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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9화 (9/300)

9화 넌 당당해도 된다

물론 냉혈한인 그가 새삼스럽게 부성애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미안한 감정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뿐이었다.

이준성이나 이재성이 제 역할을 해주었다면 이한성을 찾을 일은 결코 없었을 거다.

나중에 죽을 때쯤 현금 자산 정도는 유산으로 물려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능력만 있다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세워야지.”

“……!”

장남 이준성은 허구한 날 사고만 쳤다.

조급한 성격에 고집도 셌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서른 중반이 다 돼가는데도 철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차남 이재성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머리야 조금 좋다지만 회사 경영보다는 사내 정치질에만 몰두했다.

그래서인지 이재성이 지금까지 보여준 실적은 빈말로도 좋다고 못 하는 수준이었다.

실적 면에서는 오히려 불같은 면이 있는 이준성이 더 나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장남과 차남의 수준이 이러하니 이한철로서는 또 하나의 자식인 이한성에게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한성 도련님을 후계자로 세운다면 내외적으로 상당한 반발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내 회사를 물려준다는데 누가 나에게 뭐라 할 수 있겠나? 감히?”

“…….”

“물론 이한성이를 후계자로 세운다는 뜻은 아니네. 그저 가능성만 이야기했을 뿐이지. 그러니 어서 그 아이에 대해 보고해주게. 한성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성공이라. 고작해야 20명도 안 되는 작은 공장이지 않나?”

“지금은 거느리고 있는 직원만 100명이 넘고 매출은 수천만 원 정도입니다.”

“호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매출이 수천만 원이라니.

물론 부채는 어느 정도고 영업이익은 또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봐야 알겠지만, 회사 외양만 보면 범상치 않았다.

“그 아이, 이제 26살이었지?”

“예. 올해로 26살이십니다.”

“26살에 매출 수천만 원의 회사를 일구다니.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거 같군. 20대 시절의 나를 말이야.”

이한철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봉제 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했었다.

혜성 모직.

바로 이 회사로 사업을 시작해서 결국엔 건설과 부동산으로 재벌 그룹을 일구어냈다.

그래서일까?

이한성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일단 만나기는 해야겠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회사 임원까지 한번 시켜봐야겠어. 실력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끔 말이야.”

이상하게 기대가 되었다.

사업 경험도 일천하고 대학 졸업조차 못 한 이한성이지만 적어도 장남이나 차남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줄 거 같았다.

* * *

“최 씨,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어?”

최세진은 진영석 사장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봐야죠.”

“오늘은 날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차라리 이 시간에 다른 일을 해보는 것은 어때?”

경기가 안 좋으면 공장은 가동을 멈춘다.

객공 미싱사가 힘든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공장이 다시 가동될 동안 객공 미싱사들은 실직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제가 10년 넘게 미싱만 했는데 다른 일을 어떻게 합니까.”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잠시만 하는 거지, 뭐.”

“됐습니다. 저는 제가 잘 아는 미싱만 할 겁니다. 그러니 사장님이 공장 좀 찾아주세요. 저를 찾는 공장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제가 이래 봬도 한 실력 하지 않습니까?”

“최 씨 실력은 내가 잘 알고는 있지. 하지만 최 씨는 몸값이 비싸잖아?”

“저 지금 며칠째 일도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니까. 정 급하면 눈을 조금 낮춰봐. 일당 4천 원 정도는 내가 당장이라도 찾아봐 줄 수 있어.”

최세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당 4천 원이라니.

10년 차 경력자가 일당 4천 원 받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빌어먹을. 하루 식삿값만 2천 원은 나오겠건만.’

평화 시장에는 값싼 식당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값싼 식당도 기본적으로 한 끼 식사에 5백 원이 넘게 들었다.

여기에 교통비와 담뱃값까지 치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3천 원 이상은 소요된다.

그러면 남는 돈이 겨우 천 원.

어렸을 때야 이렇게 남는 돈으로 아끼고 아끼며 살았지만, 나이 먹은 뒤로는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4천 원으로는 도저히 먹고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시간만 축낼 수는 없는데…….’

한숨이 나왔다.

이럴 때는 차라리 월급 주는 공장에 들어가고 싶었다.

돈이야 짜게 주지만 매달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메리트였다.

“최세진 씨 맞는가요?”

“누구십니까?”

갑자기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그를 불렀다.

평화 시장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가진 사내였다.

“저는 드림 패션이란 곳에서 나왔습니다.”

명함을 보니 드림 패션 김종태 영업 이사라고 적혀 있었다.

드림 패션은 최세진도 들어본 적이 있는 회사였다.

‘진영석 사장이 무진장 욕했던 회사잖아? 상도덕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물론 그가 아는 것은 그 정도 정보뿐이었다.

객공 미싱사로서 일하다 보니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거기서 저를 왜 찾아오셨습니까?”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 최세진 씨를 추천했습니다. 이 일에 경험이 많으면서 손도 굉장히 빠르다고 말입니다.”

최세진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그는 가난한 노동자였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옷을 제작하는 것에 일조한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실력을 칭찬하는 사내의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를 객공 직원으로 쓰고 싶으시단 말씀입니까?”

“객공 직원이 아닌, 월급제 직원으로 영입하고 싶습니다.”

“월급제요?”

“예. 월급은 12만 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눈을 부릅떴다.

월급제라기에 기껏 해봐야 8만 원에서 9만 원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12만 원이라니.

