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금전사-40화 (40/113)

< -- 40 회: 9장. 서브웨이 스트리트 -- >

9장. 서브웨이 스트리트(1)

숨이 턱에 차올랐다. 젠장. 전신에 스며 나온 땀이 양복을 양껏 적셨다. 왜 안 움직여. 감각을 잃은 발이 질질 끌린다. 잘라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겨우 목적지에 도달했다. 지하로 걸어 들어가는 계단 안에는 시커먼 어둠만이 존재했다.

“젠장 왜 이렇게 된 거야.”

구시렁거리며 계단을 힘겹게 내려간 다음. 추격자가 이제는 따라 붙지 않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한숨을 내쉰다. 안전이 확인되자 자괴감이 몰려온다. 땀과 먼지. 피가 뒤섞여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흩트렸다. 자랑이던 금발 머리는 제 모양을 잃은 지 오래였다.

“말도 안 돼.”

차가운 바닥을 느끼며 퍼져버린 성제는 몇 시간 전을 회상했다. 편의점에서 소유라는 가슴 큰 계집을 납치해오랬더니. 깡패 새끼들이 엉뚱한 고추 달린 녀석을 납치해온 통에. 덜컥 강현 놈의 집으로 쳐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건달이라고 어깨 힘주고 다니는 녀석들 몇이랑 의기양양하게 그 자식 아파트로 쳐들어간 것까진 좋았다. 약을 먹고 문을 부숴버리고 그 자식의 여동생을 들쳐업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 정도까지 당당하게 해버리면 주위에서도 소란스러워도 감히 신고할 엄두를 못 냈다.

그년을 발가벗겨서 묶어놓고 기다리면 유강현 자식이 동생만은 살려달라면서 질질 눈물 짜면서 무릎 꿇고 기어오게 시킬 것이다.

문앞에서 그런 상상을 할 때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도대체 그 새끼집에 무슨 그런 능력자들이 바글바글한 거야.”

문을 박차고 들어간 곳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십 명의 양복 입은 요원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리둥절하고 있던 다른 녀석들은 덤벼든 요원들에 의해 잡혔다.

성제는 구해달라며 멍청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깡패 새끼들을 저주했다. 내가 미쳤다고 그래? 비상구를 향해서 달렸다. 당연하게도 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아무것도 아무 짓도 했으니까. 기껏해야 주거침입 정도 아니냐고 항변할 생각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다음 층의 문을 열고. 그다음 문을 열고. 문을 열고.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순식간에 출입구로 나왔다. 어딘가에 빈집에 숨어 있을까? 라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이번에 잡혀서 조사를 받으면 납치뿐만 아니라. 그간 은연중에 저지른 일들도 드러날지 모른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을 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범죄자들은 당당하게 대중 앞에 무대에 서고. 꼭대기에 앉아 사람들을 호령하고. 뻔뻔하게 공직에 앉아서 사람들을 비웃는다. 왜냐? 그들이 다 빽이 있기 때문이다. 돈 혹은 권력. 혹은 인맥.

그 정도는 아니지만. 성제에게도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체포만 되지 않으면 그곳으로 가면 될 터였다. 어차피 도퍼 질도 오래 할 생각은 없었다.

“에이씨.”

탕하는 소리와 함께 권총이 종아리를 스쳤다. 어느새 쫓아온 요원들이 총을 쏜 것이다. 타는듯한 고통을 느끼며 성제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서 겨우 한숨을 돌린 다음. 재킷 안쪽에 도퍼 카드를 꺼냈다. 이 카드는 통장의 기능도 하지만. GPS를 포함해 각종 전파를 이용해 도퍼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기능도 했다.

“저기있다!”

멀리서 자신을 쫓는 요원의 외침이 들렸다. 구둣발이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에 성제는 미련없이 도퍼카드를 멀리 던져버렸다.

그런 다음. 다시 다리를 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자신을 쫓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지만. 멍청한 요원들은 결정적으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도망치던 끝에 결국 안 잡히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왔다.

성제는 자신의 행운을 기뻐하면서 미친 듯이 낄낄댔다.

잠시 쉰 탓인지. 몸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지나서 내려가니 철조망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 중앙을 출입금지라고 테이프가 가로질렀다. 그 오른쪽 구석에 조그마한 출입문이 보였다.

