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4화 (4/90)

< 괴물 배터리 -004- >

004.

[베이스볼 트레이너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순간, 내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줄 알았다.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홀로그램이 눈앞에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뭐냐, 이건 대체?

[최초의 특성을 선택해주세요. 모든 특성은 차후에도 미션 클리어 포인트로 활성화 가능합니다.]

-매의 눈 : 타자의 약점과 강점을 간파한다.

-무쇠팔 : (선택 불가) 경기 후반에도 능력치가 하락하지 않는다.

-노예 : (선택 불가) 연속으로 경기에 출장해도 능력치가 하락하지 않는다.

-스나이퍼 : 구속을 유지한 채, 제구력이 상승한다. 실투가 나올 확률이 대폭 하락한다.

-임기응변 :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을 때,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다.

-변화무쌍 : 모든 변화구의 무브먼트가 상승한다.

-닥터 K :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구속과 구위와 무브먼트와 제구력이 상승한다.

-양손잡이 : 양손 모두 동일한 위력의 공을 던질 수 있다. 같은 손 타자에게는 피안타율이 특히 더 하락한다.

-돌직구 : 패스트볼의 구위가 대폭 상승한다. 타구가 파울존으로 날아갈 확률이 상승한다.

-철벽 내야 : 타구가 땅볼이 될 확률이 상승한다. 땅볼 타구가 야수 근처로 향할 확률이 소폭 상승한다.

…………………….

눈도 비비고 머리도 흔들어봤지만, 갑자기 나타난 홀로그램은 사라지지 않았다. 느닷없이 휴가증 10개짜리 경기에 투수로 떠밀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내가 지금 그렇게 긴장했나?’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이 헛것을 보기도 한다는 것쯤은 들어봐서 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렇게 긴장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손이 떨리는 것도, 시야가 좁은 것도, 식은땀이 나는 것도 아닌데, 느닷없이 헛걸 본다고? 그게 말이 돼?

“플레이 볼!”

당혹감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주심이 경기개시를 선언했다. 무시무시하게도 주심은 연대장이 직접 맡고 있었다.

타석에는 벌써 1번 타자가 들어와서 방망이를 흔들거렸고, 스탠드 쪽에서 병사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다.

‘이런 씨. 모르겠다.’

나 혼자 방구석에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뭐가 보이든 말든 무시하는 수밖에.

그게 아니면 뭐 어쩔까? 손들고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환각이 보여서 경기 못하겠습니다.’라고 할까?

퍼억!

거의 7년 만의 투구인데 제대로 던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엉뚱한 일에 정신이 팔렸더니 오히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내 몸이 투구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꽤 날카로운 공이 미트에 박혔다.

상대 팀은 한순간 침묵했고, 우리 중대는 환호했다.

“오오오!”

“역시 전국대회 우승자!”

“차기 에이스!”

나는 심호흡하면서 왼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아, 그나마 통증이 없는 건 다행이네. 장담은 못하겠지만, 한두 경기쯤은 충분히 던질 수 있을 것도 같고.

[플레이어가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작위로 최초특성이 부여됩니다.]

[플레이어에게 ‘매의 눈’ 특성이 부여됩니다.]

이때, 눈앞에 보이던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알림판 같은 것이 사라지고 시야가 맑아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환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홈 플레이트 쪽을 보았더니, 네모난 실선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게 스트라이크존이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건…….’

특이한 것은 색깔이었다.

스트라이크존 주위가 파란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온통 새파란 것은 아니고 적당한 명암이 있었는데, 얼핏 보자면 열 감지 카메라로 찍은 영상 같았다.

‘설마, 쿨존(Cool Zone)이랑 핫존(Hot Zone)인가?’

나는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눈썹을 꿈틀했다.

보통 야구에서 타자가 강한 코스는 ‘핫존’, 약한 코스는 ‘쿨존’이라고 부른다. 공식용어인지 아닌지까지는 모르겠는데, 야구 게임에 이런 개념이 자주 보이곤 했다.

그러고 보니 베이스볼 트레이너? 이거 옛날에 찬희가 우리 집에 놓고 갔던 게임 아닌가? 오랜만에 야구공 잡았더니, 내 뇌가 별 지랄을 다 하는구나 진짜.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내 머리가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지만,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 환각에 투구를 방해하는 요소는 또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것도 안 보인다 생각하고 던지면 되는 거지, 뭐.

게다가 말이 핫존이고 쿨존이지, 한복판을 제외하면 스트라이크존 대부분이 파란색이었다. 저 환각을 믿는 건 아니지만, 설령 믿는다고 해도 스트라이크존 아무 데나 던지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였다.

“로또다! 로또가 터졌다!”

“시발! 막내 만세다!”

1회에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자, 선임들이 무슨 역전 끝내기 홈런 친 타자를 맞이하듯이 내게 달려와 얼싸안았다.

“최태웅! 최태웅!”

“에이스! 에이스!”

우리 1회 공격도 무득점으로 끝나고, 나는 선임들의 환호를 받으며 2회 마운드에 올랐다.

아직도 헛것이 보이려나, 하면서 홈 플레이트 쪽을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냐, 이건 또?’

1회에 상대한 세 타자의 스트라이크존은 거의 파란색이었다.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모든 코스가 약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4번 타자는 어처구니가 없게도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새빨간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무 데나 던져도 다 친다는 거야, 뭐야?’

퍼뜩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저 환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건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원.

그리고 사실은 달리 시도해볼 만한 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그만둔 나는 포심 패스트볼밖에 던질 줄 몰랐다. 그나마도 7년 만에 던지는 거라, 스트라이크존에 간신히 구겨 넣는 정도의 제구가 고작이다.

