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원수가 조금 많아
(이제는 내 말을 의심하지 않겠지?)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병실을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르신이 안 보이나 보네요.”
복도를 지나 인적 드문 비상계단으로 가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마주쳤다.
하지만 아무도 허공에 붕붕 떠다니는 노인에게 눈길을 두지 않았다.
(그렇더군. 아무래도 나는 너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야.)
“어르신은 어떻게 과거로 돌아오시게 된 겁니까?”
(내가 그걸 알면 신이겠지? 뭐 귀신이니, 신은 신이지만.)
“마지막에 뭘 하셨는데요?”
(차에 치였다. 트럭이었는데, 작정하고 나를 치더군.)
작정하고 쳤다고?
그냥 평범한 교통사고는 아니라는 건가.
“어쨌든 죽어서 과거로 왔다는 거죠?”
(나도 자세한 이유는 모른다. 그리고 어떻게 과거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 무엇을 할지가 중요하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뭐 궁금한 거 있나? 기억나는 거라면 다 대답해주지.)
“우리나라는 언제쯤 통일을 하나요?”
(통일은 못 한다. 내가 경험했던 2023년까지도 말이야.)
42년 뒤에도 통일을 못 한다니.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결혼은요? 저는 누구랑 결혼하게 됩니까?”
꿈속에선 결혼에 관한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인생의 전성기에도 혼자였고 인생의 쇠퇴기에도 혼자였다.
정작 동생의 남편은 꿈속에 나왔는데 말이다.
(그건 말해주고 싶지 않군.)
“예? 아니 가장 중요한 이야긴데 말해줄 수 없다니요?”
(굳이 네가 알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설마 저는 결혼도 못 하는 겁니까? 애도 못 낳고요?”
(알아서 생각해라.)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도 서러운데 결혼까지 못 한다니?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운명은 심각하게 절망스러웠다.
“꼭 미래를 바꿔야겠군요.”
(당연히 바꿔야 한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각해 보니 결혼 같은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정확히 언제 돌아가십니까?”
꿈속에선 날짜 같은 게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 없는 장례식장에서 어머니의 영정 사진과 상주 보는 장면만 잠시 나왔을 뿐이었다.
(내년 겨울. 어머니는 우리 밥 한 끼를 더 먹이기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고생하시다 병세가 심해진다. 그리고 혜성 가의 저택에서 눈칫밥을 드시다 돌아가시게 되지.)
“…….”
어머니를 볼 날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니!
나는 눈가를 붉히며 노인에게 물었다.
“살릴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다. 인후염은 돈만 있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이야. 그리고 내가 있으니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하긴, 미래를 보는 귀신이 옆에 있는데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일단 몸부터 추슬러. 퇴원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그래도 계획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피식 웃었다.
(성격 급한 건 이때도 마찬가지군. 좋아. 알려주지. 근데 사실 내 계획이라고 해봤자 별 거 없어. 우선 주식으로 돈을 버는 거지.)
“주식이요?”
(그래. 아까 올림픽 개최를 이야기했었지? 올림픽 개최지가 한국으로 확정이 나면 시멘트와 건설주의 주가가 크게 오를 거다. 그리고 그중에서 고림 건설이라는 주식이 폭등할 예정이지. 일단 너는 퇴원하자마자 이 회사의 주식을 사면 돼. 그럼 보름 안에 4배는 족히 벌 수 있을 거다.)
백만 원을 투자하면 4백만 원을 번다는 건가?
실로 엄청난 수익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공장을 대신 운영하며 1년 동안 버는 돈이 백만 원도 안 되는데 말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벌써 설레발 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근데 고림 건설은 거기 아닙니까. 혜성 건설을 합병한?”
고림 건설은 나에게 꽤 익숙한 기업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꿈에서 봤는데, 혜성 그룹의 계열사인 혜성 건설을 집어삼킨 기업이 바로 고림 건설이었다.
(맞다. 내 원수 중의 하나지.)
“……원수요?”
노인은 갑자기 섬뜩한 표정을 하였다.
(너의 것이 되어야 할 혜성 그룹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놈들이다. 당연히 원수가 아니겠느냐? 아버지도 그들 때문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고 말이야.)
“······.”
(한 번쯤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이야기를 해주마. 나에겐 원수가 아주 많다. 나를 비롯하여 혜성 가를 몰락시키는데 일조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지. 물론 혜성 가 내부에도 원수가 있고 말이야.)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25년을 살면서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나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원수라니.
혜성 가를 들먹거리는 것도 나로선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혜성 그룹의 회장이 아버지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상태이지 않은가?
(나는 네가 그들에게 복수해주기를 원한다.)
“복수를요? 하지만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복수를 합니까.”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재벌을 상대로 복수라니.
설령 주식으로 엄청난 돈을 번다고 해도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힘은 내가 만들어주겠다. 너는 그저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징치해주기만 하면 돼.)
노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말만 들으면 나를 재벌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권력자로 만들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내가 왜 고림 그룹과 싸워야 해?’
고림 그룹과 원한 관계를 맺은 건 미래의 나지, 현재의 내가 아니었다.
“미래가 바뀌면 그들과의 관계도 무(無)로 돌아가는데, 굳이 복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미래가 어떻게 바뀌든, 내가 그들에게 당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지. 그러니 너는 무조건 그들에게 복수를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악몽을 꾸게 해주마.)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협박이었다.
악몽을 꾸게 한다고?
아까 꿨던 꿈을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현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생생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귀신이지 않은가?
다른 거 필요 없이, 계속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기만 해도 정신병이 걸릴 것이다.
