 엑스퍼트에 오른 사내는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짓씹으며 돌도끼를 손에 든 오크를 노려보았다.

푸욱

“헉.”

돌도끼의 잇따른 충격에 자신의 옆구리에 부러진 검을 박아 넣은 오크를 잊고 있었다. 오크가 밀어 넣은 검은 이제 검자루만이 드러나 있었다. 비록 부러진 검신이지만 자신의 옆구리를 뚫기에는 충분한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한 번의 충격에 끝내 사내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퍽 퍽 퍼억-!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사내의 목을 향해 오크는 쉴 새 없이 돌도끼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의 머리통이 몸과 분리되었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오크가 붉은 피를 쏟아내는 잘린 목을 들어 올렸다.

“크아아악~.”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머리통을 흔들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오크들도 흥분한 듯 덩달아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취이익~.”

“크아악~.”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하나둘, 사내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백작님! 이대로는 기사단이 버티지 못합니다.”

아직도 푸른 오러에 휩싸인 장검을 휘두르던 장년의 사내에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오는 오크를 베어 넘긴 장년인이 외쳤다.

“스크롤을 써라! 이곳을 빠져나간다.”

“예!”

오크의 공격을 흘려넘긴 사내가 재빨리 소리 질렀다.

“스크롤을 사용하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곧이어 커다란 폭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쾅- 쾅- 콰앙-

연이어 폭음이 이어지자 수십 마리의 오크들의 몸뚱이가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크들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틈이 생겨났다. 여기저기 분산돼 있던 기사들은 그곳을 통해 오크 무리 사이를 빠져나왔다.

겨우 진창을 빠져나와 한숨 돌릴 수 있나 싶었는데, 곧 또 다른 무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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