이 정도면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과 비교해도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한 업계에서 드림 패션만이 하는 타깃 수당제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성과제인데 몇 장을 생산하느냐에 따라 추가로 돈을 버시는 게 가능합니다. 참고로 저희 직원 중에 타깃 수당으로만 6천 원 벌어 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헉!”

추가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최세진으로서는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미 월급제 하나만으로 드림 패션에 입사할 이유는 충분했다.

“입사하겠습니다. 꼭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하하, 감사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내의 호탕한 웃음에 최세진도 누런 치아를 보여주었다.

* * *

“최세진 씨를 포함해서 총 7명의 특급 재봉사를 영입해왔다.”

종태 형의 말에 나는 반색했다.

“형, 고생했어.”

“어휴. 힘들다, 힘들어. 내가 영업 이사인지, 인력 알선소 사장인지 모르겠다.”

“미안미안. 형밖에 시킬 사람이 없어서 그래.”

“돈을 많이 주니 참는 거다.”

“이번 달은 조금 더 챙겨줄게.”

“오. 그럼 나야 좋지. 더 준다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하하하!”

월급만 30만 원.

성과제로 받는 돈도 한 달에 거의 30만 원이니 종태 형이 나에게서 받아 가는 돈은 총 60만 원이었다.

물론 나는 그 돈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60만 원의 값어치, 아니 그 이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종태 형의 역할은 컸다.

“그런데 한성아. 나는 조금 걱정이다. 경기도 안 좋은데 이렇게 직원을 마구잡이로 늘려도 되는 거냐?”

어느덧 1982년 4월이었다.

종태 형이 우리 회사에 취직한 지도 5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그 5개월 동안 우리 회사는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고 있었다.

공장도 벌써 6개로 늘렸고 직원 수는 무려 150명에 달했다.

작년과 비교했을 때 10배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버금가는 성장을 한 셈이었다.

“형이 따온 계약들이 몇 개인데 뭐가 문제야? 노는 인력은 거의 없잖아. 공장 가동률로 따져도 80% 이상이고.”

봉제사를 영입하는 능력도 탁월했지만, 종태 형은 어디까지나 영업 이사였다.

그리고 영업 이사로서의 종태 형은 실로 기대 이상이었다.

명문대라는 학맥을 이용하긴 했지만 5개월 동안 20건이 넘는 오더 계약을 따냈다.

매출로 따지면 거의 9천만 원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뭐 그 오더 계약이라는 게 사실상 적자가 날 정도로 공임이 적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현재 나는 회사의 규모를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가가 낮은 오더도 앞뒤 가리지 않고 받아내는 중이었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이한철 회장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만약 대성 어패럴의 오더가 끊어진다면? 지금도 간신히 흑자를 유지하는데 대성 어패럴과의 계약이 취소된다면 회사가 어려워질 수도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설령 대성 어패럴의 오더가 끊어진다고 해도 몇 달 버틸 자금은 충분히 있어.”

현재 내 증권 계좌에는 무려 4억에 달하는 자금이 들어있었다.

큰손까지는 아니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자금이었다.

더군다나 ‘장희자 어음사기 사건’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벤트를 잘만 활용한다면 몇억 정도는 더 벌 수 있을 것이다.

“흠, 그래?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아서 그리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거야?”

“알잖아. 내가 주식 좀 잘하는 거.”

내가 주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건 종태 형도 알고 있었다.

종태 형도 내 덕에 얼마 벌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별 부정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사장인 네 말을 믿어야지, 뭐. 그래도 이 이상은 조금 자제해줘. 회사 사정이고 뭐고 일단 내가 힘들단 말이다. 이 자식아.”

종태 형의 엄살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종태 형이 아니더라도 더 회사를 확장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충분할 만큼 회사의 몸집을 부풀렸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회장의 관심은 충분히 끌었겠지?’

노사의 말에 따르면 혜성 그룹을 잇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업가 능력이었다.

즉, 이한철 회장에게 사업가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림 패션의 규모는 클수록 좋았다.

회사의 규모가 크다는 건 결국 사업가 능력이 탁월하다는 의미였으니.

* * *

일종의 비서 역할을 맡고 있는 최미영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대기업에서 찾아오셨어요.”

“대기업이요?”

“예, 혜성 그룹의 비서실장분이세요. 지금 바로 만나 뵙고 싶다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혜성 그룹이라는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왔구나. 아버지가 너를 부르러 온 거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 상황이 되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동요하지 마라. 너는 나처럼 억지로 끌려가듯 대저택으로 갈 필요가 없는 입장이야. 상대가 설령 대기업 회장이라 해도, 넌 당당하게 행동해도 된다.)

맞는 말이었다.

상대가 혜성 그룹 회장이라고 해서 꿀릴 게 뭐가 있는가?

나에게는 노사가 있는데.

“불러오시죠. 여기로.”

“예? 아, 알겠습니다.”

최미영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50대 중년 사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자가 바로 이한철 회장의 최측근인 진봉현 비서실장이었다.

“제가 드림 패션 사장인데, 혜성 그룹에서 어쩐 일로 저를 다 찾아오셨습니까?”

나는 상대의 정체도 알고 의도도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태연하게 물었다.

“이한성 사장님을 찾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혜성 그룹의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이 왜 저를……?”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이한성 사장님. 아니, 이한성 도련님의 아버지가 바로 혜성 그룹 회장이신 이한철 회장님이십니다.”

원래라면 기절초풍하듯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한철 회장이 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진봉현 비서실장이 의아해하면서도 대견하게 바라봤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군요.”

“하지만 명백한 진실입니다.”

“그런데요.”

“예?”

“그게 진실이라고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

진봉현 비서실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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