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적어도 6억은 받아야지
“제 인생에 아버지란 존재는 없습니다. 인제 와서 혜성 그룹의 회장이 제 아버지라 한들…… 글쎄요.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사실 이건 내 진심이기도 했다.
노사의 지시가 아니었으면 나는 굳이 혜성 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재벌?
나는 26살의 나이로 4억이 넘는 현금을 가진 부자였다.
건실하진 않지만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는 사업체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이런 내가 굳이 혜성 가로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몇 년 뒤에 망하게 될 혜성 그룹인데?
“이한철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당황하던 진봉현 비서실장이 살짝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기업 회장이 만나자는데 당연히 만나야죠. 시간은 언제든 낼 수 있으니 오고 싶을 때 오라고 하십시오.”
만나기는 해주겠다.
하지만 갑은 나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도련님께서 방배동으로 가셔야 합니다.”
“제가 왜요?”
“예?”
“저를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쪽이 찾아와야죠. 왜 제가 갑니까?”
“…….”
노사가 말했던 대로 당당하게 행동했다.
물론 다른 대기업 회장한테는 결코 이런 식의 무례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당당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앞뒤 못 가리면 나만 곤란해진다.
하지만 상대는 혜성 그룹 회장.
내 입장에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한철 회장은 일단 내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상대로 어거지 부린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래야지만 나를 쉽게 보지 않았다. 일방적인 지시를 내릴 일도 없을 것이고.
“혜성 그룹 회장님한테 전해주십시오. 저를 보고 싶다면 직접 찾아오시라고.”
“……알겠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은 침통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긴장돼서 죽을 뻔했습니다.”
(긴장한 거치고는 잘 했다. 첫 모습부터 약하게 보일 필요는 없지.)
“회장은 언제쯤 저를 찾아올까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거든. 자신의 후계자를 한시라도 빨리 찾고 싶을 거다.)
이한철 회장의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분명 남인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가족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 아버지가 무슨 아버지라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했다.
절대 이한철 회장에게 정을 주지 말자고 말이다.
* * *
“녀석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이한철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20대 애송이가 자신 보고 오라 가라 하다니.
자신감이 넘치는 것을 넘어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건방진 녀석이로군.”
하지만 이한성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한창 어려운 시절에는 남몰라라 하더니,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친아버지라면서 나타나면 누가 기뻐할까?
아무리 이한철이 대기업 회장이라도 기뻐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봉현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으냐?”
“한 번쯤 만나봐야 후회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흠.”
고민스러웠다.
그냥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서 관심을 끊을까?
‘그러기엔 그 아이의 능력이 너무 아깝다.’
적어도 사업가 능력은 출중한 것처럼 보였다.
누구의 지원도 없이 그렇게 성장한 것을 보면 말이다.
‘답답하군. 고작해야 26살의 애송이 놈인데.’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끌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부자 관계만 더 나빠질 뿐이었다.
“자네가 보기에 그 녀석, 능력이 있을 거 같나? 내 뒤를 이어도 될 만큼 말이야.”
“일단, 회장님이 아버지란 소리를 듣고서 전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평정심이 남다르신 분인 거 같았습니다.”
“평정심이 남다르다? 나쁘지 않군.”
“또한 직원들의 열기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손님이 왔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작업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그만큼 직원 관리도 잘한다는 뜻이로군.”
“전체적으로 평가해본다면 확실히 범상치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마치 회장님의 젊었을 적을 보는 듯했습니다.”
“봉현이, 자네의 사람 보는 눈은 언제나 늘 정확했지. 자네가 그리 봤으면 분명 그게 맞을 거야.”
이한철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직접 찾아가 보기로.
자존심은 상했지만 급한 쪽은 어디까지나 그였다.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직접 만나봐야겠어.’
부디 그 건방진 태도만큼이나 능력이 출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1982년 5월 7일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금융사기 사건, 이른바 ‘장희자 어음사기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이벤트로 인해 건설주를 포함하여 모든 주가가 하락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늦기 전에 내가 가진 제약주, 전자주 등의 주식을 모두 던지기 위해 태신 정권을 찾았다.
“알겠습니다. 고객님이 보유하신 주식 전부를 현재가로 즉시 처분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이한성 고객님. 고객님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태신 증권의 정현우 대리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어떤 분이죠?”
“배화산업의 대표이신 장희자 사장님이십니다.”
놀랐다.
그 유명한, 아니, 지금 당장은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다음 달이 되면 온 국민이 모를 수 없게 될 장희자가 나를 찾는다니.
“그분이 왜 저를 찾는답니까?”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분이 이 업계의 큰손 중의 큰손이시지 않습니까? 이한성 고객님께서 수익률이 남다르시다 보니 관심을 가지시는 거 같습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물의 관심을 받았지만,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펀드를 만들거나 거창하게 작전을 할 것이 아닌 이상, 유명세를 치러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이 바닥엔 역시 비밀이란 게 없군. 하기야 한 번 주식 매매를 할 때마다 몇 사람의 손을 거치니 당연한 거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가 장희자라는 점인가.’
어차피 5월이 되면 교도소에 수감될 인물이었다.
내 투자 수익률에 관심을 보여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예? 고객님, 그분은 배화산업 대표이십니다. 웬만한 대기업 회장보다 만나기 힘드신 분인데…….”
사회에 있을 날이 한 달도 채 안 남은 사람이었다.
나로서는 굳이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노사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일단 한번 만나봐. 혹시 모르잖아? 너한테 투자해 준다고 현금 건네줄지. 그러면 너는 그 현금을 꿀꺽하면 되는 거야.)
오호.
설득력이 있었다.
