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후안 백작
힐튼 남작으로서는 백작의 호위를 하며 지루하게 이어지던 일상에서 벗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예상을 깨트리는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어 즐거운 마음이 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도 와이번의 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과 자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오크 랜드까지 들어온 이상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것 또한 힐튼 남작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아무리 봐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광할하게 펼쳐진 고원 구석구석을 살피던 힐튼 남작이 중얼거렸다. 낮은 풀들과 둔덕 그리고 작은 잡목으로 이루어진 고원이라 딱히 숨을 곳도 마땅치 않건만, 이니엘 일행의 모습은 어디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마치 땅으로 꺼져버린 것처럼.
“제법 잘 도망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엑스퍼트 급 기사들을 상대로 말이야.”
“저 또한 이렇게 빠르게 거리를 벌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의 길잡이가 제법 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이제 그 길잡이가 누군지 슬슬 궁금해지는군.”
힐튼 남작이 고개를 돌려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일 대장과 연관이 있는 자라 보시는 겁니까?”
“이곳 지형에 이 정도로 익숙하다면 분명 보일 대장과 연관이 있는 자가 분명해. 아마도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또 다른 순찰조가 있었던 모양인데…. 왠지, 이 자도 보일 대장이 그랬던 것처럼 날 놀라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네.”
올라가는 힐튼 남작의 입꼬리에 호기심과 흥미가 맺혀있었다.
“꽤 즐거워 보이십니다.”
“그렇게 보이나? 사실 최근 좀 지루했던 건 사실이네. 그래서 이번에 후작 각하를 설득해 이렇게 외유를 나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재미있군.”
남작의 말에 일칸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푸확
오크의 목을 관통했던 롱 소드가 빠져나오자 진녹색의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허공을 물들이는 역겨운 핏물과 달리 오러에 휩싸인 롱 소드는 푸르게 빛났다.
“취익~. 크아악~.”
쿵
장대한 체구의 오크가 손에 쥐고 있던 배틀 엑스를 떨구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얼굴을 처박고 바닥에 쓰러졌다. 왈칵 피를 토해낸 오크가 몸을 부르르 떨며 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오크 부락, 정확히 몇 번째 부락이지?”
“딱 열 번째입니다. 지금까지 지나쳐온 오크 부락 보다는 작은 편입니다. 아무래도 고원 일대라 그런지 오크 랜드에 있던 놈들보다는 무리가 작은 것 같습니다.”
“모두 이곳으로 모이라 하게.”
“알겠습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사내가 급히 물러났다. 품 안을 뒤적인 장년의 사내는 지저분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튄 오크의 피를 닦아냈다. 오랜 전투가 이어지면서 손수건은 지저분할 대로 지저분해졌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핏물을 닦아낼 유일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대강 핏물을 지워낸 사내가 다시 품 안으로 손수건을 밀어 넣었을 땐, 언덕 위로 27명의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모여드는 중이었다.
모두 온몸에 녹색의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어 괴기하게 보였지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들이 다인가?”
“얼마 전 부상을 당했던 세 명이 결국 죽었습니다.”
보고를 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공기를 텁텁하게 울렸다.
“흠… 역시 오크 랜드란 말인가? 열세 명의 기사를 잃다니.”
장년의 사내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뒤를 바라보았다. 처음 이곳으로 출발할 당시만 해도 2개의 최정예기사단이 동원되었다.
더군다나 이어지는 전투에서 기사단은 3서클 파이어볼이 인첸트 된 마법 스크롤을 무려 열 장이나 사용하였음에도 열 명이 넘는 엑스퍼트 기사를 잃고 말았다. 그로서는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온 기사들이 죽었으니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여태껏 이들이 수천의 오크들이 몰려 있는 수십 곳의 부락에 침입해 오크들을 몰살시켰다는 걸 고려한다면, 13명의 기사만을 잃었다는 것은 오히려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2개의 기사단만으로는 불가능한 일로, 눈앞에 서 있는 최상급 엑스퍼트 기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디에 있나?”
“하루 정도만 더 가면 만나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직하게 묻는 장년 사내의 옆으로 푸른색 마나석을 손에 든 사내가 다가와 말했다.
“이번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한다. 실패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명심해라.”
“예!”
장년의 사내, 후안 백작은 고개를 들어 넓게 펼쳐진 고원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최상급에 오른 그로서도 다시는 오크 랜드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단 생각이 들 정도로 험난한 행군이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오크들의 공격은 최상급 엑스퍼트 기사인 자신을 지치게 할 정도로 집요했다.
“젠장!”
후안 백작이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사실 이번 일은 무모한 일이었다. 아무리 최상급 엑스퍼트의 실력자라고는 하지만, 2개의 기사단만으로 오크 랜드를 뚫고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후안 백작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황실에 충성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모인 기사들은 모두 카데인 제국 황실 기사단이었다. 이들은 후안 백작이 이끄는 제 3기사단과 페링 남작이 이끄는 제 5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다만 제 5기사단은 기사단장이 없고 부 기사단장 페링 남작이 있을 뿐이었다. 제 5기사단의 기사단장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터라, 그동안 실질적으로 제 5기사단을 지휘해온 사람이 후안 백작인 만큼 사실상 이번 일에 동원된 기사단 모두 후안 백작의 기사단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젠 공작!”
후안 백작은 모든 일의 원흉인 작자의 이름을 짓씹듯 발음했다. 카데인 제국의 공작인 아이젠 공작은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최상급 엑스퍼트로서 권력의 최상점에 있는 것도 모자라 귀족파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음흉한 아이젠 공작은 황제에게 직접 이번 일을 보고했다. 황제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후안 백작을 내어놓았다.