“다 왔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출입문에 한 발짝 들어서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

조명과 조명. 사람과 사람. 소음과 소음. 생각보다 부산스러운 지하철 내부는 거대한 야시장 같았다. 성제는 힘겹게 발을 끌고 내려왔다. 여기의 주민들은 옷을 겹겹이 껴입었는데 하나같이 낡고 해져서 마치 난민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성제의 모습이 특이한 터라 그들은 성제를 지나치면서 힐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관심을 잃고 물건을 들고 어디론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들은 몬스터가 등장하고 난 뒤 지상에서의 생활을 포기한  채 지하에 몸을 숨겨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이곳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이란 바로.

지금 지상이 안정된 건 일시적인 것이고. 곧 새로운 재난이 다가온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한 번에 휩쓸려 내려갈 것이다.

그 재난을 이곳 사람들은 세컨드 웨이브 라고 불렀다.

성제도 썰을 믿는 부류 중의 하나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믿는 정도를 넘어섰지만.

예전에 들었던 기억을 쫓아서 만남의 광장을 지나서 플랫폼까지 내려가기 전 중간층의 으슥한 곳까지 내려갔다. 거기에 성제가 원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제 낡아빠져서 번들거림은 하나도 없는 은박 돗자리 위에 몇몇 사람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어이 너희 중에 힐러 없나?”

그렇게 말하면서 발끝으로 하나씩 걷어찼다. 하지만 모두 꿈틀대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맨 마지막에 걷어차인 남자가 아 썅! 이라고 외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격정도 잠시 남자는 몽롱한 눈으로 성제를 올려다봤다. 눈 주위는 시커멨고, 초점을 잃은 동공은 탁했다. 중독자의 눈이었다.

“너 힐러야? 응?”

“...아니.”

“원하는 거 있으면 줄 테니까 힐 좀 해줘? 지금 다리가 아파서 뒈지다 못해 이제 감각이 없거든?”

그 말에 그 중독자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성제의 재킷을 가리켰다. 성제는 그걸 보고 냉큼 재킷을 벗어줬다. 그걸 받아 입은 중독자는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도망치느라 땀을 너무 흘린 탓에 성제의 진한 체취가 배어있었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약.”

중독자의 말에 성제는 냉큼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중독자의 입에 털어 넣었다. 몇 번이나 침을 삼킨 중독자는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점을 잃은 눈에 조금은 총기가 돌아온 거 같았다.

“이거 꽤나 좋은 품질인데?”

“그렇지? 도퍼 됐다니까 외삼촌이 보내준 거야. 그보다 어서 힐해줘. 먹튀 할 생각은 아니겠지?”

성제의 말에 중독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었다. 탁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성제의 다리를 감쌌다. 성제는 이내 감각이 돌아오는 걸 느끼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수고했어.”

성제는 앉았다 일어서기를 몇 번 반복해서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 작별인사를 건네는 손끝에서 불길이 흘러나와 중독자들을 향해 날아갔다.

‘쓸데없이 내 흔적을 남길 필요는 없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니 플랫폼에 몇몇 사람들이 피곤한 얼굴로 퍼질러 앉아있었다. 성제는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땅딸막한 뚱보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다음 차는 언제쯤 오나?”

“전철 구경 온 거라면 운이 좋네. 10분 뒤면 도착할 예정일세.”

뚱보가 성제의 말에 능글맞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구경 온 건 아닌데. 내 사례는 할 테니. 좀 태워줘.”

“티켓도 없이 그냥 태워줄 수야 있나. 나도 멋대로 사람을 태우면 안 된단 말이야.”

그렇게 말한 뚱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나도 위험을 감수하려면 그만한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참. 혹시나 모를까 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위쪽의 돈은 우리한테 별로 쓸모없어.”

“그 돈도 없지만. 지금 당장은 개털이야.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례해주지.”

“흥 내가 그쪽을 뭘 믿고?”

“내가 아니라 마영석이 사례해준다.”

“마영석!?”

성제의 말에 뚱보가 숨이 턱 막힌 듯. 놀랐다가 몇 번이나 캑캑거리고서야 겨우 진정했다.