정말로 노사의 말처럼 장희자의 돈을 받아낼 수 있다면?
그러면 말 그대로 공돈이 생기는 셈이었다.
장희자는 어차피 10년 넘게 교도소에 있을 테니 후환도 두렵지 않았다.
10년 뒤에는 내가 그녀보다 훨씬 거물이 되어있을 테니까.
“그렇게 대단한 분입니까?”
“예, 그분은 내로라하는 수십억 대의 전주들이 득실거리는 증권가에서도 독보적인 분이십니다. 무려 1백만 주 이상을 사고파는 큰손 중의 큰손이십니다.”
“생각보다 엄청나신 분이군요. 알겠습니다. 대리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장희자 사장님의 명함은 여기 있습니다.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거시면 될 겁니다.”
나는 명함을 받았다.
배화산업 장희자 대표.
수백 억을 넘어 천억 이상의 자금 동원력을 가진 거물의 명함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흥분하고 난리도 아니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의미였다.
물론 장희자의 미래를 알기에 더 여유가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태신 증권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니 집 앞에 못 보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70년대까지 회장님 차로 군림한 도요타 크라운.
지금은 비록 인기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최고급 차로 취급되는 차였다.
(아버지의 차군.)
그 말에 눈을 빛냈다.
드디어, 혜성 그룹의 회장이 찾아왔다.
나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대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대문으로 가니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이한철 회장의 경호원인 듯싶었다.
“내가 여기 집 주인인데, 당신들이야말로 누굽니까?”
“아, 이한성 도련님입니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란하게도 찾아오셨군요. 다음부터는 연락이라도 하고 찾아오라 하세요.”
작게 투덜거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한성아.”
어머니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마중하였다.
지금껏 비밀로 숨겨왔던 아버지의 존재를 예기치 않게 밝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어머니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거실을 바라봤다.
거실에는 50대 후반의 중년 사내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사내는 바로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이한철 회장이었다.
‘누가 보면 집주인인 줄 알겠군.’
거실 중앙에서 양반자세를 하는 모습이 집주인이라도 되는 거 같았다.
“왔느냐?”
말투도 그랬다.
마치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대하듯 퉁명스러웠다.
‘이 사람이 이한철 회장…….’
꿈에서 봤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보니 낯설게만 느껴졌다.
나는 잠시 이한철 회장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혜성 그룹 회장님입니까?”
“네 아비다.”
아버지는 무슨.
혜성 그룹 회장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이한철 회장이 나를 아들로 생각했다면 지금이 아니라 몇 년 전에 찾아왔어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주었어야 했고.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혜성 그룹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다.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명색이 사업가란 놈이, 쯧쯧. 차를 가져온 뒤에 본론을 꺼내야지.”
“제가 가져올게요.”
“어머니는 있으세요.”
주방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떠왔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게 귀한 차를 내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차를 가져왔느냐?”
“맹물입니다.”
“허! 예의가 없구나.”
“선약 없이 찾아오신 분이 예의 타령하는 것은 조금 우습지 않습니까?”
내 말에 이한철 회장은 겸연쩍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쉴 틈도 없이 묻는구나. 그래, 나도 여러 말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 네가 바라는 대로 본론을 말하마.”
이한철 회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굵고 짧게 한마디 했다.
“우리 회사에 들어오거라.”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그냥 말 그대로 우리 그룹에 입사하라는 의미니.”
“제가 왜 혜성 그룹에 입사합니까?”
“내 아들이니까.”
“······.”
“그리고 이번 주 안에 방배동으로 이사하거라.”
회사에 입사하는 것은 기정사실하고서 말하는 이한철 회장이었다.
대기업 회장답게 지독하리만치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싫습니다.”
“뭐가 싫다는 거냐?”
“입사든, 이사든, 다 싫습니다. 제가 왜 회장님의 집으로 이사 가야 하고 회장님의 회사로 입사해야 합니까?”
물론 나는 혜성 그룹에 입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한철 회장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했다.
“거절하는 이유가 뭐냐? 설마 나에게 배신감을 느껴서라는 그런 시시한 이유가 아니길 바란다.”
“배신감이요? 제가 왜 회장님한테 배신감을 느낍니까? 애초에 그런 걸 느낄 사이도 아닌데 말입니다.”
“흠. 그럼 뭐 때문에 그러지?”
“혜성 그룹에 비하면 동네 슈퍼마켓과 다를 게 없겠지만, 저도 하나의 기업을 경영하는 사업가입니다. 굳이 제 사업을 포기하고 혜성 그룹의 말단으로 입사할 이유는 없습니다.”
“말단은 아니다. 네 나이에는 절대 앉을 수 없는 임원 자리에 앉게 해주지. 정확히는 상무이사로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봤자 사장은 아니죠. 저는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좋다. 그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주지. 네 회사, 얼마면 되겠냐?”
“제 회사를 인수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돈이면 안 될 게 없지.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어딘가 노사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하기야 부자 관계니 닮은 것도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리라.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돈도 주고 임원직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죠. 물론 돈을 충분하게 주셔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내 반응에 이한철 회장은 픽 웃었다.
돈을 밝히는 모습을 보이니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1억. 동네 슈퍼마켓을 인수하는데 1억을 주겠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느냐?”
이한철 회장은 당당하게 1억을 외쳤다.
내가 절대 거절할 리 없다는 듯,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6억! 제 회사를 인수하시려면 적어도 6억은 주셔야겠습니다.”
그는 내가 놀라길 기대했겠지만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1억?
내 회사의 가치는 절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나의 가치는 더더욱 그러했고.
그러니 이한철 회장은 적어도 나에게 6억, 아니, 그 이상은 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