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Sang의 경기를 보면서 느낀 것. (1)
카메론이 조금 더 빨랐다.
콰다당!
레믹이 카메론과 뒤엉켜 넘어졌지만 분명하게 공을 먼저 건드린 깔끔한 태클이었고, 발바닥을 들지도, 발을 올리지도 않았다.
삐익!
휘슬을 분 주심이 손짓으로 코너킥을 알렸다.
『박상민, 들어가자마자 왜 교체했는지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빈 곳을 절묘하게 파고들었거든요! 아예 직접 슈팅을 날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각도가 부족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욕심내 볼 만한 장면이었어요.』
유니온 시티가 얻어 낸 첫 번째 코너킥이었다.
선수들이 스토크 시티의 골대 앞에 뒤엉켜 있어서 중앙선 아래로 상대 선수가 없었다.
지금이 말하기 좋은 기회였다.
“스웰던! 헤이! 스웰던!”
정지우는 스웰던을 커다랗게 불렀다. 그가 서너 걸음을 다가온 다음이었다.
“올라가! 올라가서 밀어붙이면서 꼼빠니를 도와줘!”
지금까지 수비 라인의 구성과 다른 지시였다.
무실점 기록을 유지해 온 지금까지의 수비 방식과도 맞지 않는 요구이기도 했다.
스웰던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때,
“힘으로 붙자! 밀고 내려오면 우리도 밀고 올라가는 거다!”
정지우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의견을 전했고, 스웰던이 씨익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정지우는 곧바로 신준석도 불렀다.
“준석아! 스웰던이 올라갈 거야! 너도 라인을 타고 올라가! 힘으로 붙는 거다! 데니와 카알을 제대로 도와줘!”
한국말이라 좀 더 편안하게 소리 지를 수 있었다.
『정지우 선수가 우리말을 하는 거 같은데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올라가라는 말인 거 같은데요?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우리 선수들이 우리말로 의견을 주고받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퍼어어엉!
그때 꼼빠니가 코너킥을 올렸다. 골키퍼 에어리어 바깥쪽을 타고 흐르는 코너킥이었다.
와락! 와라락!
선수들이 뒤엉켜 솟구쳤고, 공을 따낸 것은 크르키치였다.
그가 급하게 걷어 낸 공을 잡은 것은 2선을 지키고 있던 유니온 시티의 카알이었다.
투욱!
카알은 근처에 있는 신준석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툭툭!
당연하게 시간을 끌며 분위기를 가라앉힐 줄 알았다.
그런데 신준석이 공을 받은 즉시 스토크 시티 진영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예아아-!”
뜻밖의 질주에 스토크 시티 선수들이 당황했고, 유니온 시티 관중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신준석! 그대로 스토크 시티 진영을 향해 달립니다!』
투욱!
신준석이 데니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스토크 시티의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이었다.
그쯤에서 빠져나올 줄 알았던 신준석은 내처 골대를 향해 달렸다.
투우욱!
스토크 시티의 수비 라인이 당황하며 뒤엉킨 틈이다.
데니가 그대로 신준석의 앞으로 공을 찔러 주었다.
『신준석! 신준석입니다! 신준석!』
투우욱!
신준석은 달려드는 수비수를 피해 공을 짧게 찔러 주었다.
박상민의 앞이었다.
그 한 방에 스토크 시티의 수비 라인이 확실하게 무너졌다.
우르르!
3명의 수비수가 일제히 박상민의 앞으로 달려들었고,
투욱!
박상민이 가볍게 빼 준 패스에 완벽하게 뚫리고 말았다.
퍼어엉!
레믹이 갑갑했던 것을 모두 털어 내겠다는 것처럼 슈팅을 날렸다.
화악!
버틀랜드가 옆으로 쓰러지다시피 몸을 던졌지만,
철렁!
“예에에에에에에-!”
골 그물이 흔들린 다음이었다.
축구란 이런 거다.
몰리다가도 골 하나에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힌다.
골을 넣은 레믹이 엉뚱하게도 신준석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동료들이 달려가서 레믹과 신준석을 안거나 두드리며 골을 축하해 주었다.
마틴은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데이빗을 생각해서 허공에 뻗지는 않았다. 그는 새삼 정지우와 박용근의 호흡이 무섭다는 생각도 했다.
박상민의 교체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지휘해야 한다고 말했던 마틴조차 이 타이밍에 정지우가 저런 지시를 내릴 줄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했다.
스웰던과 신준석에게 올라가라는 지시를 하다니.
그걸로 바로 골을 만들어 내다니.
도대체 저 두 사람의 호흡과 신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 한 조각이라도 계산해서 움직인 걸까?
그때 마틴은 불쑥 정지우가 벤치를 바라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그 짧은 순간에?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유니온 시티의 응원 구호가 터져 나오는 동안 선수들이 중앙선으로 나뉘어 서고 있었다.
‘됐다. 이 정도면.’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의 무실점 기록을 깨는 일이 19개 프리미어리그 팀들의 목표가 돼 가는 마당에, 계속 남아 있던 마지막 과제의 답을 얻은 느낌이었다.
“You're not singing anymore(너희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구나)! You only sing when you're winning(너희는 이길 때만 노래하지)!”
거칠디거친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남자들의 팀이라는 스토크 시티 관중들을 대놓고 긁어 댔다.
삐익!
