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05- >
005.
“우리의 새로운 에이스를 위하여!”
“위하여!”
기어이 콜드 게임을 달성하고, 우리 중대원들은 희열을 만끽했다. 이번 경기에서 이긴 덕분에 휴가증을 10장이나 타냈기 때문이다.
예비군 부대라서 중대원이 50명도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정말 엄청난 거다.
나는 선임들에게 완전히 영웅 대접을 받았다.
순전히 내 공로는 아니지만, 토너먼트전이 다 그렇지 뭐. 지금까지 아무리 많이 이겼어도 오늘 경기 하나 졌으면 말짱 도루묵인데.
“이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두 달에 한 번은 휴가 맡아놨네. 저기도 선수 출신 들어왔대서 내심 쫄았는데.”
“에이, 야구는 투수놀음이지 말입니다. 그 새끼 혼자서 전부 홈런 쳐봐야 3~4점 아닙니까.”
“그럼, 그럼! 야구는 투수가 하는 거지! 어디서 우리 막내랑 비교를 하냐.”
“건배!”
우리는 점호 시간 전에 탄산음료와 과자와 냉동 간식을 늘어놓고 가볍게 파티를 했다. 훈련소에서 몇 주씩이나 금욕한 내게는 눈물이 찔끔 나오는 만찬이었다.
“그런데 막내 너는 프로 지망하는 애들이랑 비교하면 어떠냐? 우리 눈에는 네 공 정도만 돼도 장난 아닌데, 걔들은 더 무지막지한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 사실은 6학년 때 야구 그만뒀지 말입니다.”
“관뒀어? 아니, 잘만 하던데 왜?”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갑자기 마운드에 떠밀려 난처해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군대라는 게 좀 부담스러운가. 야구 잘한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챙겨주는데, 부상 때문에 앞으로는 못 던진다고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움직여서 몸이 뻐근하지만, 생각보다 던질 만하던데 뭘. 아니 뭐, 정확히는 상대 팀 선수들 수준이 떨어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일단 분위기에 묻어가자는 내 선택은 주효했다. 심심하면 혼나는 옆 소대 동기와 비교할 때, 내 군 생활은 특별히 열심히 하는 게 없는데도 무난했던 것이다.
암구어를 깜빡했는데도 앞으로 잘하라며 딱밤 한 대로 끝났다면 이해가 가려나? 하기야, 나 같아도 정기적으로 휴가증을 타낼 수 있는 이등병이 있다면 예뻐하겠다.
다음 주에도 시합이 열렸고, 나는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섰다.
‘……그런데 저건 또 보이네.’
홈 플레이트 앞에 어른거리는 스트라이크존을 보면서 나는 기분이 복잡해졌다. 헛것을 보는 게 좋은 징조일 리는 없으니 심란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뭐지? 처음에는 갑자기 선발투수로 내몰려서 압박감 때문에 헛것을 보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보이는 거야?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데 한편으로 환각이 보이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대충 빠르게만 던져도 알아서 헛스윙들 하는데, 쿨존이나 핫존 따위 알 게 뭐냐.
우리 중대는 나의 무실점 호투에 힘입어 또다시 콜드 게임으로 승리했다. 이번에는 휴가증 걸린 경기가 아니라서 환호가 덜했지만,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어쩐지. 잠잠하다 했네.”
밤에 누울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었더니 팔꿈치에 느낌이 왔다. 통증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고, 피가 안 통하도록 꽉 조여 놓은 듯한 감각이었다.
제기랄. 첫 경기 마쳤을 때는 가벼운 근육통 정도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까아앙!
“백 홈! 백 홈!”
세 번째 경기에서 기어이 사달이 났다. 팔에 부담이 안 갈 정도로 힘을 빼고 던졌더니 4실점이나 해버렸던 것이다.
경기 자체는 이겼지만, 9회까지 꽉 채운 6대 4의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막내. 긴장 좀 풀렸나 보다?”
“최태웅이. 다음에도 이런 식이면 곤란해?”
“막내야. 잘하자.”
실점의 여파는 곧바로 나타났다. 그래도 아직은 웃는 낯이지만, 노골적으로 내게 압박감을 주었던 것이다.
아니, 시발. 그런데 솔직히 나도 좀 억울하거든? 어떻게 땅볼이 두 개 나오면 그 중 하나는 알을 까는데? 그 정도는 수비수들이 알아서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까아앙!
“야야야! 빨리 뛰어! 공 굴러간다!”
“뛰어! 뛰어! 존나게 뛰라고!”
그리고 펜스가 없어서 좋겠다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외야수가 공을 놓치면 한도 끝도 없이 굴러가는지라, 1루타보다 장타가 더 많이 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래 놓고서 아마추어 야구의 묘미가 어쩌고 하는데, 지랄 옆차기들을 하고 계신다. 진짜, 아오. 썅.
처음 두 경기에서는 공을 건드린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던지라, 이런 문제가 있는 줄도 몰랐다.
빌어먹을. 설렁설렁 던지다가 위기상황에만 집중해서 팔꿈치 부담을 줄이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공 하나도 허투루 던질 수가 없잖아.
어쩔 수 없이 다음 경기에는 페이스를 올렸고, 1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참고로 1실점은 또 실책성 러닝 홈런이었다. 시발.
“거봐. 하면 되잖아.”
