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박 감독님께 감사의 인사라도 하지! (2)
『영국 프리미어리그 소속 유니온 시티가 우리 시간으로 오늘 새벽에 있었던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2 대 0으로 승리했습니다.』
TV의 아침 뉴스에서 첫머리에 나올 정도로 유니온 시티의 경기는 한국에서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로써 유니온 시티는 자력 우승까지 승점 14점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 정지우는 리버풀전에 이어 또다시 무실점의 선방으로 유니온 시티의 무패 행진을 이어 갔습니다.』
리버풀 선수들의 슈팅을 막아 내는 정지우의 모습이 연속해서 화면에 올라왔다.
『이 경기에서 박상민이 결승골을, 이정렬이 추가골을 기록해 우리 선수들이 두 골을 합작했으며, 레드 블레이트 관중석 곳곳에서 태극기가 보일 정도로 우리나라의 인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박상민과 이정렬이 골을 넣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마다 화면 저 멀리에서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섰고, ‘예에에에에-!’ 하는 함성이 배경 음악처럼 터져 나왔다.
『무려 5천 배가 넘는 승리 배당에 유니온 시티 전체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유니온 시티가 사흘 뒤에 이어지는 아스널과 맨시티의 고비를 넘는다면 승리의 9부 능선을 넘는 것이란 평가입니다.』
레드 블레이트 앞 광장에 선 기자가 보도를 마친 다음이었다. 화면이 앵커를 잡아 주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일본 축구 협회가 우리나라에 친선전을 제안했습니다. 이미 2년 전부터 외국인 감독을 영입한 일본의 제안에 우리 협회는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석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일본팀의 월드컵 예선전 모습이 화면에 올라왔다.
『우리와 달리 오랜 기간을 제대로 준비한 일본이 월드컵 진출을 기념해 평가전을 겸한 친선 경기를 제안했습니다. 박용근 감독을 국가대표로 선임한 우리 축구는 아직 명단조차 발표하지 못한 상태여서 예의에 어긋난 제안이라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일본 국가대표 감독이 기자들 앞에서 웃는 모습이 나왔다.
『우리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일본 축구가 우리를 제물로 삼아 분위기를 띄우려는 계산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의 협회 건물 앞에 선 기자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 장면이 이어졌다.
『우리 협회는 언론을 통해 친선전을 제안한 일본 협회에 아쉬움을 표했으며, 공식적인 절차가 온다면 고려해 보겠다는 입장입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물가 상승률 심상치 않다’라는 제목이 화면 아래로 떠올랐다. 앵커가 국내 물가 변동에 관한 보도를 하는 것으로 스포츠 소식을 마쳤다.
리그에 속한 선수들은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하나쯤 있는 게 좋았다. 특히나 영국 리그처럼 경기 일정이 사흘 간격으로 이어질 때는 육체적 피로만큼이나 정신적 피로를 풀어내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팀마다 선수들의 정신적 고통을 상담하는 의료팀이나 스태프가 있는 이유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아프냐?”
정지우가 보는 앞에서 신준석이 박상민의 발목을 장난스럽게 찔렀다.
“네가 아프니까 나도 아프다!”
신준석의 유쾌함이 때로는 웃음을 만든다.
“지우야! 점심!”
배가 어느 정도 나온 신윤희와 이정렬의 모친까지 가세해서 푸짐한 점심이 준비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정지우는 동기들과 함께 사양할 것 없이 식사를 즐겼다.
라면과 즉석밥이 소중했던 삶에서 동기들과 함께 순두부를 즐기는 수준까지는 온 거였다.
순두부찌개를 즐기는 동기들과 달리 정지우는 조개나 멸치국물에 풀어 넣은 순두부를 양념간장으로 간을 맞춰 먹었다. 당연하게 박용근을 따라 익힌 입맛이었다.
빡빡한 일정에서 이런 식단이 주는 위로는 작지 않았다.
푸짐한 점심을 먹은 뒤에 정지우는 동기들과 소파에 둘러앉아 아스널의 경기를 보았다.
리저브 팀을 맡은 박용근이 오후 5시경 퇴근할 거고, 저녁을 먹고 나면 지금 보는 장면들을 기억했다가 질문한다.
아스널과 맨유의 경기를 보고 난 다음이었다.
“너는 데이트 안 하냐?”
