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11화 (11/300)

11화 지분이면 킹정이지

하지만 내 말에 이한철 회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 나간 것이냐? 동네 슈퍼마켓을 누가 6억이나 주고 인수해!”

“제 회사만 인수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의 가치가 5억이나 된다는 뜻이냐?”

“당연한 거 아닙니까?”

“허어. 이걸 오만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지금 내 심정이 어떤지 아느냐? 너를 찾아온 게 후회가 될 정도다.”

이한철 회장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의식 과잉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한철 회장의 표정을 보고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제 원래 목표는 20대에 백억 원을 모으고 30대에 승부를 걸고 40대에 재벌 그룹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대 한창일 때 혜성 그룹에 입사하시라고 하시니 적어도 5억 이상은 주셔야 합니다.”

노사가 알려준 손정의라는 사람의 명언.

사실 내 원래 목표는 이보다 훨씬 소박했지만, 적어도 이한철 회장의 앞에서만큼은 포부를 크게 말할수록 좋았다.

이한철 회장 본인부터 포부가 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포부는 마음에 드는구나. 한데, 백억을 모은다? 너무나도 현실성 없는 계획이야. 1억을 더 챙겨줄 테니 그걸로 만족해라.”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제가 보유한 현금만 4억입니다. 제가 반년 동안 번 금액이죠. 이래도 현실성이 없게 느껴지십니까?”

당당하게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낯부끄럽기도 했다.

내 능력도 아닌 걸 가지고 잘난 척을 하고 있으니 비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인제 와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뭐? 현금이 4억이라고?”

재벌에게도 4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혜성 그룹처럼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이한철 회장은 충격을 받은 듯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놀라긴 놀라셨나 보네. 평소에는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분이신데 말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한철 회장의 마음속에서는 나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을 것이다.

이 나이에 4억을 벌었는데 당연히 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말이다. 4억이라니. 너의 사업이 잘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억 단위를 버는 게 가능한 일이냐? 설마 내 앞에서 허언하는 것은 아니겠지?”

“주식으로 번 돈입니다. 작년에 있었던 올림픽 특수 때, 운이 좋게도 몇 배의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식이라…….”

“믿지 못하겠으면 제 계좌를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됐다. 설마 내 앞에서 거짓말하지는 않았겠지.”

이한철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어 준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4억을 벌었다는 게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결과를 말씀해 주시죠. 인수 금액, 어느 정도까지 써주시겠습니까?”

“그대로다. 1억. 드림 패션의 인수 금액은 1억이야.”

보는 눈이 없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내가 어렵게 키운 회사이거늘, 고작 1억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6억에도 팔고 싶지 않았다.

드림 패션에 애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6억도 아니고 1억이라면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혜성 그룹에 들어갈 일은 없겠군요.”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이한철 회장이 손을 뻗었다.

“대신 너의 가치를 다른 것으로 대신해주마. 혜성 건설의 지분 5%. 어떠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혜성 건설의 지분 5%?

이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좋았다.

혜성 건설의 시가총액은 5백억 안팎이었다.

그러면 5%는 25억을 의미하였다.

내 가치를 무려 25억으로 인정해주었다는 뜻.

물론 혜성 건설이 혜성 그룹의 핵심 계열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5%의 지분은 25억보다 훨씬 더 귀하다고 볼 수 있었다.

(5%라. 원래의 나는 2%밖에 못 받았는데……. 확실히, 아버지가 너를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구나.)

자력으로 4억을 벌었다는 게 결정타였을 것이다.

있는 돈 까먹기 바쁜 다른 자식들과 비교했을 때,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과였으니 말이다.

“좋습니다. 그 정도면 저도 만족합니다.”

“계열사는 어디가 편할 거 같으냐?”

“제가 그나마 잘 아는 업종이 의류 쪽입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혜성 모직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흠. 혜성 모직이 우리 그룹의 모태이기는 하나, 현재 우리 그룹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건설이다. 그다음은 유통이나 부동산 임대, 관광 쪽이고. 그런데도 혜성 모직에 입사하겠느냐?”

“커질 대로 커진 계열사보다 아직 규모가 작은 혜성 모직을 제 손으로 직접 키워내겠습니다.”

이한철 회장이 눈을 빛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좋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게 해주지. 드림 패션을 실사하고 인수 절차 마무리까지 한 달을 주마. 한 달 뒤에는 혜성 모직에 입사하도록.”

“예.”

“그리고 이번 주 일요일쯤 가족들한테 이야기할 테니, 그때 방배동으로 이사 오거라. 혜성 가의 가족들을 소개해 주겠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회장님 집으로 이사 가지는 않을 겁니다.”

“뭣이?”

“제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왜 회장님 집으로 이사 가야 합니까?”

“…….”

원래라면 이한철 회장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도 이사를 하는 게 맞았을 거다.

몸이 가까워야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이니.

하지만 이한철 회장은 사사로운 정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집에 산다고 이한철 회장의 마음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남의 집에 얹혀사는 느낌이라 개인적으로 불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면 너는 계속 이 집에 살겠다는 것이냐?”