최상급에 달하는 엑스퍼트라고는 하나 후안 백작은 황실 기사단장 중 가장 서열이 낮고 실력이 떨어졌다. 애당초 실패를 예상한 황제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약한 후안 백작을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후안 백작이 기사단의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이번 일에 나선 것은, 그로서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원의 학살자의 주인!”
이번 일에 성공하면 그가 얻게 될 보상이었다. 그는 비록 40살이 넘긴 했지만, 이 정도 나이에 최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것은 남들보다 빠른 성취라 할 수 있었다. 마스터에 근접한 아니, 마스터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후안 백작으로서는 자신이 화이트 와이번의 맹약자로서 충분한 실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다 자부하고 있었다.
“서둘러라!”
멀리 페링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원의 학살자의 주인이라는 달콤한 명예를 곱씹던 후안 백작은 정신을 차리곤 오크 부락에서 멀어져 갔다.
* * *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기 시작했을 때쯤 카일이 도착한 곳은 이니엘 일행으로서는 생각지 못한 곳이었다.
“지금 이곳을 올라가겠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이면 추적자들에게 잡히고 말 겁니다. 그렇다고 밤에 여정을 계속할 순 없으니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카일이 가죽 가방 안에서 꺼낸 밧줄을 몸에 묶은 후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을 넘어간다면 고원을 가로질러 가는 것보다는 몇 배는 빠르게 갈 수 있을 겁니다.”
얼토당토 않는 카일의 말에 주안이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카일의 말대로 남북으로 이어진 높은 절벽을 넘는다면 분명 빠르게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체력이 약한 이니엘 영애나, 온종일 영애를 업고 달려 지칠 대로 지친 시안느가 과연 험준한 절벽을 넘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너무 염려하진 마십시오. 중턱까지만 올라간 뒤 휴식을 취할 겁니다. 절벽 위에 있는 이상 제아무리 추적대라 해도, 맨몸으로 절벽을 올라오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차분하게 설명하는 카일의 말에 주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지형을 가장 잘 아는 건 카일이었다. 뾰족한 수가 없는 현재로선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 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밧줄이 잘 묶였는지 확인한 카일은 가방을 다시 등 뒤로 둘러맨 뒤 능숙하게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려면 손의 악력과 팔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야만 했다.
“대단하군…!”
상당한 속도로 절벽을 오르는 카일을 보던 주안이 낮게 감탄했다. 그리고 짧은 사이, 말했던 절벽의 중턱에 도착한 카일은 다른 의미로 놀라고 경탄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달라진 게 없네.”
사위를 살핀 카일은 어딘지 즐거운 것 같은 미소를 띠었다. 절벽 사이에 마치 도끼로 찍어낸 듯 갈라진 틈인 이곳은 이미 보일과 한번 올라와 봤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절벽 중턱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라스피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카일은 여기에서 보일에게 라스피 나무로 화살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라스피 나무는 다른 곳에서도 자랐지만, 보일이 굳이 이곳까지 올라와 라스피 나무로 화살 만드는 법을 알려 준 것은, 절벽 위에서 자라는 라스피 나무가 가장 곧고 질길 뿐만 아니라 단단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카일은 몸에 묶어 놓은 밧줄을 풀어 라스피 나무 여러 개의 밑둥을 뭉친 뒤 단단하게 묶었다. 어설프게 무거운 바위보다 뿌리가 단단히 박힌 라스피 나무가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쯤이면 된 것 같군.”
확인차 줄을 몇 번 잡아당긴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이어 가방 안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신속하게 절벽을 내려왔다.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카일이 빈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나 카일의 말에도 선뜻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카일이 이미 밧줄까지 내려놓았으니 암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은 주안이나 용병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안느 역시 지쳐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사인 만큼 어떻게든 올라갈 수 있었다. 다만 이니엘 영애가 문제였다. 주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카일의 말대로 이 절벽을 오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임을. 하지만 그렇다고 이니엘 영애가 해내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무작정 괜찮다고 할 순 없었다. 미간을 좁게 모은 주안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애께서 이 절벽을 오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네.”
그 말이 사실이었기에 이니엘 영애는 달리 반박하지 못했다.
“영애는 제가 모시고 올라가지요.”
주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지만 고위 귀족가의 영애가 가족이 아닌 사내의 등에 업혀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주안의 생각을 이미 짐작했다는 듯 카일이 가방을 가리켰다.
“직접 업겠다는 게 아닙니다. 영애는 가방 안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일행의 시선이 카일의 가방을 향해 몰려들었다.
처음 짐이 가득 든 가방을 보았을 때는 일반적인 가죽 가방처럼 보였는데, 짐을 완전히 뺀 가방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단순히 가죽으로만 만든 것이 아니라 등판과 바닥에 L자 모양으로 나무판이 덧대져 있어, 많은 짐을 넣어도 가죽이 늘어지거나 찢어지지 않게 만든 특이한 형태의 가방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카일에게 대꾸하는 대신 주안은 이니엘 영애에게 눈빛을 보냈다. 괜찮겠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가방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요?”
한쪽에서 쉬고 있던 이니엘이 천천히 일어나 가방 앞으로 다가왔다.
“등받이 쪽으로 등을 기대어 앉으시면 됩니다.”
카일이 가죽가방을 열어주자 이니엘이 머뭇거리며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가방이 다소 작은 듯했지만, 막상 가방에 몸을 밀어 넣자 맞춘 듯 딱 맞게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