신준석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이번 주는 병원 스케줄이 바쁘다고 해서 아스널 경기 뒤에 연락하기로 했다.”
“햐! 너는 정말 모른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런 때 딱 찾아가서 보고 싶어 잠깐 들렀어, 하고 한마디 해 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돌아서 오면 ‘어머! 우리 지우 씨!’ 하고 감동 먹는 거야.”
“병원까지 가서?”
“그럼 병원에 있다는데 당연히 병원으로 가야지.”
“거기까지 가서 고작 보고 싶어 잠깐 들렀어, 그 한마디 하고 오라고?”
“하아! 문제다! 문제! 여자 마음을 이렇게 몰라서야!”
신준석이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얼굴로 이정렬과 박상민을 돌아보았는데, 박상민은 정지우처럼 뭐하러 그런 짓을 해야 하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정렬은 좀 더 심해서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아스널의 다른 경기 영상을 플레이어에 꽂아 넣고 있었다.
경기 영상이 올라오자 화제는 바로 축구로 이어졌다.
지켜보던 전은주와 이정렬의 모친이 잔잔하게 웃으며 정지우와 동기들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오후에 박용근이 퇴근해서 함께 저녁을 먹었고, 당연하게 소파에 앉아 경기 장면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박상민이 아스널전까지 휴식하기로 해서 이정렬과 신준석의 질문이 평소보다 많았다.
이정렬과 신준석이 돌아갔고, 박상민이 자러 올라간 다음이었다. 방에 들어온 박용근은 김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김 감독?”
[그래. 이제 좀 한가해졌어?]
“바로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어서 그걸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걸렸어. 느긋하게 전화하기는 이 시간이 가장 편하거든. 전화 늦어서 미안해.”
[그렇게 따지면 내가 미안하지. 게다가 아직 선수 구성도 안 돼 있는데 일본이 덜컥 친선전을 제안해서 일이 더 꼬여 버렸지. 아직 발표는 안 했는데 일본 협회가 오늘 공문을 보내왔어.]
관련 서류를 만지는 모양인지 전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건너왔다.
[오늘 예선전을 기준으로 선수 명단과 자네가 말했던 경기 영상들을 항공편으로 보냈으니까 이틀 뒤쯤 도착할 거야.]
“음, 받으면 살펴보고 전화할게.”
[박 감독.]
김문호가 어렵게 박용근을 불렀다.
[일본하고 친선전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박용근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이런 건 정말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와구치 알지? 우리한테 지고 나서 눈물 흘리던 선수.]
박용근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익히 알 김문호였다. 그런 그가 계속해서 한일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부회장이더라구. 아마 자네와 나에 대해 남았던 감정을 이 기회에 털어 내고 싶은 모양인데…….]
“김 감독, 아무리 그래도 우린 아직 명단조차 결정 못했어. 예선전에 뛰었던 선수들을 기준으로 선발한다고 해도 최소한 손발을 맞춰 볼 시간이 필요하고.”
[알지.]
김문호의 풀 죽은 음성을 들으며 박용근은 탁상용 달력에 시선을 주었다.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다.
한국쯤 세 골 차로 이길 수 있다고 떠들어 대던 나와구치가 부협회장의 자리에 앉았고, 김문호가 그의 공문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하마터면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을지 모를 정도로 격렬한 경기였다. 그때 박용근의 목을 악착같이 끌어당기던 사람이 전화기 건너편에 있는 김문호였다.
[미안해, 박 감독. 그런데 난 아직도 그 친구의 그 야비함이 안 잊힌다. 지금도 그렇잖아.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틈을 타서 콕 찌르는 것처럼 언론에 친선전 제안하고 여유 부리는 거.]
박용근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결정적인 찬스에서 높다랗게 뜬 김문호의 얼굴에 침을 뱉던 나와구치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헤더를 따내기 위해 솟구쳤을 때, 팔이나 팔꿈치를 거칠게 휘두르는 세상이다. 20년쯤 전에는 점프한 선수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별짓을 다 했는데, 침을 뱉는 선수는 처음이었다.
박용근이 단박에 달려들었고, 김문호가 악착같이 말렸었다.
15분 뒤에 김문호의 어시스트를 받은 박용근이 골을 넣을 때, 나와구치는 뾰족하게 세운 엄지로 박용근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했었다.