“안 그래도 강남으로 이사 갈 생각은 있었습니다. 방배동 쪽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대출 낀다는 전제조건에 천만 원 조금 안 되는 돈만 있어도 강남 3, 40평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안이나 편의를 위해서라도 아파트에서 사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인 법이지. 알았다. 이사는 강요하지 않으마. 단, 일요일에는 반드시 와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러죠.”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가족끼리 서로 얼굴도 모르고 지내는 것도 우스운 일.

한 번쯤 인사를 나눠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나는 그들을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녁 식사 시간.

늘 즐거웠던 식사 시간이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어쩐지 우중충했다.

“엄마, 이게 사실이야? 우리 아빠가 혜성 그룹 회장이라는 게?”

“애들아, 지금까지 말 못 해줘서 미안하다.”

“아니, 말도 안 되잖아. 우리 아빠가 대기업 회장이라면 왜 우리는 어렸을 때 가난하게 자란 거야?”

지현이가 어머니를 향해 따지듯 말했다.

그녀로선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나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도 없는 어머니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해. 이한철 회장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

“흥, 사정은 무슨.”

“어차피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이고, 이한철 회장의 가족은 이한철 회장의 가족이야.”

“대기업 회장이잖아. 근데도 달라질 게 없어?”

“어. 그쪽 가족이랑 한집에서 살 필요도 없고, 재벌들처럼 요란하게 살 필요도 없어. 그저 지금처럼 살아가면 돼.”

“재벌들은 정략결혼 같은 거하고 그러잖아. 우리는 안 그래도 돼?”

그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내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는 못할 거야.”

“상대는 대기업 회장인데?”

“…….”

“이거 봐. 오빠도 장담 못 하잖아.”

“정 겁이 나면 김동윤 그놈이랑 당장 결혼하던가.”

“으, 응?”

지현이가 당황하며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는 아직 지현이가 김동윤과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동윤이라니? 그게 누구야?”

“일성 전자에 다니는 회사원이야. 작년부터 사귀던데.”

“오, 오빠! 그걸 말하면 어떻게.”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그걸 감춘다고 무슨 의미가 있다고.

(차라리 잘 됐구나. 김동윤, 그 녀석 제법 괜찮게 보이던데 이참에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동감이었다.

노사가 직접 조사해 본 결과 김동윤은 지현이의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어떤 이유로 헤어지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시점까지 사이가 오붓한 걸 보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터.

그러니 두 사람이 지금 결혼하는 게 지현이의 미래를 위해서 좋을 거 같았다.

적어도 비참하게 버림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어머니에게도 말은 해야지. 상견례 안 할 거야?”

“아직 그 사람에겐 말도 안 했는데, 무슨 벌써 상견례야.”

“결혼하기 싫어?”

“그건 아닌데……. 그 사람이 먼저 프러포즈해야지.”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다가 영원히 결혼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한마디에 나는 급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들아. 그런데 너는 여자친구 안 만드니?”

“…….”

“지현이를 결혼 보내려면 너부터 결혼해야지.”

“맞아, 오빠부터 결혼하고 나한테 뭐라 그래!”

지현이의 반격에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한편, 방배동의 혜성 가 대저택에서도 저녁 식사가 있었다.

물론 이곳의 분위기는 한성의 집과는 사뭇 달랐다.

식구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지만, 빈말로도 화목한 분위기라고 할 수 없었다.

화목은커녕 삭막 그 자체였다.

모두가 아무 대화 없이 식사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식사 시간이 이어질 때, 이한철 회장이 일상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모두 일요일에 시간을 비워둬라. 너희 동생이 그날 저택에 오기로 했다.”

“예? 아버지 동생이라니 그게 뭔 말입니까?”

“하, 하.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기르시려고요?”

아내, 강미경을 제외하면 이한철 회장의 가족들도 이한성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다들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이름은 이한성. 너희와는 이복형제 관계다. 하지만 형제는 형제니, 일요일에 시간을 비워서 만나보도록.”

“……!”

이한철 회장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듣는 입장에선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복형제라니?

그럼 경쟁자라는 뜻이 아닌가.

“아버지. 그럼 그놈도 우리 그룹에 들어옵니까?”

“그놈이라니. 네 동생이다. 똑바로 호칭해라.”

“……그딴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 이한성이란 놈의 거취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준성은 거칠게 말했다.

오늘 그는 지하철 붕괴 사고와 관련해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경쟁자가 출현했으니 더욱더 거북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거취? 내가 말했을 텐데? 이한성도 내 자식이라고.”

“그러면 그놈도 후계 경쟁에 참여한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그렇다. 능력만 있다면 이한성이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

“……아버지! 진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서자 아닙니까. 서자! 다른 재벌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이준성이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러자 이한철 회장이 노기를 띄웠다.

“내 기업에서 내 뜻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건 무슨 상관이야!”

“하, 하지만.”

“시끄럽다! 애초에 네놈이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이익.”

“무능한 놈 같으니!”

이준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한철 회장은 그런 이준성의 얼굴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만히 있던 차남 이재성에게 한소리 했다.

“이재성. 네놈도 마찬가지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그룹은커녕 유산 한 조각 얻지 못할 줄 알아!”

이한철 회장의 노기 섞인 외침에 이재성은 그저 차가운 눈빛을 하며 침묵할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