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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배터리-6화 (6/90)

< 괴물 배터리 -006- >

006.

[플레이어 설정이 ‘우투(右投)’로 변경되었습니다.]

홀로그램 같은 알림판이 튀어나오더니, 이번에는 포수 앞에 보이는 스트라이크존이 바뀌었다.

소소하다면 소소하지만, 극단적이라면 극단적인 변화였다. 온통 파란색이던 스트라이크존 일부가 빨간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냐, 이건 또?”

얼떨떨했지만, 일단 저게 무슨 광경인지 자체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타율 10할을 치는 게 아닌 다음에야, 어떤 타자든 기록을 뜯어보면 잘 치는 코스(핫존)와 못 치는 코스(쿨존)이 있기 마련. 핫존이 넓으면 강타자요, 쿨존이 넓으면 약타자인 셈이다.

가상 스트라이크존의 색깔 표시가 정말로 타자의 강점과 약점 표시라면?

엄밀히 말해서 지금 상태야말로 정상이다.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약점(쿨존)으로 표시되던 이전까지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어떤 상태가 정상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나를 당혹케 하는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왜?

어째서 갑자기 스트라이크존이 변했단 말인가?

“최태웅! 뭐해? 안 던져?”

“……네! 갑니다!”

이미 시합이 시작되었기에, 내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시간은 얼마 없었다.

당장 저것 때문에 팔다리를 못 쓰게 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나중에.

나는 얼떨떨한 채로 허겁지겁 와인드업했다.

까앙! 까앙!

다소 어색한 폼으로 쏘아낸 2구와 3구는 연달아 파울이 되었다.

투 스트라이크.

압도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였으나, 파울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타구에 간담이 서늘했다. 우리 야수들의 수비력을 생각하면 러닝 홈런과 종이 한 장 차이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역시 오른손은 안 통하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는 뻔했다. 오른손으로 던진 공은 저들이 충분히 반응할 만큼 느려터진 것이다.

‘볼 배합을 한다고 치면, 안쪽 높은 거랑 바깥쪽 낮은 거 적당히 섞으면 되나? 초딩 때는 찬희가 미트 대는 데로만 던져서 볼 배합은 자신이 없는……, 잠깐만.’

돌파구를 찾아서 궁리하던 난 한순간 흠칫했다. 장타가 될 뻔한 방금 공 두 개가, 생각해보니 모두 핫존으로 날아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약점 표시가 맞아떨어졌다고…… 봐야 하나?’

지금까지 내가 저 가상 스트라이크존을 의지할 만한 상황은 거의 없었다. 왼손으로 던질 때는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쿨존으로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아무 데나 던지면 그만이었는데 무슨 의존을 하나.

예외가 있다면,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핫존으로 나오던 화기중대 4번 타자뿐이다.

나는 화기중대 4번 타자가 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도 스트라이크존은 그의 타격실력을 경고해주듯 처음부터 빨간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걸 무시한 탓에 실점했다. 하지만 결과만 보면 가상 스트라이크존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어차피 막막한데, 저거 믿고 한 번 질러봐?’

진심으로 환각을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이 상황을 극복할 만한 방법이 전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시험 당일에 엿을 사 먹는 수준의 기대감이랄까.

스트라이크존에 보이는 약점은 ㄴ자 모양의 코너.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서 타자에게 집중했다.

퍼억!

방망이를 내기 직전, 타자가 한순간 움찔했다.

제구에 집중하느라 더욱 느려진 공.

하지만 엉거주춤하게 튀어나온 방망이는 그마저도 맞추지 못하고 허무하게 바람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콜에 타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끄응, 하고 혀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뭐야?’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헛스윙을 끌어낸 게 문제가 아니다. 프로 선수라도 말도 안 되게 느린 공에 헛스윙하는 일은 종종 있으니까.

내 눈에 확 와 닿은 것은 헛스윙한 뒤에 타자가 보인 표정이었다.

충분히 칠 수 있는 공인데 허를 찔렸다는 듯이, 안타깝게 혀를 차는 얼굴.

“…….”

화기중대 4번 타자와의 승부 때도.

지금 던진 3구도.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절묘하다.

정말로 단순한 환각이 아닌 건가?

