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이제부터는 내 싸움이다. (1)
『한국에 계신 축구 팬 여러분! 시청자 여러분! 지금부터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의 국가대표팀 축구 평가전을 사이타마 스타디움 현지에서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중계방송은 6시 30분부터 시작했다.
『우리 교포, 관광객 5천여 명이 본부 중앙석에 자리 잡은 것을 제외하면, 6만 3천 명을 수용하는 사이타마 스타디움이 사무라이 블루 응원단으로 가득 찼습니다.』
TV에서는 ‘니뽄’ 하는 응원 구호와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그 사이에서 애처롭게 ‘대- 한민국!’ 하는 외침이 들렸다.
『선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일본 팀의 선수 소개가 있었다.
하야시 아키히로
후지하루 히로키 쇼지 겐 사카이 히로키 요시다 마야
하라구치 겐키 야마구치 호타루
우사미 다카시 가가와 신지 오카자카 신지
혼다 케이스케
『일본은 4-2-3-1 포메이션을 통해 우리와 맞불을 놓겠다는 전술로 보이네요. 박상민의 자리에 가가와 신지를 넣었구요, 이정렬이 맡은 원톱 자리에 혼다 케이스케를 세웠어요.』
『이에 맞서는 한국 팀의 명단입니다.』
이정렬
김오영 박상민 이재범
선도민 박영길
주길성 김범주 강서준 신준석
정지우
『마지막으로 골키퍼 장갑은 정지우가 끼었습니다. 일본 팀에 비해서 우리 선수들의 평균 연령이 상당히 낮습니다.』
『박용근 감독에 의한 세대교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선수들이 여러 경험을 쌓고 단단해지면 한국 축구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기대가 큽니다.』
라커룸에 들어온 박용근이 팔짱을 낀 자세로 선수들을 쭉 돌아보았다.
“나는 원래 점잖은 사람이라서 다른 이들과 다투는 걸 싫어해. 그건 너희가 모두 알 거고.”
반쯤은 농담이 섞인 말이었다.
딱딱하게 표정이 굳었던 선수들이 억지로라도 웃으려는 얼굴로 박용근의 말을 들었다.
“이 경기가 끝나면 일본은 월드컵 출정식을 가질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가 통쾌하게 이겨 버리면 남의 잔칫상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꼴이지.”
박용근이 픽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FIFA 회장, 부회장, 그리고 아시아 축구 연맹의 회장과 임원들이 죄 모인 잔칫상을 말이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는 김오영의 어깨를 박용근이 편안하게 다독여 주었다.
“내가 국가대표 선배로 너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패했을 때 쏟아질 비난을 감당하는 거다.”
박용근이 이번엔 선도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희는 내가 국가대표를 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실력과 자질을 가졌다. 그 위에 경험을 쌓아라. 그래서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 월드컵 본선은 이보다 몇 배는 힘겹고 두렵게 다가올 거다. 이 정도에 꺾이지는 마라.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재범의 어깨를 툭 쳐 준 박용근이 라커룸을 나섰다.
“김문호 위원님께 들었는데요.”
박용근이 나간 직후였다.
선도민이 주변을 돌아보며 수업 시간에 떠든 사람을 알려 주는 학생처럼 입을 열었다.
“나와구치 부회장이 현역 시절에 위원님 얼굴에 침을 뱉었었대요.”
“부회장? 일본 협회?”
“예. 그때 우리가 일본을 이겼는데요, 그 경기에서 헤딩하려고 점프한 위원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하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감독님과 큰 싸움이 있었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것을 다시 되새길 필요도 있는 거다.
박상민이 시선을 돌렸을 때, 정지우가 천천히 일어섰다.
“내가 부천의 1번 개, 주장 상민이가 부천의 2번 개. 지고 못 살아서 그런 별명이 붙었나 봐. 워낙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니까.”
‘니뽄!’ 하는 외침이 정지우의 말을 막고 싶다는 것처럼 라커룸으로 파고들었다.
“오늘은 못 뛰는 선수가 있으면 내가 콱 물어 버릴 거야.”
이정렬과 신준석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었다.
“긴장돼서 몸이 굳거나 당장 공을 넘겨줘야 할 상황이면 하나만 생각해. 정렬이, 상민이, 준석이에게 일단 넘겨주는 거다. 세계의 스타플레이어들이 모인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한 선수들이다.”
정지우는 시선으로 이정렬을 보았다.
