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지금은 인재가 더 중요해
10월 22일.
예상했던 것보다는 살짝 지체되긴 했지만, 납기 일정보단 일주일 일찍 대성 어패럴의 납기를 마무리하였다.
그러자 대성 어패럴의 사장 김휘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3만 장이나 되는 물량을 한 달 만에 소화하실 줄이야. 이한성 사장님의 능력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금테 안경 너머로 감탄의 눈빛이 흘렀다.
그럴 만했다.
직원이라고는 고작해야 20명뿐.
한 달 생산량이 3만은커녕 그에 절반만 되어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 품질까지 신경 써서 납기 일정을 앞당겼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신뢰에 보답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안 그래도 일정이 촉박했는데 이한성 사장님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남미에서의 소식은 신문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대성 어패럴이 남미 섬유 시장에 뿌리를 내렸다던데, 축하드립니다.”
노사의 예언대로 대성 어패럴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값싼 중공 제품이 범람하는 해외 의류 시장에서 큰 실적을 보였던 것.
‘겨울이 되면 수출 규모가 지금보다 더 커진다지?’
아직은 10만 달러.
우리 돈으로 7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수출 실적을 보이었다.
하지만 겨울부터 수출 규모는 빠르게 늘어나 내년이 되면 백만 달러 이상의 의류를 수출하게 될 거다.
내가 대성 어패럴의 줄을 반드시 잡아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신문에서 과장한 겁니다. 하하, 아직은 멀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근데 이한성 사장님이 도와주신다면 신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남미 섬유 시장에 뿌리내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더라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최고의 품질과 납기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늘려볼까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나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입니다. 10만 장도 가능합니다.”
“10만 장이요? 음, 저는 5만 장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휘겸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양승국처럼 간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의 능력 즉, 생산력에 의구심을 표하는 것이다.
“대성 어패럴의 주종 상품이 숙녀용 의류라고 들었습니다. 드림 패션에서도 숙녀용 의류를 자주 맡아왔으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그래도 10만 장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의구심을 표하는 김휘겸에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잠시 저를 따라와 주시죠.”
“예?”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휘겸은 이내 나를 따라왔다.
내가 안내한 곳은 드림 패션 근처에 있는 빈 공장이었다.
“이번에 새로 인수한 공장입니다. 드림 패션의 제2공장이 될 곳이죠.”
“……!”
부채를 인수한다는 조건으로 3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한 공장이었다.
그리 넓진 않지만, 기계를 들이고 직원까지 뽑는다면 10만 장을 넘어 그 이상도 생산이 가능했다.
“대성 어패럴의 후속 오더를 예상하고 공장을 인수하신 겁니까?”
“예. 미리 이전부터 알아봐서 값싸게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실행력이 남다르시군요.”
“대성 어패럴의 성공을 확신했으니까요.”
김휘겸은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이 정도의 행동력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터.
“이렇게 성의를 보여주시니 더 많은 오더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반코트 5만 장, 투피스 5만 장 이렇게 총 10만 장, 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드림 패션이 함께해서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나는 환호했다.
10만 장!
이 정도면 공장 두 개로 돌릴 수 있는 최대 물량이었다.
단가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최상의 오더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제 연말까지 정신없이 공장만 돌리면 되겠군요.”
(무슨 소리. 네가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아, 주식이요?”
그런 것 보니 11월부터 다시 주식에 손을 대야 했다.
지금이야 주가가 계속 하락세였지만, 11월부터는 금리 인하나 경기부양책 같은 이슈가 많았다.
노사가 그런 정보를 다 알고 있으니 고림 건설 때처럼은 아니지만 적잖은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거 같았다.
(주식뿐만이 아니다. 공장을 더 키워야 해. 새로운 거래처도 확보해야 하고.)
“공장을 여기서 더 키운다고요?”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이야 그렇다 치자.
대성 어패럴 한 곳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크니까.
하지만 공장을 키우는 일은 부담스러웠다.
그냥 기계 산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몸집을 부풀려. 마치 엄청난 사업을 하는 것처럼. 드림 패션의 규모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혜성 그룹에서의 입지가 달라질 거다.)
그러고 보면 내년이 대저택에 들어가는 해였다.
내년부터는 조그만 봉제 공장을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가 아닌,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재벌 2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태 형도 올해 안에 영입해야 해. 내년이면 외국으로 가버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한숨을 내쉬었다.
10만 장의 오더를 따냈지만, 여전히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다.
* * *
“내 월급 진짜 감당하겠냐? 20만 원도 아니고 30만 원인데?”
“괜찮다니까. 형의 능력이라면 30만 원도 안 아까워.”
“나중에 뭐라 하지 마라.”
“그럼 우리 회사에 들어온다는 거지?”
“그래 인마. 네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 한성아.”
노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김종태는 원래라면 내년 초에 미국으로 떠났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온갖 고생 끝에 글로벌 기업의 임원으로까지 성장한다.