“악몽을 꾸게 해줄 능력이 있으시면 그 능력으로 복수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내 몸은 하나고 원수는 여럿인데 어찌 이걸로 복수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겨우 악몽 꾸게 하는 거로 만족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네가 나를 대신해서 복수를 해줘야 한다.)
“……알겠습니다. 충분한 힘이 생긴다면 어르신의 복수를 돕겠습니다.”
노인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당연히 나는 너의 안전과 성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할 거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알아둬라. 지금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전대환도 복수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전대환이라니!
아무리 힘을 키운다 해도 대통령에게 복수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런 표정 지을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복수해달라고 할 것은 아니니. 전대환은 나중에 민주화가 된 이후에 복수해도 된다.)
확실히 민주화가 된 이후라면 가능할 법도 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뭐 어차피 한참 이후의 일이니, 나중에 고민하자. 지금은 이것 말고도 생각할 게 많으니 말이야.’
노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병실로 돌아오니 누군가가 내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성이. 어디 갔다 왔냐?”
“어, 종태 형 왔어?”
“그래, 인마. 뜬금없이 병원에 갔대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어때, 몸은 괜찮고?”
김종태.
나와 외사촌 관계로, 어릴 때는 거의 친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다.
지금도 친척 중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고.
(종태 형도 오랜만에 보는군. 형이 미국 가고서 통 보질 못했는데 말이야.)
60대 노인이 20대 청년에게 형이라고 부르다니.
참 낯설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노인의 중얼거림을 한 귀로 흘려듣고서 종태 형의 말에 대답하였다.
“멀쩡해. 그냥 살짝 부딪친 거야.”
“오토바이엔 왜 부딪쳐서.”
“갑자기 나타나서 치고 가더라고. 피할 겨를도 없었어.”
“뺑소니야?”
“어. 아직도 못 잡았데.”
“잡을 생각이 없는 거겠지. 짭새 놈들이 뺑소니 사고에 관심을 가지겠냐?”
“아무튼 와줘서 고마워. 이거 나 먹으려고 가져온 거지?”
“그래. 과일이나 많이 먹어라.”
(회사 생활에 관해 물어봐.)
갑작스러운 노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노인이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아마 지금쯤 퇴사에 관해 고민하고 있을 거다. 내가 기억하기로 내년 초쯤에 미국 회사로 이직하거든.)
‘종태 형이 퇴직한다고?’
의외였다.
또래와 비교했을 때,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종태 형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잘 나가는 대기업에 입사한 것.
능력도 원체 좋은 형이라서 승승장구할 거로 생각했기에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형, 요즘 회사 생활은 어때?”
“글쎄. 뭔가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야 할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더라.”
“어떤 게 마음에 안 드는데?”
“일단 조직문화부터 마음에 안 들어. 군대가 따로 없다니까? 윗대가리들은 죄다 꼰대뿐이야.”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종태 형은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그러니 대기업 특유의 조직문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야근도 짜증 나고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것도 짜증이 나. 아마 너도 회사에 다녀보면 알게 될 거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지. 나도 공장이 망해 버려서 회사에 다니게 될 수도 있어.”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미래를 바꾸지 않으면 실제로 있을 일이니 씁쓸하기만 하였다.
“뭔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
“그냥 해본 소리야.”
“실없기는. 아무튼, 멀쩡한 거 같아서 다행이다. 퇴원은 언제냐?”
“모레야.”
“그럼 다음 주쯤에 한잔하기로 하고, 나는 이만 가볼 테니 푹 쉬어라.”
“어. 잘 가.”
종태 형이 떠나자 노인이 불쑥 말을 걸었다.
(나중에 여유 생기면 종태 형을 영입해 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나는 다른 환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재벌이 되려면 인재를 얻어야 하지 않겠냐.)
“종태 형이요?”
(그럼 종태 형만큼 네가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있느냐?)
그건 응당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인재라는 건 신뢰성만 가지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형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나와 상관없는 분야였고, 지금 내 봉제 공장 일에 흥미를 느낄 사람도 아니었다.
“에이, 그래도 종태 형은…….”
(내가 뭐라 했느냐. 내년 초쯤에 미국 회사로 이직한다고 했지?)
“예.”
(그 미국 회사 말이다?)
노인은 내게 은근하게 속삭였다.
(시총이 200조가 된단다.)
“200조요?”
나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200조라니. 신문에서도 잘 보지 못한 단위였다. 어느 나라 방위예산만 한 금액이 아닌가.
하지만 곧 내 얼굴은 파사삭 쪼그라들었다.
“아니, 좋은 회사에 다니게 된다는 건 좋지만, 그게 종태 형이 저한테 필요하단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언뜻 보면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인재다. 시총 200조의 기업에 다니게 되는 종태 형.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좋은 기업에 다닌다는 거지, 그 기업에서 한 자리 할 만큼 위대한 인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노인이 내 말을 가로챘다.
(그래, 이렇게까지 말하면 기껏 해야 좋은 직장 잡은 사촌 형이지.)
노인은 웃으며 내 어깨를 잡았다. 물론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럼 어떠냐.)
곧이어 들린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종태 형이 임원이 되었다면, 그러니까 한국인으로서 미국 기업에 근무해서 믿기지 않을 성과로 임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그럼 어떻겠느냐.)
“그럼······.”
나는 떨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봉제 공장이고 뭐고가 아니라 지금 어떻게든 잡아야죠.”
순식간에 성공으로 가는 길이 뚜렷해진 느낌이었다.
그만큼 미래를 안다는 건,
정말이지 충격적인 장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