“너희도 정렬이가 어떤 경기에서 골을 넣었는지, 상민이가 어떤 경기에서 어떻게 뛰었는지, 준석이가 어느 정도로 몸값 비싼 선수들을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는지 다 알 거라고 믿는다.”
박상민과 신준석을 차례로 돌아본 정지우가 ‘후-!’ 하고 숨을 토해 낸 다음에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독님이 아버지 같다.”
동기들과 선수들이 놀란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분은 절대 김문호 위원님 얼굴에 침 뱉는 걸 지켜보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고 뛰어 올라가서 네가 그랬다며! 하고 주먹질을 할 수도 없고. 이번 경기에서 일본 팀은 한 점도 얻어 내지 못하게 뛸 거다. 좀 더 고함지르고! 좀 더 악을 쓸 거다!”
선수들이 이를 악무는지 볼이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꿈을 이뤄 드리고 싶다. 부탁한다.”
어쩐지 박상민이 붉어진 눈을 감추느라 얼른 고개를 아래로 향했는데, 그게 또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형.”
김오영이 입을 열었다.
“긴장이 싹 사라져 버렸어요. 저 오늘 사고 칠 것 같아요.”
“얼마든지!”
정지우가 손을 내밀었다.
선후배가 분명한 한국의 팀이었다.
김오영이 악수를 하는 것처럼 상체를 숙이며 내민 손을 정지우가 확 당겼다.
그리고 어깨를 마주 대고 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오! 보기 좋은데!”
신준석이 일어나서 수비수인 김범주에게 손을 내밀었고, 박상민과 이정렬이 주변에 있는 선수들을 비슷한 모양새로 다독였다.
“지우야!”
마지막에 정지우에게 다가온 박상민이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 아버지가 시원할 정도로 복수해 주자.”
녀석이 등을 두드리며 나직하게 건넨 말이었다.
평가전이다.
그런데도 호프집, 한강 공원, 그리고 시청 앞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가까스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 여유 있게 모든 것을 준비한 일본의 대결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예상외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응원 구호와 박수 소리가 아파트 단지에서, 군부대에서, 상점에서 요란스럽게 울려 나왔다.
호프집은 결국 의자를 전부 치우는 바람에 영국의 펍처럼 서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이 돈에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요구한 사항이었다.
이미 정지우의 광팬이 돼 버린 매니저가 사장과 어깨를 걸고 ‘대- 한민국!’을 외쳐 대는 상황이었다.
손님들과 사장, 직원 구분할 것 없이 응원에 열을 올렸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TV 화면에 우리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과 나란히 통로를 빠져나오는 장면이 보였다.
“와아-!”
대개 아파트나 상점에서는 이런 장면에 함성이 터지지 않는다. 이것 역시 호프집만의 특별한 응원 문화였다.
정지우는 박상민의 뒤에서 그라운드로 나섰다.
야간 경기다.
하얗게 빛나는 조명이 그라운드를 밝게 비추고, 6만 석이 넘는 좌석은 온통 푸른 물결이었다.
둥! 둥! 둥! 둥! 둥!
커다란 마고자를 입은 남자가 머리에 하얀 끈을 질끈 두른 채 전통 북을 힘차게 두드려 댔다.
“니뽄!”
둥! 둥! 둥!
“니뽄!”
둥! 둥! 둥!
정지우의 시선 앞에서 5천여 명의 우리 응원단이 악착스럽게 ‘대- 한민국!’이라는 외침을 전하려 애썼다.
뿔 모양의 깜찍한 머리띠를 단 여자아이, 볼에 태극 문양을 그린 남자, 붉은 티를 입은 그들이 6만여 명의 관중들을 상대로 목청껏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FIFA 회장과 부회장, 아시아 축구 연맹 회장과 임원진, 일본 축구 협회 임원, 그리고 김문호와 송인수가 그라운드로 내려와 선수들과 악수를 하며 지나갔다.
일본 팀과 악수를 나눈 귀빈들이 박상민 앞으로 움직였다.
선수들은 손을 내밀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정지우는 일본 협회의 부회장 나와구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달고 있었다. 얕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지우는 씨익 웃어 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양국 국가가 연주되겠습니다.』
먼저 애국가의 순서였다.
정지우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나직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건 예의가 아닙니다! 애국가가 울려 나오는데 응원 구호를 외치는 관중도 그렇지만, 전범기를 들어 보이는 건 상식을 지나 범죄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국가가 연주되는 동안이다. 그런데도 앵커는 멘트를 보내고 있었다.