그래 놓고 졌다고 그라운드의 잔디를 움켜쥔 채 울던 선수.
“김 감독,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 먹었냐?”
[난 아직 아닌가 봐. 나와구치가 기자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걸 보면서 분통이 터지는 걸 보면.]
“그때는 나 잘 말려 놓고 이제 와서 왜 그래?”
[동대문 1번 개가 눈이 하얗게 변해서 달려드는데, 그럼 그걸 그냥 놔둬? 그것도 나 때문에 그런 건데?]
김문호의 대꾸가 나온 뒤로 둘이서 비슷하게 웃었다.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고, 이어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달려들어서였다.
[일단 천천히 준비하지, 뭐. 보내 준 자료 먼저 살펴. 자네 부탁대로 추리니까 명단에 올라간 선수만 백 명이 넘더라. 하여간 좀 편하게 갈 때도 있어라.]
이후로 선수 선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쯤 더 통화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
이틀 뒤에 벌어진 아스널과의 경기는 뜻밖에도 유니온 시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레믹이 두 골, 꼼빠니가 한 골을 더해 3 대 0으로 끝났는데, 이정렬은 어시스트 2개를 기록했다.
유니온 시티가 잘했다기보다는 아스널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스스로 무너져 내려서 나온 결과였다.
총체적 난국, 아스널이 보인 경기력을 영국 스포츠 매체는 그렇게 표현했다.
하기야 정확하고 빠른 패스, 둘 혹은 3명의 선수가 손으로 던진 것처럼 짧게 공을 주고받으며 파고드는 아스널의 특징이 전혀 나오지 않은 경기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더군다나 결정적인 두 번의 기회에서 정지우가 어처구니없어 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슈팅이 나왔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박상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중앙에서 박상민이 단단하게 틀을 잡아 주었다면 분명 한두 골쯤 더 나왔겠구나 싶은 경기이기도 했다.
일요일에 회복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모처럼 데이지를 만났다. 다음 경기는 꼭 일주일 뒤인 2월 14일 일요일에 있는 맨시티와의 원정 경기였다.
2월 21일에 FA컵 경기가 있어서 유니온 시티는 28일 노리치 시티와의 경기 때까지 제법 여유도 있었다.
데이지는 두툼한 패딩 점퍼에 스웨터, 그리고 면바지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그녀가 머리에 쓴 털모자였다.
“이상해요?”
“아뇨.”
이상하다고 솔직히 말할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닌 거다.
둘이서 정지우가 선물한 승용차를 타고 언젠가 갔었던 언덕으로 향했다.
2월은 아직 춥다.
데이지가 보온병에서 따뜻한 홍차를 따랐고, 둘이서 차에 기대 함께 마셨다. 코가 빨개져서 웃는 데이지를 보며 정지우는 겨울 속에서 봄을 떠올렸다.
최근에야 데이지는 아팠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서 정지우에게 보여 주었다.
입양, 차별, 그리고 다르게 생긴 사람들 틈에서 힘겨웠던 어린 시절.
“그럼 양부모님은요?”
“런던에 살고 계세요. 좋은 분들이에요.”
정지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이 릴리를 지켜 주겠다고 병실 앞에서 팔을 널따랗게 펼쳤을 때 정말 부러웠었어요. 그때 당신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몰라요.”
힐끔 시선을 준 정지우가 멋쩍게 웃자 데이지가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Ji, 우리 양부모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어요?”
“런던에 가야 하는 건가요?”
“아뇨. 일정을 봐서 한번 오신다고 했어요.”
정지우는 경기 일정을 데이지에게 알려 주었다.
오가는 차 안에서, 그리고 추운 언덕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전혀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혹시 다른 나라로 이적할 수도 있는 건가요?”
대략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였다.
데이지가 궁금한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생각 못해 봤는데요.”
대답을 하고 난 다음에야 정지우는 질문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의사인 데이지에게 다른 나라로의 이적과 그에 따른 생활은 많은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거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프로 선수가 다른 나라로의 이적을 절대 하지 않을 거란 장담을 하기는 어렵다. 막말로 지금은 잘나가지만 혹시나 삐끗하는 순간이면 선수 생활 끝나는 거고, 그렇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는 거다.
연봉을 많이 받으니까 당신이 무조건 나를 따라와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천천히 생각하죠.”
데이지가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만든 미소를 보며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