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16화 (216/262)

제8장. 정지우는 골키퍼다. (1)

정지우가 한국에 있다는 사진과 제보가 연달아 인터넷에 올라온 참이었다.

당연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며 정지우를 찾던 기자들이 못마땅해하는 부장을 약 올리는 것처럼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이번 한국 방문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부상으로 6주 결장이 예상되면서 구단에서 휴가를 주었습니다. 어머니를 보내 드렸던 곳에 들렀고, 여기 장진모 기자님과 부상 중인 이정렬, 그리고 응원해 주셨던 팬들 몇 분을 만났습니다.”

‘뭐야? 어쩐 일이야?’

전에 없이 친근한 정지우의 답변에 기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번 부상은 깁스만으로 충분히 치료 가능한 건가요?”

“나중에 통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일단 이 상태로 경과를 보기로 했습니다.”

정지우가 깁스한 손을 들어 보이자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정지우 선수는 그동안 인터뷰하기 어려운 선수였습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이번 한국 방문에 이런 시간을 만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기자의 질문이 끝났고, 모두의 시선이 정지우에게 쏠린 직후였다.

“한국에 계신 팬들께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정지우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영국에서 경기하는 제게 참 많은 분이 성원을 보내 주셨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분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플래시와 함께 기자들 사이에서 놀랐다는 탄성이 나오기도 했다.

“동양인 최초 프리미어리그 선발 골키퍼, 무실점 기록, 그리고 현재 소속 팀이 프리미어리그 선두에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박용근 감독님께 더 지도받고 만족한 실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 감독님과 의논해서 다음을 계획할 예정입니다.”

“정지우 선수가 부족하다고 하면 곤란한 선수 많을 텐데요?”

이번 질문에도 기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진심으로 배울 것이 아직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박 감독님께 더 많이 배워서 보다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유니온 시티의 생활에는 만족합니까?”

“박용근 감독님, 박상민, 신준석, 이정렬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훌륭한 동료들이 있고, 마틴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 열성적인 홈 관중, 저는 유니온 시티의 생활에 더없이 만족합니다.”

생각 못한 기자회견 시간을 가져 주고, 전에 없이 성실하게 답변해 주는 정지우가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기자들 역시 곤란하거나 불편한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정지우 선수,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요, 혹시 새로 초빙되는 국가대표 감독의 요청이 있다면 태극 마크를 다시 달 의향이 있습니까?”

어느 정도는 부담스러운 질문이라 내내 편안하던 기자회견장에 옅은 긴장이 감돌았다.

“제가 그렇게 하면 김문호 감독님께서 서운해하시지 않을까요?”

그동안 보았던 정지우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여유 있는 태도였다. 뜻밖의 답에 몇몇 기자들이 타이핑을 멈추고 멍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고, 몇몇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감독님 초빙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제가 뭐라 답하는 건 앞으로 선발될 선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일단 그 정도입니다.”

장진모가 그만하자는 사인을 보냈고, 기자들도 더는 무리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이 끝났다.

기자들이 정지우에게 다가와 ‘응원할게요, 정지우 선수.’라든가, ‘사진 한 장 찍죠.’ 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정지우 말이다. 컸다. 분명히 성장했어.”

웃으며 기자들과 사진을 찍는 정지우를 보며 부장이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전에 있던 독기가 없어진 건 아닌데, 그걸 감출 정도로 여유가 생겼어. 어후! 지금까지도 엄청났는데 앞으로 어디까지 해낼지 상상이 안 간다.”

누구보다 정지우를 가까이서 접했던 기자가 장진모다.

부장이 알아차린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어서 장진모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지우는 김문호 감독을 찾아갔고, 신준석의 부모를 만났으며, 박상민 부모의 이사를 챙겼다.

박상민의 부모가 집을 옮기던 날,

“지우야.”

정지우의 손을 잡은 박상민의 부친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는 연신 굵은 눈물을 닦아 냈다.

“고맙다. 고맙다, 지우야.”

“어머니, 상민이랑 저는 형제 같아요. 아들한테 이렇게 인사하는 어머니가 어디 있어요?”

연신 고개를 조아리려는 모친을 정지우가 조심스럽게 안고 다독여 주었다.

멀리서 소식을 기다릴 동기에게 연락쯤 해 줘야 하는 거다.

전화기를 꺼낸 정지우가 집의 이곳저곳을 찍어서 박상민에게 보냈고, 잠시 뒤에 전화벨이 울렸다.

