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하나씩 해결한다. 하나씩. (1)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는 전은주, 클락과 함께 박스들을 뜯었다.
과자, 편지, 손으로 그린 정지우의 그림, 인형들.
상자를 열 때마다 ‘어쩜!’ 하는 전은주의 감탄사와 ‘와우!’ 하는 클락의 놀란 소리가 뒤를 잇곤 했다.
영어로 ‘JUNG JI WOO TIME’이라고 사방에 커다랗게 적어 놓은 상자를 뜯을 차례였다.
크기도 다른 상자들의 4배쯤 되는 거여서 클락이 처음부터 궁금해했던 상자이기도 했다.
박스를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정지우의 상반신 크기의 커다란 종이였다.
<정지우 선수! 힘내세요!>
<잠시 못 보는 게 서운하지만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
<누나가 우리 지우, 격하게 아낀다! 사랑해!>
<정지우는 일단 더럽(The Love)!>
그 커다란 종이에 응원 구호가 가득했다.
그리고 도화지 아래로 과자, 즉석밥, 라면, 마른반찬, 홍삼, 사탕 등이 있었고, 한쪽에 태극 문양이 손등에 멋지게 찍힌 골키퍼 장갑과 셔츠 등이 담겨 있었다.
“지우야.”
전은주가 편지를 건네주었다.
<정지우 선수, 나는 서울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영업이 어려워서 허락받지 않고 정지우 선수의 이름을 팔았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정지우 타임’으로 다시 살맛이 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주말마다 우리 가게에 들러 주시는 손님들이 정지우 선수에게 작은 힘이라도 전해 주자고 의견을 내서, 이렇게 각자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 보냅니다.>
그 아래로 손님들이 분명한 이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몇몇은 정지우를 흉내 낸 것처럼 양손 검지를 위로 들고 있었다.
<기운 내세요! 우린 월드컵 본선을 볼 수 있게 해 준 정지우 선수에게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떤 모습이어도 나는 정지우 선수를 끝까지 응원할 겁니다! 당신처럼 멋진 골키퍼를 응원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정지우 선수.>
마지막에 적힌 ‘언제고 한번 들르세요. 내가 그날 계산 안 받습니다.’라는 추신까지 모두 읽은 정지우가 시선을 내렸다.
정지우는 오늘 온 선물들을 하나씩 꺼내서 천천히 살폈다.
과자가, 인형이, 그리고 편지가 라커룸으로 왔었다.
그러나 팬들이 보여 준 이런 응원을 가슴 한쪽에 넉넉하게 담을 여유를 갖지 못했었던 것 같다.
박용근과 박상민이 집으로 돌아왔고, 신준석이 함께 들어섰다. 당연하게 선물들을 먼저 살폈고, 이어서 식탁에 모여 앉았다.
“오늘 갔었던 곳은 어떻든?”
“축구를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본인이 원하면, 그때 코치들이 적당한 훈련을 알려 주는 방식이었구요.”
“우리나라도 유소년 축구도 그렇게 바뀌고 있지. 일단 즐기는 게 먼저고, 더 잘하고 싶은 아이들은 원하는 훈련을 하는 방식이니까. 지금은 해외에 나가 배우는 선수들도 많고.”
식탁에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고, 뒷정리를 도운 뒤에 다 함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감독님.”
봉지로 된 홍삼을 먹고 난 뒤에 정지우가 박용근을 불렀다.
“저, 2주 정도 한국에 다녀올까 합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다. 축구에서 한 걸음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네 축구가 좀 더 확실하게 보일 수도 있을 거다.”
박용근은 왜 한국을 가는지, 누구와 가는지도 묻지 않은 채 대뜸 정지우의 생각을 받아 주었다.
“혼자 가냐?”
“응. 왜?”
무언가를 기대한 듯한 신준석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언제 출발할래?”
“내일 마틴 감독님을 만나고 클락과 의논한 뒤에 움직일까 합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전은주와 달리 박용근은 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틀 뒤에 정지우는 클락과 함께 집을 나섰다.
챙이 있는 모자,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은 분명 알아볼 차림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고, 기분 좋게 즐기고 와.”
전화기가 있고, 행선지를 알고 있으며, 정지우가 어수룩하지 않아서 크게 걱정할 여행은 아니었다.
클락과 공항에 도착했고, VIP 라운지를 거쳐 바로 일등석으로 올랐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부상 때문에라도 좀 더 편하게 이동하고 싶어서였다.
빌이 하는 축구를 보며 알았다.
외롭고 힘겨웠던 지난 6년 동안 축구가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축구를 떠난 정지우는 정말이지 껍데기만 남는다.
