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고원에서 3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보내지요.”
잡목지대를 벗어나 날리던 카일이 멈춰선 곳은 낮은 둔덕 주변으로, 크고 작은 바위와 잡목들이 얽혀 있어 고원 위로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멈춰도 되겠나? 아직은 날이 밝으니 더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추적대가 지척까지 쫓아왔으니 최대한 거리를 벌리는 것이 좋을 텐데, 휴식을 취하자는 카일의 말이 의아했던 보틀러가 물었다.
“이곳을 지나면 낮은 풀들이 자라는 평야 지대가 끝없이 펼쳐진 고원지대라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평원에서 불어오는 시린 밤바람을 막아주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와이번 나이트들이 이미 우리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저들이 밤에도 추적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지 않겠나?”
“가고일 무리를 건드려 놓았으니 추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내일 날이 밝아야 추적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뒤 이른 새벽녘에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보틀러도 더는 강요하지 못했다. 어차피 지금은 길잡이인 카일의 판단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서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인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 것도 사실이라, 카일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산 밑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으려면 일단 주변에 바위나 잡목을 이용해 낮은 담이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혹시 이곳으로 몬스터가 오지는 않나?”
“이 일대는 가고일들의 영역과 인접한 곳이라 오크들이 잘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은 하는 게 좋겠군요.”
“경계를 서야 한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알겠네. 주안 경에게 말해 놓겠네.”
보틀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안 기사단장에게 다가갔다. 둘이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던 카일은 먼저 둔덕의 반대쪽 가장 큰 바위를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보틀러와 피툰, 주안 기사단장이 다가와 카일을 따라 덤불과 잡목으로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넷이서 작업을 한 덕에 일은 금방 끝났다.
“이렇게라도 만들어 놓으니 그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군.”
피툰이 커다란 돌을 들어 만들어 놓은 돌담 위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그때 카일이 가죽가방에서 작은 삽을 꺼내어 바위 바로 앞쪽에 자리를 잡고는, 땅을 길게 파 내려갔다.
퍽- 퍽-
능숙하게 땅을 판 카일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넓적한 바위를 찾아, 길게 파놓은 구덩이 위로 하나씩 올려놓았다.
“지금 뭐 하려는 건가요?”
이곳까지 쉼 없이 달려온 상태로 휴식 공간을 만드느라 고생한 탓에, 지친 일행들이 쉬는 동안에도 카일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만들었다. 부산을 떠는 카일의 모습에 호기심이 들었는지 시안느가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곧 기온이 더 내려갈 겁니다. 일단은 몸이라도 녹여야지요.”
카일이 구덩이 안으로 바짝 마른 잡목을 밀어 넣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작게나마 불을 붙이자 몽글몽글 연기가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가 불어온 바람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위에 걸쳐진 돌을 툭툭 두들긴 카일이 말했다.
“이렇게 구덩이를 파고 돌을 덮으면 불빛을 막아줄 테니, 빛이 새어 나갈 거란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어두운 평원 위에서 불빛이 비치면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어, 추적대나 몬스터에게 위치를 발각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떨어지는 기온에도 섣불리 불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일의 말대로 평평한 바위가 빛을 막아준다면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을 성싶었다. 타오르는 불은 작았으나 공기를 훈훈하게 데우기에는 충분했다. 일행들이 어느 정도 피로를 해소한 것 같자 카일은 가죽가방 안에서 작은 솥 하나를 꺼냈다.
“설마 이 솥을 지금까지 갖고 다녔나요?”
놀라움에 크게 눈을 치켜뜬 시안느가 물었다. 카일이 많은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은 알았지만, 쇠로 만든 솥까지 가지고 다닐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정도야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지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은 카일은 뜨겁게 솥이 달아오르자 가방 한쪽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수통을 꺼내 솥 안에 부어 넣었다.
치이익-
순간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어느 정도 끓어 오르자 카일은 잡초처럼 지천에 자라고 있는 이름 모를 풀들을 따와 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슨 풀인가요?”
“허브의 일종입니다. 끓는 물에 생잎을 넣어 우려서 차로 마시면, 몸에서 열이 올라와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해주죠. 고원지대라 밤이 되면 더 추워질 테니 미리 마셔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신기하네요.”
어느새 붉게 변한 물을 관찰하던 시안느가 말했다.
찻잎이 어느 정도 우러나오자 카일은 가방에서 옹기로 만든 찻잔을 꺼내 찻물을 따라 한 명씩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선뜻 입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이름도 모를 풀을 꺾어 만든 차를 마시기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권하는 상대가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카일이 만약 찻물에 장난이라도 쳤다면 그대로 상자를 빼앗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카일의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이니엘 영애를 비롯한 주안은 아직 확실하게 카일을 믿고 있지 않았다.
“후~. 후~.”
마지막 남은 찻물을 자신의 잔에 따른 카일은 이미 그들이 그러리라 짐작했는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차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차를 마신 카일의 입에서 뿌옇게 번지는 뜨거운 김을 바라보던 시안느가 뒤를 이어 조심스레 잔을 기울였다.
찻물이 목구멍을 통과하자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짜르르 넘어갔다. 몸 안에 확 퍼지는 훈훈한 열기에 시안느가 짧은 탄성을 질렀다.
“아!”
시안느가 연거푸 찻물을 마시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살피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첫 번째 불침번은 제가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뺨 위로 온기가 도는 것을 보던 카일이 잡목을 꺾어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럼 먼저 자도록 하지. 다음에는 날 깨우면 될 거야!”