내 눈에 진짜로 타자의 약점이 보이는 거라고?

‘그럼 왜 지금에 와서…… 아!’

어리둥절하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나는 한순간 눈이 커졌다. 스트라이크존에 ‘핫존’이 표시되기 전과 후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오른손으로 바꿔서 핫존이 보이는 건가?’

그렇게 가정하고 생각한다면 우선 아귀가 맞는다.

좌완투수 최태웅의 공은 아무렇게나 던져도 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실상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타자의 약점인 셈이니, 파란색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완투수 최태웅은?

구속만 놓고 본다면 다른 중대 투수보다 조금 나은 정도밖에 안 된다. 그리고 여기 투수들은 경기마다 5점에서 7점가량씩 실점한다. 오른손으로 계속 던진다면 나도 비슷하겠지.

즉, 오른손을 쓰는 최태웅은 이 군대 리그에서 평균자책점 6짜리 투수밖에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게 내 현재 ‘오른손’ 실력이 반영된 스트라이크존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한 경기에 6실점이면 완전히 난타당한 거다. 지금처럼 핫존이 넓게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해봐야겠어.’

나는 안색을 굳히면서 다음 타자에게 집중했다.

2번 타자도 1번과 마찬가지. 열 감지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스트라이크존은 일부는 빨간색, 일부는 파란색으로 보였다.

“너는 몸 쪽이 약점이다…… 이거지!”

느릿느릿 제구에 집중하며 신중하게 다리를 올린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터진 공이 인하이 코스에 내리꽂혔다.

***

“스트라이크 아웃!”

힘차게 방망이를 헛돌린 타자의 입에서 ‘크윽’하는 신음이 터졌다.

처음부터 허공에 대고 스윙한 것과, 치려고 했는데 안 맞아서 헛스윙이 된 건 느낌이 많이 다르다. 발레 하듯이 한 바퀴를 빙 돌았는데도 허리에 남은 충격이 상당했다.

“……방금 거, 혹시 들어올 때 휘었냐?”

“아니, 그냥 쑥 들어오던데. 변화구였어?”

“그런 건 아니고……. 타이밍 맞았다 싶었는데, 휙하고 빗나가버려서…….”

“지랄하네. 타이밍이 맞으면 뭐하냐? 공보다 거의 한 뼘은 밑에다가 빠따질 하드만.”

“야야야. 떠들지 말고 집중 좀 해봐. 저 새끼가 우리 존만해 보인다고 오른손으로 던지는데, 저 정도는 깨줘야 할 거 아냐.”

“그래! 제대로 좀 해봐! 저만하면 칠 만하잖아!”

부대의 특성상, 밖에서 야구 좀 하던 병사의 소문은 금방 퍼진다. 그중에서도 전국체전 결승전 선발투수였던 3중대 신병 최태웅의 인지도는 단연 발군이었다.

사회인 야구를 하던 사람이나 체대생도 반쯤 운으로 스치는 게 고작이고, 웬만한 사람은 반응하지도 못했다. 뭣보다 저 강속구를 공략할 수 있다고 해도, 한두 명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그런 최태웅이 오늘은 어째선지 반대손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여전히 빠르고 정확하지만, 다른 중대 투수들과 큰 차이는 없는 수준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회다!’

그가 반대쪽 손으로 던지는 걸 알았다고 해서 ‘감히 우리를 무시해?’라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추어가 프로 기사와 바둑 두면서 3점 미리 까는 걸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6중대 타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하이에나처럼 최태웅의 공에 덤벼들었다.

하지만.

퍼억!

“아오, 씨!”

까앙!

“큭!”

퍼억!

“썅!”

정확히 3이닝.

타순이 한 바퀴를 돌자 6중대 주변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똥볼에 아웃 당했다고 킬킬거리는 사람도,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도 없었다.

“휜 거 아니야. 확실해. 내가 끝까지 봤어.”

“어, 나도 봤어. 그냥 직구야.”

“나도 봤어. 다른 애들 공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어. 진짜 평범해.”

프로 리그도 아니고, 노히트나 완봉 따위를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3이닝 째이고, 당했나 보다 생각하면 그만일뿐더러, 상대 투수 자체가 그런 기록을 세워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6중대 타자들이 긴장한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히 칠 만한 공인데…….”

