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박 감독님께 감사의 인사라도 하지! (1)
후반을 위해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섰다.
『유니온 시티, 박상민 선수가 나가고 맥슨이 대신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전반의 부상 여파가 남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정확한 내용은 안 나왔는데요, 골 넣는 모습으로 봐서 큰 부상이라기보다는 무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이네요.』
정지우는 곧바로 골대로 향했다.
골대 앞의 잔디 하나까지 친숙하고, 어디쯤에서 공이 이상하게 튄다는 것까지 모두 아는 홈구장 레드 블레이트다.
‘부탁한다.’
정지우는 양쪽 골포스트를 가볍게 찬 후, 중앙으로 움직여 크로스바를 건드렸다.
“예에에에에-!”
커다란 함성이 정지우와 동료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삐이익!
『레믹! 이정렬에게 공을 넘깁니다!』
『4-2-3-1의 2에서 데이빗이 왼쪽으로 움직였구요, 데이빗의 자리에 꼼빠니가 들어갔네요. 데니는 원래 뛰던 오른쪽 날개 자리구요.』
이정렬은 데이빗에게 공을 차 주고 앞으로 움직인 다음이었다.
“레믹! 헤이!”
마틴이 레믹을 불러서 왼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공격 쪽에 있기보다는 아래로 내려와 이정렬과 미드필더들을 도와주라는 의미였다.
마틴에게 박상민의 빈자리가 어떤 느낌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었으며, 한 점의 리드를 잃지 말라는 분명한 지시이기도 했다.
리버풀이 서서히 라인을 올리며 레믹과 이정렬을 압박했고, 이어서 데이빗과 꼼빠니를 노리며 내려왔다.
공을 간수해 줄 선수,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패스를 넘길 선수가 있고, 없는 것의 차이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라파엘! 라파엘!”
정지우는 라파엘을 부른 뒤에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후반 정규 시간만 45분이다. 거기에 추가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이대로 밀리는 것보다는 아예 맞붙는 게 차라리 나았다.
콰악! 와락!
양 팀 선수들이 거칠게 부딪쳤다.
공은 삽시간에 유니온 시티에서 리버풀로 넘어갔고, 다시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넘어왔다.
리버풀의 압박은 대단했다.
그들은 유니온 시티 동료들 이상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박상민을 흉내 내는 것처럼 달리고 달렸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계속 공이 오갔는데 당장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는 않았다.
정지우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건 건너편 끝에 서 있는 미놀레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역시 공이 건너갈 때마다 로브렌과 사코에게 악을 쓰며 수비수들을 일깨웠다.
퍼어어엉!
데이빗이 기다랗게 걷어 낸 공을 리버풀의 밀너가 잡았고, 데니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콰악!
데니와 밀너가 부딪치는 틈에 이정렬이 뛰어들었고,
콰다당!
두 선수 사이에 낀 밀너가 넘어지자,
삐이익!
주심이 날카롭게 휘슬을 불었다.
벤치 위의 관중석에서 이정렬의 부친은 입에 힘을 꾹 준 채 경기를 지켜보았다.
아들은 스트라이커다.
4-2-3-1의 가장 앞에서 기회를 노리거나, 혹은 4-4-2의 왼쪽을 맡아 골을 노리는 전형적인 골잡이였다.
그런데 아들은 마치 미드필더처럼 뛴다.
가능성은 있지만, 늘 활짝 피지 못했던 아들.
좀 될 만하다 싶을 때 하필이면 정지우와 박용근의 문제가 터져 주춤했었던 아들.
“헤이! 데니!”
눈앞에서 아들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공을 달라고 손짓하고, 1톤 트럭처럼 단단해 보이는 외국 선수들과 몸싸움도 마다치 않는다.
관중석에서 직접 보고 나서 분명하게 알았다.
TV 중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도 분명하게 보였다.
공이 없는 상황에서는 패스의 방향을 타고 빈 곳을 향해 뛰어들며, 치고 달릴지, 아니면 바로 넘길지를 아는 선수가 되었다.
콰악! 와락!
어깨로 부딪쳐도 밀리지 않고, 상대 선수의 거친 손길쯤 확실히 뿌리치며 달린다.
늘 바랐던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토록 상상했었던 아들의 모습을 오늘 이정렬이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이래서였냐?
이걸 보이고 싶어서, 이걸 몰라주어서 아비인 내게 그토록 모질게 대들었던 거냐?
아쉬움도 있었다.
아들인 이정렬이 아무리 부지런히 달려도 박상민의 빈자리를 메우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이건 솔직히 공격수나 수비수의 잘못은 아닌 거다.
이럴 때 한 골이 더 들어간다면 리버풀의 사기를 완벽하게 부러트릴 텐데, 그렇다면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승기를 분명하게 손에 거머쥘 텐데.
퍼어어엉!