그러니 뭘 어쩌겠나. 유일하게 던질 줄 아는 직구를 스트라이크존에 힘껏 던질 따름이고…….

까아앙!

상대 타자는 벼락같은 스윙으로 받아쳤지.

***

연병장에는 펜스가 없다. 그러면 홈런도 없는가? 싶겠지만 그건 또 아니다. 타자가 뛰어서 홈에 들어올 정도로 공이 멀리 날아가면 그게 홈런이다.

“화기중대에도 선수 한 명 들어왔다더니만, 진짜였나 보네.”

“와, 빠따 휘두르는 거 봤냐? 프로야구 볼 때는 몰랐는데, 우리 스윙이랑 비교해서 보니까 차원이 다르네.”

4번 타자에게 홈런을 하나 맞았지만, 다음 타자부터는 다시 삼진 퍼레이드였다. 고작 1실점이었고, 우리도 곧바로 3점을 뽑아낸지라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3회 초의 마운드에 올라가는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거 우연인가?’

지금까지 타자 7명을 상대했다.

스트라이크존이 파란색이던 6명은 기껏해야 운동신경 좋은 일반인이라 모두 잡아냈고, 유일하게 빨간색이던 4번 타자는 선수 출신이라 홈런을 맞았다.

이 상황만 놓고 본다면 내 눈에 보이는 스트라이크존의 핫존·쿨존이 제대로 맞아떨어졌다는 얘기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나? 내가 무슨 초능력자가 된 것도 아니고.

아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4번 타자만 폼이 비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내 무의식이 타자의 역량을 간파하고 환각이라는 형태로 보여줬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까앙!

“아웃!”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해서 내 피칭이 무너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무너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났다. 속구만 대충 던져도 제멋대로 붕붕 선풍기질하고 돌아가시는데 뭘.

‘야구에 목매는 부대라더니만. 그럼 사회인 야구 수준은 돼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그냥 개나 소나 빠따 쥐여서 내보낸 수준인데.’

타순이 한 바퀴 돌자, 나는 마음이 느긋해졌다.

타자들 수준이 이 정도라면, 매 타석 홈런을 때리는 괴물이 하나쯤 섞여 있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아마추어 야구는 원래 점수가 잘 난다. 어떻게든 공을 맞히기만 하면 야수들이 알아서 실책하며 점수를 헌납해 주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막으려면 타자들이 손도 못 댈 정도로 빠른 공을 던지면 된다. 하지만 상대 투수는 그러지 못했다.

“콜드! 콜드! 콜드! 콜드!”

4회 초. 9대 1의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갔더니 저런 함성이 울렸다. 보아하니 이 동네에서는 10점 차이 나면 콜드 게임으로 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거 살짝 신호가 오는데…….’

이닝 당 10개쯤 됐으니까, 한 30개 던졌나?

운동 그만둔 게 한두 해도 아닌데 그만큼 던졌으면, 사실 멀쩡한 팔이라도 적잖이 무리한 거다. 통증까지는 아닌데, 미묘하게 욱신거리면서 어깨와 팔꿈치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투아웃까지 잡고 났더니 아까 홈런 친 4번 타자가 또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선임들 말을 들어보면 쟤도 이등병인 것 같은데, 점수 차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대놓고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 빨간 스트라이크존. 진짜 신경 쓰이네.’

저 환각이 보여주는 핫존과 쿨존을 믿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첫 타석에 타격 실력을 본지라, 어디로 던지면 좋을지 막막했다.

아니 뭐, 게임 승패야 이미 결정된 거라서 상관없는데 투구수가 문제지. 괜히 1점 더 줬다가 콜드게임 늦어지면 팔에 무리만 갈 것 같은데.

“……아. 거르면 되겠구나.”

나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탄성을 냈다.

내가 옆으로 손짓하자 포수도 타자도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우우우우! 비겁하다!”

당연히 화기중대에서는 야유를 퍼부었다. 점수 차이가 8점인데 이기는 팀이 고의사구를 하니까 그러는 거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저기는 대대가 달라서 나랑 선후임 관계도 아닌 아저씨들인데.

‘어?’

그때, 나는 무심코 눈썹을 꿈틀했다.

타자가 짜증스럽게 허리를 펴자, 스트라이크존이 파란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뭐지, 이게?’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내가 고의사구를 한다고 생각해서 타격할 의지를 버렸다. 방망이를 휘두를 생각 자체가 없으니 ‘핫존’이 ‘쿨존’으로 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나 지금 뭔 생각하냐. 그래 봤자 환각인데.’

곧바로 나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자체가 저 스트라이크존을 믿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도 혹시…….’

이건 기대감이라기보다 정말로 작은 변덕이자 호기심이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으면 괜히 더 들어가 보고 싶어지는 기분.

‘어차피 주자도 없는데, 아니면…… 말고!’

흐느적거리듯이 휘둘러지던 팔에 갑자기 힘이 확 들어갔다.

제대로 던진 것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빠른 공이다.

고의사구인 줄 알고 힘을 빼고 있던 타자에게서 흠칫 놀라는 기척이 느껴졌다.

까앙!

공을 때리려고 했다기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여버리고 만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용케 공을 맞혔으나, 당연히 정타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정면으로 굴러 오는 공을 직접 잡아서 1루수에게 송구했다.

“……아, 아웃?”

1루심을 맡았던 병사 하나가 얼떨떨해하면서 콜했다.

프로야구였다면 두고두고 인터넷에 돌아다닐 법한 장면이었으니 얼이 빠지는 것도 당연했다.

정적.

어안이 벙벙한 타자.

눈만 끔뻑거리는 사람들.

“이야아아!”

“막내 짱이다!”

“푸하하하! 화기중대! 자폭 땡큐요!”

뒤늦게 우리 선임들이 폭소와 환호성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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