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15화 (215/262)

제7장. 하나씩 해결한다. 하나씩. (2)

눈앞에 정지우가 서 있는 거다.

TV에서만 봤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아스널을 상대로 뛰었던 정지우, 프리미어리그 선두 팀 골키퍼, 프리미어리그 최소 실점 골키퍼, 동양인 최초 프리미어리그 선발 골키퍼, 정지우.

“실례지만, 여기 사장님이 어느 분이신가요?”

“저, 저, 정지우 선수? 정지우 선수 맞지요? 그렇지요?”

사장이 말을 더듬어 가며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어? 정지우?”

콰다당! 땡강! 쨍그렁!

정지우를 발견한 손님 한 명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탁자가 넘어졌고, 안주와 컵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 와아- 아!”

놀라움은 삽시간에 호프집 안으로 퍼졌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테이블이 엎어졌는데, 누구 한 사람 신경 쓰는 손님은 없었다.

“어떡해! 어떡해!”

격하게 아낀다던, 그래서 영국으로 휴가 가겠다던 여자 손님이 얼굴을 가린 채로 펄쩍펄쩍 뛰었고,

“와- 아!”

정지우를 본 다른 손님들은 당황하고 놀라는 얼굴로 테이블 쪽으로 몰렸다.

“제, 제, 제가 사, 사장입니다.”

악수를 하자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던 사장이 정지우의 손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 손님들이 잔뜩 몰렸고, 주방에서 직원들이 뛰어나왔으며, 여기저기서 전화기의 플래시가 터졌다.

“고맙다는 인사드리러 왔어요. 부상당하고 마음이 힘들었을 때, 보내 주신 메모하고 선물 보고 힘이 났거든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니, 그거 뭐 별거 아닌데…….”

선물을 보내긴 했다. 힘을 내라는 간절한 바람도 담았다. 하지만 정지우가 이렇게 나타나서 고맙다고 해 줄 줄은 정말 몰랐다.

“저, 마음에 드실지 모르지만, 영업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셨으면 싶어서요.”

정지우는 어깨에 멘 작은 가방에서 비닐 포장에 담긴 상의를 꺼냈다.

“구단에서 판매하는 제 유니폼입니다. 혹시 몰라서 상민이하고, 준석이, 그리고 저녁에 정렬이까지 사인 다 해 놨어요.”

“그깟 것 좀 보냈다고 뭐 이런 걸 다……?”

감동에 휩싸인 사장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때였다.

“저기, 여기 혹시 골키퍼 장갑 선물해 주신 분 계세요?”

정지우가 안쪽에 대고 커다랗게 외쳤다.

“꺄아아-!”

비명이 먼저 터졌고,

“여기예요! 여기! 우리 디자인 사무실에서 했어요!”

여자 두 명이 얼굴을 가린 동료를 밀다시피 정지우의 앞으로 데려왔다.

“고맙습니다. 정말 잘 받았어요. 프리미어리그 규정 때문에 경기에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태극 마크 보고 기운을 많이 얻었습니다. 여기요.”

정지우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작은 포장을 꺼냈다.

“작지만 유니온 시티에서 판매하는 기념품입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돼요?”

“그럼요.”

『초반부터 유니온 시티 상당히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부족한 느낌인데요.』

경기 좀 보라는 듯 캐스터가 떠들고 있었지만, 당장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장님, 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오늘 여기 계산 얼마인가요? 제가 낼게요.”

“에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장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내가 냅니다! 저기, 정지우 선수! 틀림없이 정지우 선수가 여기 있다고 알린 손님이 있을 거거든요. 사진 찍고 얼른 움직이세요. 여기 있다가 붙잡히면 시간 너무 뺏깁니다.”

독립군을 숨겨 주는 애국지사의 표정으로 사장이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는 ‘밖에 간판 불 내려! 너희 두 명이 입구 좀 지켜라!’ 하고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장님! 그럼 저희 먼저 사진 찍으면 안 될까요?”

직원의 간절한 바람을 정지우가 들어주었다.

주방의 직원들까지 나와서 다섯이 정지우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사장, 그리고 앞쪽 테이블부터 돌아가며 정지우와 사진을 찍었는데 얼추 30분이 훌쩍 지났다.

“안에 있다던데! 왜 못 들어가게 해!”

그리고 가게 문밖에서 거칠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이리로 오세요!”

사장은 정지우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움직였다.

뒤쪽으로 음식 창고가 있고, 그 옆으로 작은 통로와 연결된 쪽문이 따로 있었다.

“자재 들어오는 창고인데요. 이리 나가시면 저 앞에서 안 보입니다.”

