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9 회: 8장. 그레이 도퍼 -- >
8장. 그레이 도퍼(5)
“지금 고모부가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근데 쪽지에 강현씨 이름이 있어서 먼저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 전화 드렸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소유에게 가능하면 집에 나오지 말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가볍게 넘어가서 될 일은 아니지.’
이번에는 소유로 착각해 남자 알바생을 잘못 납치해 갔으니까 그 남자 알바생은 일이 커지기 전에 풀어줄지는 몰라도. 납치범들이 다시 소유를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남긴 메모를 봐도 납치를 한 목적이 자신을 겨냥한 거였는데, 다음에는 소유뿐만 아니라 동생을 노릴 가능성도 있었다.
꽈직!
강현이 테이블의 한쪽 귀퉁이를 깨트려 버렸다.
그 자식들이 다현이를 해코지한다고 생각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버렸다. 예전에 사채업자들과 싸울 때도 생각했지만 예거를 안 먹은 상태로도 신체능력이 향상되는 걸 느꼈다.
‘이거 혹시 문제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붙은 부스러기를 탁탁 털었다. 어쨌거나 한 방 먹었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누가 무슨 원한으로 시비 걸었는지는 몰라도. 쉽게 넘어가리라 생각마.’
*****
강현은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가벼운 점프를 걸치고 소유에게 들은 약속장소로 간 강현은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펴봤다.
한적한 공터에는 ‘신체 사이즈에 맞춰서 옷을 입는 건 옷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커다란 박스티에 엉덩이에 걸친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내는 개구리마냥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소유가 알려준 납치범들과 인상착의가 비슷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사람이 없는 걸 보고. 품속에서 예거를 꺼냈다. 어제 거대 새 몬스터에게서 도망친다고 예거를 먹고 나서 다시 퇴치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지훈에게 몇 알 받아 챙겨뒀었다.
원래는 사용한 한 알만 받으려고 했는데. 수지가 위급한 상황에 사용하려면 많이 들고 있어야 한다고 해준 덕분에 지훈이 울상을 지으면서 강현에게 다섯 알을 준 것이다. 물론 그렇게 받았다고 해서 공짜는 절대 아니다.
‘약을 들고오지 말라고 했지. 먹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애당초 납치한 쪽에서도 강현이 순순히 약을 먹든 들고오든 말을 들을 거라고는 기대 않았겠지. 강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예거를 삼켰다. 그러자 능력이 활성화되는 걸 느꼈다. 시험 삼아 몬스터 서치를 사용해봤지만. 딱히 근처에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어이.”
몸을 드러낸 강현이 부르면서 다가갔다. 움찔한 사내가 담배를 버리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채 다 일어서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강현이 사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얼핏 보기에는 친근해 보이지만. 힘을 세게 주고 있어서 사내는 그대로 자신이 찌그러지는 것처럼 느꼈다.
“내가 너희가 찾던 유강현인데?”
그 말에 사내가 움찔했다. 고통 속에도 놀랍다는 듯이 강현을 쳐다봤다.
“정말로 올 줄이야...”
“뭐야. 너희들이 사람 납치해놓고선.”
“아, 아닙니다. 전 그런 취향도 존중합니다.”
“뭐?!”
강현이 뒤늦게 사내가 말한 의미를 깨닫고는 무섭게 노려봤다. 사내는 강현의 눈빛에 겁을 집어먹고 시선을 피했다.
“그보다 왜 너 혼자 있어? 다른 사람들은?”
“보스가 잘못 납치해왔다고 난리 쳐서 남자는 풀어줬는데, 이번에는 도퍼와 함께 집에 쳐들어간다고 했어요. 그리고 저더러는 혹시나 찾으러 오면 시간이나 끌라고...”
사내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말을 들은 강현의 얼굴은 분노로 굳었다. 감히 자신의 동생을 노리다니. 뼈와 살을 분리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거기다가
‘도퍼까지 있다고?!’
한치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대로 사내를 내동댕이친 강현은 공터를 벗어나 집으로 달려갔다.
“다현아!”
*****
몇 시간 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납치한 사내들은 자신들이 빈 건물 2층에 자신들이 임시로 쓰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자랑스럽게 납치한 사람이 든 포대를 내밀었다.
“형님. 여기 잡아왔습니다.”