리버풀의 공이 오른쪽으로 깊게 들어왔다.
“와아- 아!”
라인을 바짝 올린 유니온 시티의 오른쪽이 단박에 뚫릴 만큼 기가 막힌 연결이었다.
투욱! 툭툭!
공을 받은 루카스가 빠르게 달렸고, 피르미노, 랄라나, 엠레찬이 일제히 골대로 뛰어들고 있었다.
퍼어어엉!
루카스가 골대를 향해 날카롭게 연결한 공이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퍼어엉!
달려들던 엠레찬이 그대로 슈팅으로 연결했다.
논스톱 슈팅은 위로 뜨는 듯하다가 뚝 떨어지며 구석을 파고들었다.
꼼짝없이 골이다! 저건 도저히……!
이정렬의 부친은 목과 볼이 서늘하게 굳으며 소름이 쫙 끼쳤다.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여긴 그 공을 향해 정지우가 날고 있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터어억! 털썩!
“예에-!”
공이 오른쪽 앞으로 튕겨 나갔을 때 랄라나가 달려드는 게 보였다.
이정렬의 부친은 반쯤 일어났다.
‘막아라! 막아!’
퍼어엉! 화아아악!
두 주먹을 꽉 움켜쥔 부친의 팔뚝에 또다시 소름이 쫙 끼쳤다.
터엉!
겨우 일어선 정지우가 왼손을 쭉 뻗어 공을 쳐 내는 장면을 본 직후였다.
“예에에에에에에-!”
세계적인 수준, 어쩌다 보았던 세계적인 팀의 그 유명한 골키퍼들이 보여 주던 그런 모습이었다.
‘네가? 네가 그런 선수였단 말이냐?’
퍼엉!
라파엘이 걷어 낸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와 중앙선 중간쯤에 떨어졌다.
투욱!
공을 잡은 것은 이정렬이었다.
‘걷어 내! 정렬아! 실수하지 말고 걷어 내!’
부친의 간절한 바람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이정렬은 공을 짧게 찔러 넣었다.
투욱! 툭툭!
오른쪽에서 공을 받은 데니가 리버풀 진영을 향해 악착같이 달렸다.
중앙에서 레믹이 좀 더 앞에 있었고, 공을 찔러 준 이정렬은 레믹의 뒤를 죽어라 쫓는 것처럼 달린다.
애처롭다. 원톱 스트라이커인 레믹의 뒤를 따라 저렇게 뛰어가 봐야 아들은 슈팅 기회를 얻기 어려운 거다.
“예에에에에에-!”
유니온 시티의 역습에 귀가 터질 것처럼 커다란 함성이 울려 나왔는데, 부친의 눈에는 이정렬만 보였다.
투우욱!
데니의 선택은 역시 레믹이었다.
그의 패스는 이정렬의 부친이 보기에도 환상적이었다.
정말이지 멋진 패스가 리버풀의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흘렀고, 레믹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로브렌과 사코가 레믹의 앞을 막고 있지만, 골잡이라면 저럴 때 슈팅을 주저하면 안 된다.
아쉽다. 아직도 레믹의 뒤를 악착같이 따르는 아들이 안쓰럽다. 중앙선 저 너머에서 골대 앞까지,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는데…….
투우욱!
이정렬의 부친은 세 번째로 소름이 쫙 돋았다.
수비수 둘을 앞에 둔 레믹이 왼쪽으로 몸을 홱 틀며 오른편으로 공을 흘린 거였다.
로브렌과 사코가 레믹을 따라 왼편으로 휘청할 때,
퍼어어어엉!
달려든 이정렬이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강한 슈팅을 날렸다. 오른발을 얼마나 커다랗게 휘둘렀는지 아들의 몸이 붕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빨랫줄처럼 공의 궤적이 기다랗게 늘어졌다.
아름다운 슈팅이었다.
화아아악!
골키퍼 미놀레가 몸을 날렸을 때, 반쯤 일어서 있던 이정렬의 부친은 그라운드로 튀어 나갈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공은 아직도 골대를 향하고, 미놀레 골키퍼는 악착같이 손을 뻗고 있는데 허공에 붕 떴던 아들은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세 장면이 또렷하게 모두 보인다 싶은 직후에,
철러- 엉!
골대 그물이 커다랗게 울렸고,
털썩!
미놀레 골키퍼가 바닥에 떨어졌으며,
“예에에에아아아아-!”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거센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뒤덮었다.
“Lee! Lee!”
열광하는 관중들 앞으로 달려온 이정렬이 높다랗게 뛰어올랐다.
벤치 앞에서 마틴이 연신 주먹을 뻗어 내고, 박상민과 서브 선수들이 양손을 치켜들었으며, 스태프들이 벤치 바깥으로 뛰어나가 얼싸안고 뛰었다.
이정렬의 부친은 시선을 돌렸다.