울먹이는 박상민, 울음을 삼키려 애쓰는 그의 부친, 연신 ‘지우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어쩌냐!’를 반복하는 모친.

[고맙다, 지우야!]

한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박상민의 감정을 알기에는.

“연습 잘하고 있어. 정렬이 벼르고 있다. 이번에 나랑 같이 들어갈 건데, 그때 너한테 바라는 거 많아.”

[뭐든 말만 해. 내가, 너 하라는 건 다 한다!]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처럼 워낙 다부진 대답이 건너왔다.

“상민아.”

[응.]

“나 없는 동안 감독님과 사모님 잘 모셔 주라.”

[그런 소리 마! 너만큼은 아니어도 나,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있어. 지금 당장 축구 그만두라고 하셔도 따를 거다.]

하마터면 그의 부모 앞에서 ‘미친놈’이라고 욕을 할 뻔했다.

노리치와의 경기가 있고, 일주일 뒤의 주말에 유니온 시티는 사우샘프턴과 2 대 2로 비겼다.

그리고 정지우는 이정렬과 함께 영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클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튼은 어디 가고, 왜 클락이 자꾸 나와?”

“Ji를 살피는 일을 내가 하는 게 마음 편해서 그래.”

그의 넉살이 나쁘지 않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서 이정렬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정렬아.”

정지우가 나직하게 불렀고, 이정렬이 얼굴을 돌려 말을 기다렸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뭐?”

불가능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대꾸였다.

“네게는 말을 하고 싶었어. 앞으로 내가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전에 내가 했던 것처럼 나 좀 잡아 달라고.”

이정렬은 먼저 픽 하고 웃었다.

“그러지 마. 알았다. 나 이번에 올 때 아버지랑 확실하게 이야기했어. 만약 이번에도 내가 휘청이면 아예 축구 그만두겠다고까지 말씀드렸고. 여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녀석이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던 머리칼을 들어 올렸다. 전에 탁자를 들이받았던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었다.

“공치사는 아니지만, 나 지난번 어시스트 올릴 때 발목 부러질 각오도 했었어. 솔직히 이번에 혼자 훈련하면서 또 얍삽하게 마음 흔들렸는데, 그때 네가 찾아와 준 거야.”

한국말로 오가는 대화라 클락은 아예 관심조차 없이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난 너처럼 강하진 못해. 누워 침 뱉는 거 같지만, 우리 아버지 성격이 나한테 그대로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왜 그런 소리를 해?”

“그게 사실이니까. 우리 아버지 팔랑거리는 거, 나한테 그대로 있거든.”

정지우의 표정을 본 이정렬이 잔잔하게 웃었다.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할 거다. 팔랑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릴 바엔 그냥 선수 생활 접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도와주라.”

“야! 너처럼 쉽게 축구 그만두면 누가 선수 생활 하겠냐?”

“너! 상민이! 준석이!”

“확!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래? 같이 가, 인마.”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해 보고 싶어.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하고 싶고. 도와주라. 악착같이 해 볼게. 한눈 안 팔고 달려 볼게.”

정지우가 픽 하고 웃었고, 이정렬이 계면쩍은 얼굴로 따라 웃었다.

2주 만에 돌아온 영국 집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두 달은 지나서 돌아온 것처럼 친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게도 느껴졌다.

벨을 누르자 박상민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야! 정지우! 너무 오래 있다가 오는 거 아니냐! 어서 와! 정렬아!”

“인사 먼저 드리고.”

안에서 박용근과 전은주가 기다릴 게 분명해서 박상민과는 가벼운 인사만 나눴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안녕하셨어요, 감독님?”

“잘 왔다. 그래, 발목은?”

“원래 부족했던 실력이라 안 다쳤을 때랑 별 차이 없습니다.”

“이 녀석이?”

이정렬의 넉살에 박용근이 웃음을 달았다.

“저녁들은 어쨌니?”

“어머니, 죄송한데요, 저 배고프기도 하고, 어머니 반찬도 먹고 싶어요.”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전은주가 주방으로 움직였고, 박상민이 거들러 달려갔다.

“김 감독이 전화했더구나.”

“예. 인사드리러 갔다가 나오는데 감독님께 전화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좋은 여행이었던 거지?”

박용근이 정지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고맙습니다, 감독님.”