소파에 퍼질러서 양주를 마시고 있던 성제와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반색했다. 사내는 두툼한 지갑에서 지폐를 한 다발 꺼내서 부하들에게 내밀었다.
“그래? 수고했다. 여기 용돈들 해.”
“감사합니다. 형님.
부하들은 함박웃음을 지고 물러나려고 할 때. 사내가 나서서 포대 안을 보려고 다가갔다. 그때 포대 안에서 걸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윽.”
“잠깐. 저 가래 끓는듯한 목소리는 뭐야?”
깜짝 놀란 사내가 포대 안을 열어보니까. 그 안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들이 입고 있는 조끼를 입고 있는 긴 생머리의 ‘남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아이씨.”
사내는 절로 나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고 부하들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누가 이 새끼 잡아오라고 했어?”
“네? 그 편의점에서 일하는 긴 생머리 알바생이라고 하셨잖아요.”
사내의 호통에 부하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팍을 쳤다.
“긴 생머리라고 하면 당연히 여자지 여자!”
“그거 성차별적인 발언 아닙니까?”
“뭐라고 이 멍청한 새끼가.”
결국, 참다못한 사내가 말대답한 부하를 정강이를 걷어찼다. 부하는 욱하고 몸을 움츠렸는데, 사내 분이 안 풀린다는 듯이 계속해서 걷어찼다. 그때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고 있던 성제가 일어섰다.
“그만하고 가자.”
“성제 형님. 어디 가십니까?”
“이왕 판을 벌린 거. 제대로 해야지. 너 강현이 사는 아파트 위치 알지?”
“네. 그거야...”
사내가 부하를 걷어차는 걸 그만두고 성제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이내 그 의도를 눈치챘다.
“설마 여동생 쪽을 납치하려고요? 혹시 그 새끼가 집안에 지키고 있을까 봐 안 건드리기로 한 거 아니에요?”
“그때야 그렇겠지. 지금은 눈이 시뻘게져서 우릴 찾고 있을 거야.”
“저 남자 때문에요?”
사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포대를 쳐다봤다. 결국, 참다못한 성제가 사내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아니. 아무리 호구 새끼라도 성공했든 실패했든 자기 여자 건드리려고 했는데. 가만히 있겠어?”
“아.”
“그 틈을 노려 치려 간다 이거야.”
“역시 성제 형님이십니다.”
자신을 추켜세우는 사내를 보면서 성제는 씩 웃었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면서 손짓을 하며 먼저 나갔다. 그렇게 사내가 따라 나가려고 할 때.
부하가 얻어터진 곳을 어루만지면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형님. 그럼 이 새끼는 어쩝니까?”
“바로 신고 안 하도록 조금만 잡아두면 되니까. 그 뒤로는. 알아서 해.”
“네. 흐흐흐.”
사내의 대답에 부하가 고통을 잊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보고 소름이 돋은 성제가 사내의 뒤통수를 때렸다.
“뭘 알아서 해. 그냥 기절시켜놓은 채로 적당한 공원에 던져둬. 몇 명은 이대로 따라오고”
“...네.”
부하들의 실망스런 대답을 뒤로하고 성제와 사내는 사무실을 나섰다.
*****
“절호의 기회다.”
여느 때와 같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는 채영의 머리 위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멸균실에 오느라 채영은 여느 때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예전과 똑같은 붉은 차이나 드레스를 중년의 여인은 그렇게 선언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큭. 바보 같은 미국놈들. S급 몬스터 코어가 얼마나 귀한 건데. 범죄자한테 도둑맞다니. 잘됐어. 정말. 이번에 그 우리가 그 범죄자를 잡아들어서 뺏어버리는 거야. 안 그래요?”
중년의 여인이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두운 조명 아래 수십 개의 의료기기가 연결된 캡슐이 있었다. 그곳에 앉아있던 소년은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채영이 봤을 때는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었다. 그때부터 몇 달밖에 안 지났을 텐데 봤던 남자아이는 훌쩍 커서 이번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였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였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나도 더는 이곳에 갇혀있을 필요 없지.”
그렇게 중얼거린 소년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본 여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채영을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어서 빨리 대령하도록.”