사장의 눈에 아쉬움과 고마움이 가득했다.

“정지우 선수, 난 늘, 언제나, 그리고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응원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알고 싶어서, 어떤 분인지 보고 싶어서 온 호프집 사장은 정지우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전해 주고 있었다.

선물, 편지들을 보내 주는 분들의 응원이 이런 것인 줄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경기를 뛸 뿐인데, 그것도 영국에서 뛰는 정지우에게 팬들은 이런 한없는 애정을 준다.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할게요.”

동료들에게 하는 것처럼 가볍게 사장을 안아 준 정지우가 쪽문을 통해 가게를 나섰다.

“앞으로 정지우 선수 욕하는 사람은 내가 절대 손님으로 안 받을 겁니다!”

사장의 악 받친 듯한 고함이 자정이 다 된 길에 커다랗게 울렸다.

노리치와의 경기는 2 대 1 유니온 시티의 승리로 끝났다.

월요일 아침에 부장은 장진모를 불렀다.

“야! 어떻게 된 거야! 기껏 출장 잡아 놨더니, 정지우가 한국에 있다는 제보랑 사진이 올라오는데! 내가 뭐라고 하리!”

“커피 드세요.”

장진모가 계면쩍은 얼굴로 자판기 커피를 건네주었다.

“이깟 커피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니깐!”

그러면서도 부장은 장진모가 건네준 커피를 받았다.

“어떻게 할래?”

“커피부터 드세요.”

부장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서도 또 권하는 대로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아, 뜨거! 에이!”

부장이 투덜거릴 때였다.

덜컹!

그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장 기자님! 정지우요!”

그리고 후배 기자 한 명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넌 또 뭐라는 거야?”

“정지우, 정지우 선수가 지금 아래에 와 있답니다! 장 기자님 찾는다고!”

부장을 잠시 바라본 장진모가,

후다닥!

빠르게 부장의 방을 뛰어나갔다.

잠시 후, 기자들이 부장의 방 앞에 모여 안을 기웃거렸다.

안에 정지우가 있는 거였다.

아래로 뛰다시피 내려간 장진모가 정지우와 함께 올라왔고, 곧바로 부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고 나서 더할 수 없이 만족한 얼굴로 부장이 먼저 방을 나왔다.

장진모는 의아한 눈으로 정지우를 살폈다. 이전과 다르게 여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인터뷰 안 하세요?”

“시간 급한 거 아니면 천천히 합시다. 요 며칠 어디에 있었어요?”

“정렬이 만났고, 응원해 준 분들 찾아뵙고, 어제는 어머니께 다녀왔어요.”

“어머니요?”

“어릴 때라 어머니가 원하셨던 대로 했거든요. 고향인 바닷가에 뿌려 드렸는데 지금은 좀 후회돼요. 납골묘에라도 모실걸, 괜히 어머니 말씀 들었나 싶어서요. 제게 부담 주기 싫으셔서 그랬던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장진모의 사과를 정지우는 편안한 미소로 받았다.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 이건 기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묻는 겁니다.”

잠시 생각하는 듯 시간을 끌었던 정지우가 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 혼자 축구만 보며 지냈어요. 축구가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반대로 지금은 축구에 갇혀 있어서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었구요.”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장진모는 딱히 대꾸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선물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영국에서 뛰는데 이분들은 왜 이런 선물을 할까, 그런 생각요.”

“월드컵 예선에서 보여 준 모습과 프리미어 최초 동양인 골키퍼, 무실점 기록, 정 선수는 당연히 그럴 만하잖을까요?”

“그냥 돌아보고 싶었어요. 협회와 당시 소속 팀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도 팬들은 아니었는데, 제가 너무 옹졸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구요.”

아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의 장진모를 보며 정지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런 거 이해하세요? 국가대표까지 은퇴했는데 계속 성원을 보내 주시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 제가 받는 연봉을 나누는 것도 아닌데 자랑스럽다고, 고맙다고, 기운 내라고 해 주실 때 느끼는 든든함, 그런 거요.”

“그건 좀 알 것 같네요.”

“언젠가 그러셨었죠? 팬들은 알 권리가 있다고. 최근에 그냥 그걸 실감한 느낌이었어요. 저렇게 일방적인 응원과 성원을 주는데, 마냥 숨어 있는 건 프로 선수의 도리가 아니구나 하는 거요.”

장진모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뭔가 한 걸음 더 성장한 모습을 본 거 같네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나 역시 매주 정 선수의 경기를 챙겨 보던 팬으로서 그걸 알아준다는 게 좋아서 하는 말입니다.”