잘해 보고 싶다.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이후로 눈이 높아졌고, 스스로 노력한 만큼 동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 모양이었다.
하나씩 해결한다. 하나씩.
정지우라는 골키퍼가 어떤 축구 선수인지도 알아본다.
2주다.
한국을 들른다고 했을 때 박상민이 어렵게 부탁한 일이 있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정지우는 의자를 완전히 눕히고 잠을 청했다.
삐이요! 삐비비비비비!
평택의 빌라에 낡고 오래된 벨이 방문객이 있음을 알렸다.
“누구세요?”
김치 두 가지와 김으로 저녁을 먹은 참이다.
몇 개 되지 않는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던 박상민의 모친이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10월로 넘어가고 있어서 빌라에는 냉기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누구세요?”
올 사람이 없다.
의아한 얼굴로 벽에 손을 짚은 모친이 한 발로 슬리퍼를 밟고는 손을 뻗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무언가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어마! 이게 누구야? 지우? 지우 아니냐!”
“잘 지내셨어요?”
“아이구, 이눔아! 다쳤다더니 여길 어떻게 왔어?”
박상민의 모친은 놀란 얼굴로 정지우의 손을 잡고는 안색과 깁스한 손가락을 연신 살폈다.
“누가 왔다고?”
“아버지! 저 왔어요! 지우요.”
“어? 지우?”
양팔로 바닥을 기다시피 부친이 나왔다.
얼른 거실로 움직인 정지우는 부친을 부축해서 거실로 모셨다.
“절 받으세요.”
“절은 우리가 해야지! 그러지 말고 얼른 앉아.”
“그러지 마세요.”
억지로 두 사람을 붙잡아 앉힌 정지우가 절을 올렸다.
“어쩐 일이냐? 아 참! 내 정신 좀 봐! 저녁은?”
“먹었어요.”
“그럼 잠깐만 있어라. 내가 얼른 이 앞에 가서 마실 거랑 과일이라도 몇 개 집어 오마.”
“과일 제가 사 왔어요. 그리고 저, 지금 막 저녁 먹어서 생각도 없구요.”
“그런 법은 없다!”
박상민의 모친이 부리나케 움직이더니 붙잡을 틈도 없이 현관을 뛰어나갔다.
“어쩐 일이냐? 다친 건 좀 어떻고?”
“깁스 풀면 괜찮을 거래요.”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을 때 모친이 들어섰다.
모친은 컵과 쟁반, 주스와 과일을 들고 와서는 정지우와 부친의 사이에 앉았다.
“지우야, 우선 이걸로 목 좀 축여라.”
“고맙습니다.”
정지우는 잔을 받아서 먼저 박상민의 부친 앞에 놓아 주었다.
“아버지, 상민이가 부탁한 게 있어서 왔어요.”
“상민이가? 그놈이 왜 널 번거롭게 해?”
박상민의 부친이 대꾸했고, 모친은 뭔 소리인가 하는 눈으로 정지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 상민이가 두 분 꼭 이사하시라고 말씀드려 달래요.”
“뭐?”
“상민이, 매일 밤 두 분 걱정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상민이 심정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상민이 바람대로 집 옮겨 주세요.”
“그게…….”
박상민의 부친이 애처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놈 축구 하는 거 뒷바라지 제대로 못했다. 그 뒤로 몸이 이렇게 돼 버리는 바람에 그 녀석이 집안 살림 도맡았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놈이 번 돈으로 편한 집으로 이사 가겠냐.”
“아버지.”
정지우는 나직하게 박상민의 부친을 불렀다.
“저요, 어머니께 아무것도 못해 드린 게 자꾸만 가슴에 걸려요. 그래서 지금도 맛있는 거 먹을 때나, 좋은 집에 들어갈 때 자꾸 어머니 생각나고, 죄송해요.”
“후우.”
박상민의 부친이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려는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쉰 다음이었다.
“상민이 아시잖아요? 매일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느라 맛있는 거 먹을 때나 잠자러 올라갈 때 힘들어해요. 그러니까 상민이를 위해서, 상민이가 맘 편히 축구 할 수 있게 집 옮기세요.”
박상민의 부친이 거실 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제가 구단에 말해서 한국에 있는 부동산 업체에 연락했고, 두 분 지내시기 편한 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봐 둔 집이 있거든요.”
눈물을 훔치던 모친이 멍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30분 거리라니까 멀지도 않구요. 다음 주에 그리 옮기세요. 부탁드려요.”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해?”
“어? 어머니, 서운해요!”
“그런 뜻이 아니고…….”