그 말에 고개를 숙인 채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 클레임이라는 도퍼의 등급은 2등급이나 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 S급 몬스터 코어를 폭탄으로 만들어 들고 다닌다고...”
“그래서 지금 못하겠다고 하는 소리야?”
예상치 못한 말대꾸에 여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채영도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만큼 위험하니까 일단 국내에서 추방하거나. 아니면 바다 쪽으로 쫓아내는 걸 먼저 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채영아.”
소년의 나직한 목소리가 채영의 말을 갈랐다. 그럼에도 채영은 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대인.”
“네가 최우선으로 생각할 것은 이 몸에 관해서다.”
소년이 그렇게 선언함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채영은 조금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찌푸려질 것 같은 몸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꽉 다문 입은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채영은 이 말에 상대가 만족하기를 바라면서 온몸의 힘을 짜내어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 말에 공기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채영은 주변의 평소에 평정을 유지하도록 훈련받았음에도 공포 때문에 식은땀이 온몸에서 스며 나왔다. 덕분에 알몸이었던 채영의 몸이 어두운 조명에 비쳐서 번들거렸다.
소년은 이제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여인은 채영에게 다시 한 번 선언했다.
“쓸 수 있는 말은 뭐든지 써도 좋다. 꼭 S급 몬스터 코어를 이 앞에 가져오도록”
*****
겨우 멸균실에서 나온 채영은 순식간에 옷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출입구의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자신의 사무실이 나왔다.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 위해서 책상에 태블릿 피시를 들었는데. 그 화면에 긴급 메시지가 와 있었다.
-A급 보호관찰 대상지에 침입자가 발생예정
강현의 아파트였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 이어서 계속해서 정보가 덧붙여져 있었다. 침입예정 인원과 각각의 얼굴을 포함한 신상정보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도퍼도 있었다.
‘단순한 도둑은 아니로군.’
현장 요원들에게 출동 명령을 메신저로 내린 다음. 채영은 계속해서 침입자의 정보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침입자 중 도퍼의 얼굴이 익숙한 걸 보고 자신의 두뇌 속에서 그 도퍼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냈다.
원딜포지션의 도퍼 이성제. 분명 연수 때부터 강현과 사이가 안 좋은 도퍼였었다. 그리고 그 도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씩 살펴본 채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차량 준비해 주세요. 저도 출동합니다.”
*****
“후아 이게 다 뭐야.”
부리나케 아파트로 돌아간 강현은 아파트 안에 들어차 있는 요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황급히 자신의 동생을 찾은 강현은 다현이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 요원들에게 음료를 대접하고 있는 걸 봤다.
“다현아. 괜찮아? 이게 무슨 난리야?”
“아 오빠. 이제 왔어? 정말 난리도 아냐. 집에서 청소하고 있는데 저 도둑들이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뭐야. 아니. 그럼 도둑이 아니라 강도인가?”
다현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전신에 불량이라고 써 붙여놓은 듯한 사내들이 두꺼운 밧줄에 포박되어 짐짝처럼 쓰러져있었다. 강현은 그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예전에 강현이 연수받는 동안 집안에 들이닥친 사채업자 중에 한 명이었다.
“앗. 저 새끼가.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응. 강도들이 들이닥치자마자. 채영 언니랑 여기 사람들이 나타나서 다 잡아버렸어.”
“그래.”
다현의 말에 강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천만다행이었다. 강현은 다른 쪽에서 요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채영을 찾아가서 인사를 건넸다.
“채영씨 감사합니다.”
“아뇨. 마침 예전 테스트시 때문에 아직 보호관찰대상으로 등록되어있던 터라 다행이었습니다.”
채영의 말에 납득한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도퍼도 같이 있다고 들었는데.”
“현장에 있었습니다만. 도망쳤습니다.”
난처한 듯이 채영이 말했다. 채영이 이쪽에서 다른 요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도 그 도망친 도퍼의 추적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지금 추격하고 있으니까 곧 체포할 겁니다.”
“나도 잡으러 갈게요. 도퍼 능력자니까 나도 같이 쫓아도 되죠?”
마침 예거도 먹은 참이다. 강현이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채영은 반기기보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같이 갑시다. 도대체 어디로 도망쳤나요?”
다시 한 번 알려달라는 강현을 보고 채영이 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범죄자들의 거리. 서브웨이 스트리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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