이어서 일본 국가가 연주되었다.
TV를 통해 지켜보던 한국의 모든 이들이 분통 터질 만한 장면이 또다시 화면에 올라왔다.
관중석 중간의 남자 관중 넷이 전범기를 높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협회 차원에서 국제 축구 연맹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해야 할 것 같네요.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한다면 일본은 절대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극적인 말을 삼가던 해설자도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와아-!”
국가 연주가 끝났다.
양 팀 선수들이 기념 촬영을 했고, 이어서 박상민이 주심 앞에 나서서 동전의 면을 정했다.
동전을 던진 주심이 박상민을 보았고, 박상민이 다시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지우는 오른손 엄지로 본부석 왼편의 골대를 가리켰다.
『화면에서 보시기에 왼편이 대한민국 팀, 오른쪽이 일본 국가대표팀입니다.』
“니뽄!”
둥! 둥! 둥!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박상민을 시작으로 선수들이 어깨를 걸고 상체를 숙였다.
“부탁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내게 공을 넘겨! 누가 공을 잡던 그 근처에 내가 있겠다!”
박상민이 먼저 악을 썼고,
“상민이가 혹시 빈 곳이 있다면 나를 찾아! 감독님이 비난을 감당하신다는 것처럼 지우! 상민이! 준석이! 내가 어려운 상황을 감당할 거다! 가자!”
이정렬이 피가 끓어오른 듯한 고함을 질러 댔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우리를 응원해 주는 국민들을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뛰는 경기다! 가자!”
“가자-!”
정지우의 고함을 끝으로 함성을 지르며 몸을 세웠다.
“와아아-!”
『선수들이 경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골대로 향하는 정지우 선수를 카메라가 계속 따라갑니다!』
정지우는 골대 앞으로 움직여 왼쪽 골포스트에 섰다.
터어엉!
“우-!”
사이타마 스타디움의 6만 일본 관중들이 쏟아 내는 야유가 일제히 정지우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 지켜보세요!’
정지우는 다시 반대편 골포스트로 움직여 평소보다 세차게 걷어찼다.
터어어엉!
“우우우-!”
상관없다. 당신들이 뭐라고 하든.
이제부터는 내 싸움이다.
그라운드에 물을 붓건, 침을 뱉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경기 끝나고 결과로 말하자!
누가 무슨 짓을 하건 내게서 골을 얻어 내지는 못한다!
골대 중앙으로 움직인 정지우는 크로스바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휘이익! 터억!
“우우우우-!”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터져 나온 야유와 다르게 5천여 명의 응원단과 한국의 곳곳에서는 커다란 함성이 울려 나왔다.
양 팀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나뉘어 섰다.
『주심! 휘슬을 입에 물었습니다!』
일본 선수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승리를 다짐하는 고갯짓과 고함을 교환한 직후였다.
삐이익!
“와아아아-!”
『경기 시작됐습니다! 우리 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혼다 케이스케! 가가와 신지에게 패스!』
일본 팀 선수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공을 돌렸다.
『스시타카라고 불리는 일본만의 패스 연결입니다.』
『포메이션을 유지한 상태에서 점유율을 높이구요, 저 상태에서 짧은 연결로 골대 앞까지 밀고 들어가는 건데요! 일본만의 티키타카를 완성했다고 해서 스시타카라고까지 불리고 있어요.』
빠른 패스를 막기 위해 박상민과 김오영, 이재범이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이정렬이 중간중간마다 가로채려 뛰고 있었다.
『일본 팀이 우리 박상민 선수의 마크를 따로 두지 않았네요! 그만큼 이번 평가전에 자신 있다는 전술인 거지요! 전방에 있는 우리 선수들! 정말 잘 뛰어 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공이 쉽게 중앙선을 못 넘고 있거든요!』
『박상민! 공이 있는 곳에 계속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1번 우사미 다카시! 가가와 신지에게! 가가와 신지! 오카자카 신지에게!』
앵커가 패스를 중계할 때였다.
“와아아아-!”
한국의 응원단들이 느닷없이 함성을 터트렸다.
『박상민! 공을 가로챈 박상민! 단독 드리블! 네 명에 둘러싸인 박상민! 그대로 밀고 나갑니다!』
박상민이 독이 잔뜩 오른 얼굴로 일본 선수 넷을 뚫고 달렸고, 왼쪽에서 김오영, 오른쪽에서 이정렬이 수비수를 끌고 바깥쪽으로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