박용근이 그 누구보다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정지우는 박상민처럼 양손을 움켜쥐고 이정렬의 골을 기뻐하고 있었다.
털썩!
이정렬의 부친은 벤치에 거칠게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저런 아들의 앞길을 제대로 막을 뻔했다.
전에 이적을 준비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아들의 모습을 보며 확실하게 알았다.
무슨 짓을 했던 건지.
“후우-!”
나직하게 숨을 내뱉은 이정렬의 부친은 멍한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신준석과 이마를 맞대고 기뻐하는 아들에게 감독인 마틴이 손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투욱!
‘이놈아! 박 감독님께 감사의 인사라도 하지!’
마틴의 손을 치며 달려가는 아들을 보며 이정렬의 부친은 불쑥 솟아나는 아쉬움을 꿀꺽 삼켰다.
정지우는 레믹을 향해 양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늘 골에 집착하던 그가 결정적인 순간을 양보했다. 개인보다 팀의 승리를 위한 선택이었다.
리버풀 선수들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떨구고 중앙선 앞에 모였다. 두 골이 그들의 기를 완벽하게 꺾어 버린 모양이었다.
저런 팀이 아니었다.
세 골, 네 골을 뒤져도 악착같이 달려들던 팀이었다.
삐익!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마틴의 선택은 안정이었다.
두 골을 앞선 상태에서 무리하기보다는 단단하게 포메이션을 유지하다가 역습을 노린다는 지시였다.
자칫하면 리버풀의 기를 살려 줄 수 있는 선택이었데, 그들의 꺾여 버린 사기가 문제였다.
거기에 리버풀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이끌 리더가 없었고, 유니온 시티 동료들은 해 보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퍼어엉!
데이빗과 꼼빠니가 걷어 낸 공을 맥슨, 이정렬, 데니, 세 사람이 악착같이 받아 냈고, 레믹은 그 공을 반드시 슈팅으로 마무리 지었다.
시간이 급해진 팀의 특징은 공중볼이 많아진다는 거다. 다음으로 중거리 슈팅도 늘어난다.
리버풀이 한 골이라도 만회한다면 분위기가 싹 달라질 수 있지만, 이런 공중볼은 아쉬움만 남기고 끝난다.
퍼어어엉!
페널티 에어리어 왼편에서 엠레찬이 강하게 찬 공이 골대를 한참 지나 위로 넘어갔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어 벤치를 가리켰다.
『리버풀, 두 선수를 동시에 교체합니다. 14번 헨더슨을 빼고 9번 벤테케를, 조금 전에 슈팅을 날렸던 23번 엠레찬을 대신해서 24번 앨런을 투입합니다.』
『두 선수 정말 많이 뛰었거든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공격 일선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지로 보이네요.』
『양 팀 모두 두 명의 선수를 교체해서 한 장의 교체 카드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두 선수가 그라운드로 들어서자 주심이 정지우를 손으로 가리켰다. 경기를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두 골이나 앞서고 있다. 그러니 서두를 이유 하나도 없다.
정지우는 두 걸음쯤 뒤로 물러난 뒤에 공을 향해 움직였다.
또 하나의 승리가 추가 시간을 계산해도 15분쯤 남은 거였다.
투욱!
정지우는 라파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수비 라인을 올려서 미드필드 지역을 촘촘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반대로 공격 라인이 내려오는 법도 있는 거다.
마틴의 지시에 따라 맥슨, 이정렬, 데니가 평소보다 라인을 내려서 데이빗과 꼼빠니를 도왔다.
수비 라인 4명, 그 앞으로 데이빗과 꼼빠니, 이어서 다시 앞에 세 선수가 촘촘하게 서 있는 틈을 뚫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두 골이나 뒤진 채 15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퍼어어엉!
그 촘촘한 틈을 넘기기 위해 리버풀은 계속 공중볼을 날렸고, 정지우는 매번 어렵지 않게 공을 품에 안았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승리의 여신이 하늘거리는 옷자락으로 유니온 시티를 감싸는 느낌이었다.
휘이이익!
정지우는 데이빗을 향해 공을 던져 주었다.
공은 동료들 틈을 돌다가 레믹에게 연결되었고, 레믹은 이리저리 몰고 다니다가 뻥 하고 뒤로 빼 주었다.
리버풀 선수들, 특히 새로 들어온 벤테게와 앨런이 악착같이 달리며 동료들에게 손짓했지만, 이미 승부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또다시 날아온 공중볼을 정지우가 받았다.
흥분해서 달려드는 앨런을 피해 오른쪽으로 천천히 달린 정지우는 꼼빠니에게 공을 기다랗게 던져 주었다.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의 거센 응원을 뒤로하고, 리버풀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일 때였다.
삑! 삑! 삐이이익!
“예에에에에에에에-!”
리버풀과의 경기가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