“상민이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그래요.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저도 그렇게 해 드렸을 테니까요. 솔직히 상민이가 부럽기도 해요.”
“에효! 이눔아!”
박상민의 모친이 칼을 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어서 정지우가 얼른 손을 뻗었다.
이정렬은 솔직히 외로웠다.
돌아갈 구단이 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지금은 잊힌 선수가 된 느낌이었고, 박상민과 레믹의 활약을 볼 때마다 돌아가 봐야 소용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흘에 한 번씩 구단에서 컨디션을 챙겨 주는 것은 고맙다.
그러나 리저브 팀으로 돌아가 봐야 별 볼 일 없이 떠돌다가 축구 인생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박용근과 정지우를 믿고 버텼는데,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정렬이 재활 훈련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움직일 때였다.
“정렬아!”
익숙한 음성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정렬은 멍했다. 정지우가 지금 왜 눈앞에 있는 거지 싶어서였다.
“뭘 그런 얼굴을 해?”
“야! 너 왜 여기 있어? 혹시 도망친 거냐?”
“미친놈! 너 보고 싶어서 왔지. 다리는 좀 어떠냐?”
웃으며 다가온 정지우가 이정렬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둘이서 방으로 된 고깃집에 가서 갈비를 배 터지게 먹었다.
“많이 먹는다!”
“너는 적게 먹었냐?”
“야! 진짜 뭐야?”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2주 정도 쉬기로 했는데 제일 먼저 네가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왔어.”
“연락이라도 하지. 아!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구단에 물어봤다.”
다른 곳으로 가 봐야 시선만 끈다.
그래서 둘이 후식으로 나온 구기자차를 마시며 그 자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정렬아, 사실은 부탁이 하나 있어.”
이정렬은 시선만 들었다. 그런데 정지우는 정작 부탁이 뭔지 입을 열지는 않았다.
“뭔데? 오늘 너 보고 나서 정말이지 마음 꽉 굳었다. 뭐든 할게. 네가 나쁜 짓 하자고 할 놈도 아니고, 까짓것! 네가 하자면 한다.”
“그런 게 아니고, 너 다시 뛰게 되면 내가 원하는 움직임이 있거든. 그걸 좀 부탁하려고.”
“뭐?”
“많이 힘들 거다. 미드필더에서는 상민이가 있으니까 됐는데, 스트라이커로 내가 원하는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없어. 그래서 힘들겠지만…….”
“시끄럽고!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뭔데? 반대쪽 발목이라도 또 날려?”
“미친 새끼!”
정지우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이정렬이 커다랗게 따라 웃었다.
정지우가 빠진 첫 경기 상대는 노리치였다.
모처럼 토요일 11시에 이루어진 경기이고, 신준석과 박상민이 선발로 나섰다.
그러나 호프집의 응원 열기는 이전처럼 뜨겁지 않았다.
박상민이 골을 넣거나 어시스트를 만들어 내면 서비스를 주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었는데, 오히려 손님들 대부분이 그건 아니라고 잘라 버렸다.
TV에서 선수 소개가 이어지고 있었다.
『골키퍼 장갑은 얀센이 끼었습니다. 다음은 노리치의 선발 명단을 살펴보겠습니다.』
노리치 선수들이 화면에 나타나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동안 캐스터가 그들의 포지션과 이름을 알려 주었다.
『관중석에 박용근 감독의 부인과 신준석 선수의 가족이 보이는데요, 정지우 선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부상이 심한 건지 염려되는데요.』
『깁스했다고 발표했으니까 아무래도 한 주나 두 주 정도 안정을 취하고 그 뒤에 움직이지 않을까 싶네요. 얼른 정지우 선수가 선발로 나와서 골대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우리가 그렇다!”
남자 손님 한 명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고, 다른 손님들이 일제히 박수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어쩐지 맥이 빠졌던 응원에 조금 전의 고함이 그나마 흥을 만들어 준 느낌이었다.
“정지우! 빨리 나아라! 너 나올 때까지 우리가 여기에서라도 응원한다!”
건너편 탁자에서 다른 손님이 고함을 질렀고, 또다시 손님들 대부분이 박수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주인은 그저 이렇게 모여 준 손님들이 고맙고 감사했다.
딸랑.
그때 호프집 문이 열렸다.
아마 지나가던 손님일 거다. 그리고 어쩌다 들른 손님들은 이렇게 꽉 찬 테이블을 보면 혀를 내두르고 돌아 나간다.
사장은 키가 훤칠한 남자 손님에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한데, 자리가……!”
사장은 따귀를 맞은 사람처럼 꼼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