고맙다는 듯 눈짓한 보틀러는 주변에 덤불을 끌어모아 바닥에 깔더니, 그 위에 자리를 잡고는 곧 잠이 들었다. 피툰도 보틀러를 따라 덤불을 바닥에 깔고 누웠다. 이니엘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다른 게 있다면 그녀는 덤불 위로 기사단장이 가져온 양털 가죽을 깔고 그 위에서 곧 잠이 들었단 부분이었다.
기사단장은 영애의 옆 바위에 기댔고, 시안느는 영애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모닥불 안으로 잡목을 집어 던지며 타오르는 불꽃을 한동안 바라보던 카일은 고개를 들어 고요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평온하게 잠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헉~.”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던 피툰을 뒤에 서 있던 보틀러가 급히 잡았다.
“괜찮으냐?”
“네. 잡목 뿌리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조심해라. 안개 때문에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구나. 앞서가는 사람을 놓치면 바로 길을 잃게 될 거다.”
“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피툰은 신중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고원 위로 내려앉은 안개는 눈앞의 사물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자욱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넓은 고원의 한 가운데라, 앞사람을 놓치는 순간 그대로 방향 감각을 잃고 일행과 전혀 다른 길로 갈 수 있어 조심, 또 조심해야만 했다.
그나마 카일이 미리 밧줄을 챙겨와 다행이었다. 밧줄로 서로의 몸을 묶어 연결한 일행들은 겨우겨우 카일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정말 이 길이 맞을까요?”
피툰이 나직이 웅얼거렸다. 안개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행보로 봐서는 이곳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믿어보는 수밖에.”
“헌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보일이란 분의 아들이 아닙니까?”
보일이 카일에게 말한 것처럼, 보틀러 역시 피툰에게 보일을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말했었다.
“어쩔 수 없지. 비밀이 알려지면 그대로 끝이니…. 우리가 살아서 오크 랜드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
“그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과연 그자들이 약속을 지킬까요?”
피툰이 부산스레 눈을 굴리며 묻자 보틀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물러나기에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다. 어쩌면 이번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마른침을 크게 삼킨 피툰은 머리를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 * *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자 무거운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앞서 걷고 있던 카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이니엘 영애가 앞서가는 카일의 가죽 가방 위에 단단히 묶여 있는 상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옆에서 걷고 있던 주안이 다가와 물었다.
“…아니에요. 단지 좀 신경이 쓰이네요.”
“상자가 걱정되어 그러십니까? 지금까지 카일을 쭉 지켜보았지만, 딱히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알아요. 출발하기 전에도 분명 알이 무사한지 확인했으니까요. 하지만 기분이 이상해요. 분명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이니엘이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그녀는 항상 출발하기 전, 알이 무사한지 확인을 한 후 길을 나섰다. 오늘도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상자를 살짝 열어 안을 확인한 후 카일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쭉 카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안개가 낀 뒤로는 카일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계속 걷고 있어 짊어지고 있는 가방 위에 단단히 묶여 있는 상자를 열어 알을 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상자에 문제가 생겼다면, 뒤를 따르며 상자를 지켜본 이니엘 영애가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을 터였다.
“아마도 뒤를 쫓는 추적대로 인해 예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주안의 목소리엔 자못 안타깝다는 심경이 가득 들어있었다. 백작가의 고귀한 영애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 것이다. 더군다나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으로 내정돼 있던 정혼자까지 죽었으니, 충격이 컸으리라.
“그럴까요?”
이니엘 영애가 목에 걸려있는 황금열쇠를 손으로 잡으며 눈을 감았다.
이 황금색 열쇠의 원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본래는 화이트 와이번의 맹약자로 선정되어, 알에 마나를 주입해 왔던 기사 도란의 것이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정혼자이자 오랜 시간 호위를 해왔던 기사 도란.
‘화이트 와이번의 알은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이 열쇠와 알은 아가씨께서 가지고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궁지에 몰렸을 당시, 도란이 이니엘 영애에게 이 황금열쇠를 쥐여주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니엘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적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이후 이니엘 영애는 상자를 더욱더 애지중지하며 지키려 애를 썼다.
“도란 경의 말대로 와이번의 알은 절대 빼앗길 수 없어요.”
원래 귀족가의 여인들은 대부분 정략결혼의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의 두 언니들도 별다를 바 없이 모두 정략결혼으로 얼굴도 모르는 자와 결혼을 했다. 마지막이 그녀의 차례였으나 바로 그때 정략결혼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바로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그 기회였다. 그린넨 백작 가문은 동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이룬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시초가 상인 가문이다 보니 막대한 재력을 쌓았지만 뛰어난 기사를 배출하기는 힘들었다.
때문에 오랫동안 주변의 기사 가문들과 정략적인 혼인을 통해 가문의 영향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그러나 도란은 화이트 와이번의 맹약자로 선정되어 정략혼이 아닌 데릴사위로서 이니엘의 정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도란은 죽었다. 정혼자가 죽은 마당에 와이번의 알까지 빼앗긴다면 그녀 또한 정략결혼으로 백작가를 떠나가게 될 것이다. 이니엘 영애는 그것만큼은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녀가 와이번의 알을 기필코 사수하려는 건 도란이 마지막까지 이걸 지키려 했다는 것도 있으나, 그녀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