“새끼가 잘 해줬더니 빠져서 꾀부렸던 거지 뭘.”
“열심히만 하란 말이야. 우리가 설마 너 열심히 하는 거 보고도 뭐라고 하겠냐?”
……사람이 진짜 간사한 동물이기는 한가 보다. 내가 엄청 편하게 군 생활 한다는 자각도 있고, 선임들한테 고마운 마음도 있는데. 실책 남발한 직후에 저딴 소리 하는 거 들으니까 은근히 짜증이 나네.
아무튼, 이날 호투로 에이스로서의 신뢰는 되찾았지만, 걱정하던 문제가 터졌다.
“으윽…….”
경기 끝난 직후에는 괜찮았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신호가 왔다. 멍이 든 것처럼 왼팔의 뼈마디와 관절이 시큰거렸던 것이다.
외래진료를 나갔다 왔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거라면 애초에 야구를 그만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간단한 물리치료와 찜질을 받고 왔을 뿐이다.
아무리 연대장이 야빠라도 너무한 거 아닌가. 일주일에 한 번씩 야구 시합을 하게.
야수들이야 상관없겠지만, 팀의 유일한 투수인 나는 7일에 한 번씩 완투해야 한다. 어떤 의미로는 프로에 필적할 만한 일정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편안한 군 생활도 좋지만, 일단은 내 몸이 멀쩡한 게 먼저지. 내 팔이 병신 될 것 같은데 야구는 무슨.
마음을 굳힌 나는 분대장을 찾아갔다.
“한영호 병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 그래 막내. 무슨…… 윤정식! 이 개새끼야!”
부드럽게 웃던 분대장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분대장은 내 뒤에 나타난 윤정식 이병의 멱살을 잡으면서 흉포하게 으르렁거렸다.
“씨발롬이 처돌았나! 쌍간나 새꺄, 작업하러 나간 놈이 열쇠를 들고 가면 어떡해! 우리가 니새끼 좆방망이냐? 씨발. 열쇠 필요하면 윤정식 이병님 어디 계십니까, 빨빨거리고 찾으러 다녀야 돼? 곱창 뽑아다가 모가지를 졸라버릴라 씨발 새끼가! 눈 안 깔아? 군 생활이 만만하냐? 너만 귀한 집 자식 새끼라서 우리가 너 귀찮지 말라고 똥구멍 빨아줘야 되는 거지?”
“…….”
흉신악살(凶神惡殺)이라는 게 이런 건가.
자근자근 씹어먹을 듯한 살기에 생활관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임들도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 눈동자만 굴렸다.
그렇게 30분 넘게 한따까리를 한 분대장이 싱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 막내. 아까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작전 변경. 역시 군 생활 편해질 방법이 있으면 무조건 써먹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날, 나는 팔꿈치 때문에 끙끙거리며 잠을 설쳤다.
“에이스! 오늘도 믿는다!”
“형들만 믿어라! 콜드 게임 해줄게!”
믿기는 개뿔. 알까기나 하지 마라. 그래도 딴에는 운동신경 좋은 사람으로 9명 뽑은 건데, 왜 저렇게 수비를 못할까. 내가 야구 처음 배운 초딩 때도 저거보다는 잘했던 것 같은데.
“3중대 파이팅!”
1회 초. 우리 중대가 선공하는 동안, 나는 팔꿈치를 주물럭거렸다.
통증은 가셨지만, 욱신거리는 느낌이 생생하다. 오늘 던지면 어떻게 될지도 눈에 선했다. 엄살이 아니고, 오늘은 4실점 한 날처럼 설렁설렁 던져도 팔꿈치가 아작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득점으로 1회 초가 끝났고,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마운드에 올랐다.
“……음?”
대강 마운드 감촉을 확인하고 있는데, 상대 타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뻔하다. 한 번 상대해본 적 있는 팀이니까, 내가 글러브를 왼손에 끼었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
“진짜, 내가 군대 와서 별짓을 다 해보는구나.”
투수가 하는 훈련 중에는 반대손으로 똑같이 투구하는 것도 있다. 반대손을 써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나야 초딩 때였는데 원리를 알겠나. 감독님이 시켜서 했을 뿐이지. 내가 밤새도록 끙끙거리면서 겨우 건져낸 해답이 이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습 삼아서 몇 개 던져봤는데,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저 아마추어들을 상대로나 그렇다는 얘기지만.
“제발 통해라. 제발.”
간절하게 중얼거린 뒤, 나는 다리를 들어 올렸다.
부우웅!
내 기준으로는 파리가 내려앉을 것처럼 느려터진 공이 포수의 미트에 꽂혔다.
헛스윙.
1스트라이크.
중요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지만, 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에이 씨. 막상 타자 세워놓고 던지니까 불안하네. 안 통할 것 같은데.’
혼자 연습할 때는 몰랐는데, 실전에서 던져보니 다른 중대 투수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동네 투수들이 5~7실점씩 하는 걸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였다.
더 빨리 던질 수도 있기야 한데, 그랬다가는 제구가 안 된다. 지금 이것도 가까스로 스트라이크존에 구겨 넣는 수준일 뿐이었다.
‘어떡한다? 왼팔은 진짜로 더 쓰면 안 될 것 같은데. 구속 줄이고 제구해서 볼 배합으로 싸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때였다.
[플레이어의 설정이 ‘우투(右投)’로 변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