“그런데 왜?”

한두 사람만 그랬다면 비웃거나 약 올리고 말 일이다.

그러나 모든 타자가 그런 식으로 아웃을 당했다면 뭔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에이 씨! 또 잘못 쳤어!”

“큭!”

“아, 왜 저런 공이 안 때려지는데!”

최태웅의 왼손 투구를 상대할 때는 삼구삼진으로 죽어도 억울한 마음 따위 없었다. ‘어우, 저걸 어떻게 쳐?’라거나 ‘역시 선수 출신은 다르네.’라며 저절로 혀가 내둘러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당최 이해가 안 되었다.

사회인야구 수준에도 못 된다지만, 모든 일은 상대적인 법. 개나 소나 안타를 치는 아마추어 야구의 특성상, 여기 상위타선은 나름대로 6할씩 치는 강타자들이었다.

그에 비해 저 ‘오른손 투구’의 위력은 고작해야 오락용 배팅머신 수준. 웬만큼 운동신경 있는 성인 남성이라면 뻥뻥 쳐내는 것이 정상이다.

“저게 혹시 볼 배합이라는 건가?”

“볼 배합은 개뿔. 뭔 데이터가 있다고 배합을 해?”

“꼭 데이터가 있어야만 배합을 하냐? 누구한테나 먹히는 기본적인 볼 배합이 있을 거 아냐.”

끼리끼리 성과도 없는 토론을 하는 사이에 헌납한 아웃 카운트만 벌써 21개. 어쩌다 스친 공은 비실비실한 플라이가 된 지라, 설마 하던 퍼펙트 피칭이 7회까지 오게 되었다.

‘진짜 희한하네. 다른 투수 공이랑 별로 다르지도 않은데, 배합 하나 한다고 이렇게 치기가 어려워져?’

4번 타자인 진헌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타석에 섰다.

강속구에 당했을 때와 저런 똥볼에 당했을 때의 기분은 전혀 다르다. 전자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대한 굴복감을 느낀다면, 후자는 얍실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퍼억!

“……!”

도대체 어떤 배합을 하는 건가, 제대로 관찰해보려고 섰던 진헌수의 몸이 발작적으로 꿈틀했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딱 지켜보려고 한 이 타이밍에 치기 쉬운 한복판 코스가 들어왔던 것이다.

‘씨발……. 그냥 제구 삑사리 난 거겠지? 뭐 이렇게 운까지 안 따라주냐.’

투수가 우리 얕봐주면 고마운 거 아니냐는 중대원들과 달리, 진헌수는 지금 상황이 조금 자존심 상했다.

그도 이 안에서는 행세깨나 하는 강타자다. 상대가 선수 출신이라지만, 듣자하니 고작 초등학교 때 했던 게 다라고 하지 않나.

부우웅!

“큭!”

전 타석에는 낮은 코스만 던지기에 넘겨짚고 휘둘러 봤는데, 약 올리듯 높은 공이 훅 들어온다.

허무하게 투 스트라이크를 헌납한 진헌수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래, 씨발. 네 볼 배합이 번트에도 먹히나 보자.’

나름대로 파격적인 수를 떠올린 진헌수의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갔다.

투 스트라이크에 4번 타자가 세이프티 번트.

누가 들으면 마약 했느냐는 소리가 나올 법한 작전이지만, 아마추어 야구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슈욱!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난 순간, 진헌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양손으로 고쳐 잡았다.

낮은 코스.

쉽진 않지만, 못 굴릴 것도 없다.

저쪽 수비력을 생각하면 굴리기만 해도…….

퍼억!

“이런 씨!”

한순간 진헌수의 가슴이 덜컥했다.

낮은 코스라고 생각한 공이 한도 끝도 없이 떨어지더니 아예 홈 플레이트 앞에 처박혔던 것이다.

‘폭투!’

방망이를 빼려는 시늉도 못한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로지 스트라이크만 던지는 놈이다 보니, 이런 공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윙! 아웃!”

주심이 고민도 하지 않고 판정을 내렸다.

진헌수는 망연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타석에 남아서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우연이겠지? 무슨 독심술도 아니고…….”

최태웅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돌려받은 공을 글러브 안에서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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