밖에서 아직도 기자들이 기웃거리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우리하고만 인터뷰하면 다른 기자들에게서 미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공식 기자회견을 합시다.”

장진모가 결심한 얼굴로 꺼내 든 제안이었다.

“아는 척하는 거라면 미안한데, 정지우 선수, 위급한 어머니를 이용했던 협회와 한국 프로팀에 대한 미움을 팬들의 성원으로 털어 낸 거, 그런 거 아닙니까?”

정지우는 딱히 답을 하지 않았다.

“견디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악착같이 하던 축구에서 정지우 선수를 응원해 주는 팬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 축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라면 합동 기자회견이 더 적당합니다.”

“난처해지시지 않겠어요?”

“큼! 그렇다면 합동 기자회견 끝나고 독점 인터뷰, 뭐 그런 거 하나 해 줍시다. 정지우, 영국 생활 밝히다. 혹은 숨겨 놓은 애인 있다, 뭐 이런 거.”

“그건 좀 곤란한데요.”

“어? 애인이 생겼어요? 기사 안 씁니다. 누구예요? 누군데요? 사진 있어요?”

정지우가 웃었고, 장진모가 바싹 다가들었다.

신문사 강연장으로 구름처럼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부장은 한쪽에서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장진모를 노려보았다.

“독점 인터뷰 따로 한다니까요.”

“미친 인간아! 독점을 먼저 따고 이걸 했어야지!”

“아, 형! 나를 찾아 줬어요! 솔직히 말합시다! 정지우, 지금은 세계적인 선수예요! 당장 오늘만 해도 해외 언론 파견 기자들까지 죄 몰려들잖아요.”

장진모의 반격에 부장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저렇게 의리를 지키는 선수를 곤경에 빠트리고 싶어요? 우리 오래갑시다. 정지우 보셨죠? 뭔가 깨달았다니까! 저기서 한발 더 성장하면 우리는 지금껏 갖지 못했던 세계적인 선수를 얻는 거예요.”

정지우가 앉을 테이블을 보며 부장이 고개를 끄덕인 직후였다.

“여기서 욕심 부리면 협회랑 우리랑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장진모가 마지막 한 방을 날렸는데,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어디에다 비유하는 거야?”

단박에 부장의 반격이 있었고,

“어? 시작인가 보네!”

장진모가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박용근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여보! 맥주 있나?”

그러면서 그는 저녁 식탁에서 전에 없이 맥주도 찾았다.

“당신이 어쩐 일이야? 좋은 일 있어?”

“흐흐흐! 지우가 한국에서 기자 인터뷰를 한다네.”

“인터뷰? 지우가?”

박상민까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앞에서 박용근은 연신 기분 좋은 미소를 달고 있었다.

전은주가 맥주를 꺼내 왔다.

“너도 한잔할래?”

“제가 따라 드릴게요.”

“오냐.”

박상민이 캔을 따서 박용근과 전은주의 잔에 맥주를 담아 주었다.

“여보, 뭐야? 지우가 인터뷰하는데 뭐가 이렇게 기분 좋은 건데?”

잔을 받은 전은주가 질문했고, 박상민까지 답을 기다렸다.

“최근에 지우 훈련 과정과 경기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거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데, 그 목표가 너무 승부에 매달리는 거 같아서.”

예상과 다른 엉뚱한 대답이었다.

“선수가 훈련에 최선을 다하고, 승부에 집착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전은주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경기 결과를 놓고 선수를 때리는 지도자와 비슷한 모습이었어. 골대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동료들에게 무언가 답을 주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던 거지.”

전은주도, 박상민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팬들의 성원을 이해했고, 한국에 가서 인터뷰도 하는 거야. 그동안 어머니를 잃고 힘겨워했던 상처를 이제 어느 정도는 털어 낸 거지. 그 점에서는 당신의 배려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을 거다. 고맙다, 여보.”

울보 전은주는 정지우의 그 마음이 안쓰러워서 짧은 말 한마디에 눈시울을 붉혔다.

“감독님, 저 맥주 반 잔만 마셔도 될까요?”

“한 잔 정도야 괜찮지.”

박용근이 맥주를 따라 주자 박상민은 부모님의 집을 부탁한 이야기를 꺼냈다.

“잘했다. 그리고 그런 부탁한 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제 욕심만 부린 것 같아서요.”

“우리, 지우를 위해서 건배하자. 녀석이 멋지게 성장해서 돌아올 수 있도록.”

박용근이 잔을 내밀었고, 전은주와 박상민이 가볍게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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