박용근만이 알아들을 법한 인사를 정지우가 건넸다.

“지우야! 정렬이랑 얼른 와!”

“예! 감독님, 식사하셨어요?”

“우린 벌써 먹었지. 얼른 가서 식사부터 해라.”

“예. 그럼 저녁 먹고 말씀드릴게요.”

“그래라.”

정지우가 이정렬과 함께 식탁으로 움직였다.

동기란 참 좋은 거다.

박상민이 다 마신 물 컵을 채워 주었고,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 정지우와 이정렬에게 밥을 더 퍼 주었다.

이제 저녁 7시쯤이었다.

“준석이 부를까?”

“불러. 정렬이 왔는데 얼굴은 봐야지.”

“알았어.”

박상민이 전화기가 있는 2층으로 뛰어갔다.

“얘들이! 너희 종일 굶었어? 괜찮아?”

“어머니 손맛이 좋아서 그래요!”

둘이서 밥을 세 공기씩 먹고 있어서 전은주가 놀랄 정도였다.

“준석이 불렀다. 어? 어머니! 이리 나오세요!”

박상민이 내려와서 억지로 전은주를 막아섰다.

“넌 또 왜 어머니야! 누구 맘대로!”

“야! 나도 아들 하기로 했어! 치사하게 그러지 말자!”

넉살이 늘은 동기 셋이서 뒷정리를 마쳤다.

마침 신준석이 들어와서 다 함께 소파에 자리했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부상 이후로 처음 보는 이정렬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다음으로 박상민 부모님의 이사에 관한 화제가 이어졌다.

한 시간쯤 떠든 다음이었다.

“피곤할 테니까 이만 쉬고,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자.”

“예, 감독님.”

“가자, 정렬아! 이 몸이 너를 위해 집 청소 싹 해 놨다.”

신준석과 이정렬이 돌아갔고, 박상민과 정지우도 잠자리에 들었다.

박용근과 전은주가 자기에는 아직 좀 이른 시간이었다.

“여보, 지우 뭐 좀 바뀐 거지?”

박용근은 보기 좋게 웃음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말 들어 보니까 어머니 보내 드린 곳 다녀온 거랑 김 감독님, 상민이, 준석이 부모님 챙겨 드린 거, 기자회견 한 게 전부던데, 뭐가 달라지는 거야?”

“축구를 밖에서 보기 시작한 게 달라졌지.”

“밖에서 본다고?”

전은주가 알아듣기에는 어려운 설명이었다.

“전에 열흘 부상으로 관중석에 있을 때와는 다른 거야. 한계에 다다른 선수들이 흔히 슬럼프에 빠지는 건 당신도 잘 알 텐데, 지우는 슬럼프를 느낄 새가 없었거든.”

“전에 혼자 있는 동안이 슬럼프 아니었어?”

“아니었던 모양이야.”

박용근이 부드럽게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때 사실은 간절하게 축구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 간절함이 릴리란 아이를 계기로 터져서, 그 뒤로 슬럼프를 느낄 새도 없이 달려왔고, 이번 부상으로 슬럼프가 올 뻔한 걸 또 이겨 낸 거 같다.”

제대로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어쩐지 이해할 것 같은 설명이었다.

“아직 한 달이 남았으니까 일단 지켜보자. 그동안 지우가 어떻게 하는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있게 두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전은주가 그런 건 걱정하지 말란 눈빛으로 박용근을 보았다.

다음 날, 박용근은 물론이고 이정렬까지 구단으로 움직였는데, 정지우는 집에 있었다.

오전에 영상 보며 시간을 보냈고, 점심은 전은주와 함께 밥을 비벼 먹었으며, 간단하게 산책을 하고 들어와 다시 영상을 보았다.

바뀌었다.

어디가 그런 거라고 콕 짚지는 못하겠지만, 하여간 정지우의 모습이 바뀐 것만은 분명했다.

“과일 먹자.”

“예, 어머니.”

과일을 먹으며 둘이서 함께 영상을 보았다.

“저 팀은 굉장하구나. 맨유지?”

“예.”

전은주가 질문했고, 정지우가 순순히 답을 했다.

“저런 팀을 만나면 정말 힘들지?”

“그렇죠.”

힘들다는 답을 너무 쉽게 해서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길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뭐?”

“한 골 먹는 대신에 세 골은 넣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세 골을 넣는다고?

정지우는 골키퍼다.

그건 전은주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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