이 서브웨이 세계에서 마영석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몇몇 변화가를 중심으로 지배하고 있는 서브웨이 스트리트중에서 마영석은 국내 최대 규모의 부평 서브웨이를 다스리고 있었다.

부평 서브웨이는 미로와 같은 내부구조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 아래로 증축해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어서 외부에서 점령하려는 엄두도 못 내는 곳이었다.

결국, 놀란 뚱보의 극진한 대접 아래에서 성제는 부평으로 향하는 전철을 탈 수 있었다.

*****

“휴우. 거의 다 왔네.”

부평 서브웨이에 도착한 성제는 몸을 쭈욱 폈다. 지하 몇 층 만 더 내려가면 자신을 위한 극락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지층에 가까운 이곳과 달리 요 아래 십몇 미터만 내려와도 각종 고가의 미술품과 고급가구로 장식되어있고, 그 안에는 헐벗은 여자들이 시중들고 있었다. 예전에 초대 왔을 때는 질펀하게 놀아나느라 삼일간은 술과 여자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도착하자마자 샤워부터 해야지.’

아니. 전처럼 여자들더러 씻겨 달라고 할까? 그런 상상을 하자 음흉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출구를 찾아 걸어가고 있을 때.

인파 속에서 눈에 띄는 소년을 발견했다. 주위의 사람들에 비하면 선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차림의 소년이었다. 백팩을 메고 야구모자에 야구점퍼를 입은 소년은 모자 바깥에 드러난 엷은 갈색 머리와 모자창 아래의 푸른 눈은 외국인인 걸 알 수 있었다.

‘어디 관광하러 왔다가 여기까지 잘못 흘러들어왔나?’

성제는 소년을 보고 슬며시 웃었다. 위에서 놀다가 언제든지 따분해지면 내려오라고 권하던 외삼촌이었지만. 이렇게 쫓겨오듯 와서야 체면이 안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년은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어 보였다.

“꼬마야. 길을 잃었니?”

성제는 혹여 도망갈까 봐 친근한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소년은 성제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길. 잃었다.

소년이 내뱉은 영어가 목 쪽에 달린 마이크를 타고 들어간 다음. 그에 맞는 한국말이 다시 목 쪽의 스피커를 타고 나왔다.

‘오. 자동 통역기? 이런 비싼 걸 들고 다니다니. 제대로 관리받고 교육받은 아이 같은 데? 외삼촌도 좋아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씩 구석으로 끌고 가면서 달래듯 말을 이었다.

“자자 착한 아이지? 잘 들어. 울지 말고. 형이 데려다 줄게.”

-나, 안 울었다.

“그래그래. 안 울었어. 안 울었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울면 안 돼?”

-응.

“자 그럼 가자.”

-어디로?

“널 선물할 곳으로.”

성제는 결정적인 대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이해가 안 돼? 이해 못 해도 상관없지만. 그 고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고 싶으니까. 몇 마디만 더 설명해줄까?”

몸을 숙여 소년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간 성제는.

“이제 넌 내 거고. 곧 내 외삼촌한테 널 넘겨버릴 거라고.”

-그렇다면 적?

“적은 아니지. 적이라고 하기에는 상대가 안 되잖아?”

한숨을 내쉰 성제는 양손을 펼쳤다.

“이거 말로는 안되려나?”

펼친 양손에 각각 스며 나온 화염이 동그란 원을 그리면서 아이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제 겁먹어서 질질 싸겠지?’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성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철컥.

‘철컥?’

서늘한 금속성에 의문을 품기 전에 아이는 어느새 총을 꺼내서 성제의 머리에 겨눴다.

-너 도퍼? 그렇다면 안내해줄 곳이 있어.

“너,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거야? 마영석의 사랑하는 조카라고. 이걸 들키면 그대로 토막 내서 버려질 거야.”

성제는 있는 힘껏 위협을 해 보았지만. 아이에겐 통하지 않았다.

-마영석? 좋아. 네가 안내해야 하는 곳이. 그가 있는 곳이거든.

============================ 작품 후기 ============================

어제부터 몸이 안좋아서 이제야 겨우 써서 올리네요.ㅠㅠ

다음화도 내일 조금 늦게 올라올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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