비록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어쨌든 그의 존재는 한성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종태 형만으로는 부족해. 돈도 돈이지만, 이 녀석에게 조금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
돈이야 11월부터 조금씩 버는 중이었다.
금리 인하 이슈로 많으면 10% 적게는 5%씩 꾸준히 수익을 보고 있었던 것.
현금이 얼마 없을 때라면 수익도 저조했겠지만 지금 한성의 손에는 3천만 원이라는 현금이 있었다.
5%만 되도 무려 150만 원이었다.
10%면 3백만 원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성이 가진 현금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박미란 디자이너부터 영입하는 게 좋겠어. 이제 브랜드를 만들 때가 되었으니 말이야.’
한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재였다.
특히 패션 관련 인재를 확보해야 했다.
물론 드림 패션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드림 패션에서는 디자이너 같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부심 강한 디자이너들이 동대문 근처에 위치한 드림 패션에 입사할 가능성도 없었고 말이다.
디자이너와 패턴사 등은 한성이 혜성 그룹에 입사하고 난 이후에 필요하였다.
한성이 입사하게 될 곳은 혜성 그룹 안에서도 혜성 모직이었다.
혜성 모직에서 실력을 입증하려면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슬슬 정적이 될 임원들의 약점을 찾아내는 일도 해야겠어.’
당연히 혜성 그룹 안에는 적도 있고 아군도 있다.
물론 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장남과 차남을 따르는 임원들부터, 한성을 서자 취급하는 임원들까지.
이미 미래를 겪어본 노사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본인이 직접 움직여서 적의 약점을 알아내고자 했다.
그가 직접 움직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으니.
‘이번 생에서는 그 누구도 우리 가족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어주마.’
* * *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서울 상심 병원.
졸도해서 쓰러졌던 혜성 그룹 회장 이한철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지하철은. 서대문구 지하철은 어떻게 되었느냐?”
“마음의 안정을 취하셔야죠. 회사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건강을 먼저 생각하세요.”
“됐다! 지금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
이한철, 그는 천생 사업가였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그룹의 안위뿐.
그 자신의 건강조차도 혜성 그룹에 비하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왜 아무도 말을 안 해! 지하철 어떻게 되었느냔 말이다.”
“인부가 꽤 많이 상했습니다.”
“꽤 많이? 정확히 몇 명이냐?”
“모두 열 명이 사망했습니다.”
“뭐, 뭐라? 열 명이나 죽었다고?”
3, 4호선의 지하철 공사는 붕괴 사고가 잦았다.
하지만 열이나 되는 숫자가 죽은 적은 이번이 처음.
이한철로선 충격이 없을 수 없었다.
“또한 김인성 이사를 포함하여 박민혁 현장 소장, 이선복 공사 과장 등 다섯 명이 업무상 과실치상으로 구속되었습니다.”
“……정부도 이럴 때는 참 빠르구나. 사고가 벌어지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리고…….”
“뭐가 또 있느냐?”
“이준성 형님도 같은 혐의로 입건되었습니다.”
차남, 이재성의 말에 이한철은 눈을 부릅떴다.
이준성은 그의 장남인 동시에 혜성 건설의 사장이었다.
혜성 건설의 대표까지 입건되었으니 지하철 붕괴로 인한 피해가 생각보다 컸다.
“하아.”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그룹의 사정이 좋지 않은데 하필 이런 사고까지 생기다니.
“아버지, 여론을 생각하면 이준성 형님이 혜성 건설의 사장으로 계속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느냐?”
“어디까지나 그룹의 미래를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형제간에 사이가 좋은 재벌은 별로 없었다.
재계 순위가 높은 재벌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당연히 혜성 그룹도 예외가 아니어서 틈만 났다 하면 싸움이 벌어졌다.
“시끄럽다! 지금처럼 엄중한 시기에 내부분열을 일으켜? 멍청한 놈 같으니!”
“……죄송합니다.”
“닥치고 나가 있어!”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재성이 떠나자 이한철은 한탄했다.
“내가 자식 놈들을 잘못 키워도 한참을 잘못 키웠어. 하나같이 무능하고 욕심만 많으니.”
“아직 젊으셔서 그렇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위로에도 큰 힘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20대 때 사업을 시작했어. 내가 저놈들 나이 때는 이미 기업을 몇 개 만들었을 때라고.”
자수성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한철이었다.
물론 혜성 그룹이 이렇게 크기까지 처가의 도움이 크기는 했지만 말이다.
“봉현아. 진지하게 물어보자. 저놈들이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있을까?”
“……!”
“저렇게 능력이 없는 놈들이 내 뒤를 잇는다면…… 과연 혜성 그룹이 얼마나 갈까?”
“하지만 그렇다고 회장님의 자식이 아닌 이에게 혜성 그룹을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한철을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의 자식이 아닌 이에게 혜성 그룹을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이한성 도련님 말씀입니까?”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한철의 삼남이 바로 이한성이었다.
물론 이한철은 이한성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룹 내에서도 이한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이한성이 그의 자식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