『월터스! 공을 밀어줍니다! 이렇게 되면 스토크 시티의 경기 방식이 조금은 바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만회골을 만들기 위해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오겠지요. 그렇더라도 후반이 남아 있어서 무리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한 골과 두 골 차는 정말 크거든요.』
중앙선 부근에서 확실히 스토크 시티가 강하게 밀고 올라왔다. 그런데도 오히려 전반 초반처럼 그들의 공격이 먹히지는 않았다.
『스웰던! 중앙선을 넘어갑니다! 스웰던, 박상민에게!』
『유니온 시티의 양쪽에서 스웰던과 신준석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오히려 스토크 시티가 유니온의 템포에 말려들고 있어요. 경기가 빨라졌거든요. 빠른 경기에서 유니온 시티는 정말 강한 팀입니다.』
『박상민! 데니에게! 데니 모처럼 맥슨에게 패스!』
『보세요! 수비수들이 맥슨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중앙은 물론이고, 레믹이 수비수 전체를 흔들고 있거든요. 거기에 스웰던과 신준석이 올라가면서 공격 루트가 엄청나게 풍부해졌어요!』
전반 5분을 남겨 놓고는 유니온 시티의 일방적인 공세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규 시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투우욱!
공을 몰고 올라간 스웰던이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 있는 박상민에게 공을 찔러 주었다.
『박상민! 좋은 위치!』
박상민을 노리던 크르키치가 단박에 달려들었다.
“예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박상민이 공을 발바닥으로 끌고 가며 몸을 빙글 돌린 동작 때문이었다.
크르키치가 멍한 상태에서 고개만 돌렸을 때, 레믹이 손을 앞으로 뻗으며 골대 왼쪽을 파고들었고, 데니가 오른쪽에서 뛰어들었다.
퍼어어엉!
박상민은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워낙 기습적인 슈팅인 데다 레믹의 반대쪽 골대 구석을 제대로 파고 들어간 슈팅이었다.
화아아악!
버틀랜드가 급하게 몸을 날렸다.
철렁!
그러나 그가 뻗어 낸 손끝을 스친 공이 골대 그물을 커다랗게 흔들었다.
“예에에에에에에-!”
코너 쪽으로 달리는 박상민을 레믹이 덮쳤고, 이어서 동료들이 그 위로 연달아 엎어졌다.
저런 세레머니는 골 넣은 프로 선수에게는 별로다.
얼굴 나올 기회 다 막히는 거고, 자칫하면 부상의 위험도 있다.
그러나 좋은 건 좋은 거다.
“라라라- 라! 라라라- 라! 헤이! 헤이! 헤이! 굿바이!”
전반이 끝나는 시점인데도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더욱 강하게 스토크 시티 관중들과 선수들을 자극했다.
어쩌면 팀의 주장인 데이빗을 교체하게 만든 그들을 응징한다는 의미가 담겼는지도 모른다.
다시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나뉘어 섰지만, 경기는 대강 그렇게 끝났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4시였다.
<박상민 골! 지렸다! 여기서 조금만 있다가 레알 가자!>
<사실 박상민은 정지우가 발굴한 거 아니냐? 연봉에서 얼마는 뚝 떼서 주는 게 맞는 거다.>
<에라, 이 양아치야!>
인터넷 중계 창에는 흥분한 시청자들의 댓글이 쉼 없이 올라왔다.
평택 빌라의 거실도 TV가 켜져 있었다.
새벽이다. 박상민의 부친은 정말 힘겨운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아들의 골을 보는 순간, 입은 웃고 눈 끝은 우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버지, 집 사셨어요?]
“알아보고 있다.”
잔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살았다.
마음을 전하는 것은 남자가, 특히나 아버지가 하면 안 되는 일인 줄 알고 살았다.
“상민아.”
[예, 아버지.]
“아버지가 미안하다.”
아들은 당장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가 미안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 많이 편찮으신 거 아니죠?]
떨리는, 울먹이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자 부친도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아버지? 정말 많이 편찮으신 거 아니죠?]
“괜찮아. 엄마랑 나는 네 덕분에 정말 잘 지내.”
아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지난날 거칠게만 대했던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 주는 느낌이었다.
“상민아, 여기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축구 마음껏 해. 어떤 팀에 가든 감독님께 꼭 먼저 의논드리고, 허락하시면 너 원하는 팀에 가. 알았지?”
[아버지!]
왜 그랬는지 모른다.
경기 전 통화할 때 이상하게 아들에게 미안했다.
박상민의 모친이 코를 훌쩍이고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하이라이트로 나오는 아들의 장면, 그것을 지켜보는 박상민 부친의 표정을 보면서였다.
“우리 3년만 여기서 더 살자.”
“상민이가 바라는 일이잖아요. 당신이 편한 곳에 있어야 그 아이도 마음이 편하다잖아요.”
“저놈이 서양에 그 큰 선수들 틈에서 버텨 가며 번 돈이잖아. 꼭 쥐고 있다가 우리 저놈 장가갈 때 돌려주자.”
박상민의 부친 음성이 워낙 간절해서 모친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양반이 혹시?’
그러면서 안색을 살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밤의 더위와 중계를 보느라 체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가 싶었다.
다음 일요일에는 통복시장에 나가 쏘가리라도 한 마리 사 와서 푹 고아 먹여야 할까?
삑!
『후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레믹! 맥슨에게! 맥슨! 박상민에게 공을 넘깁니다!』
『유니온 시티는 공격을 풀어 나가거나, 공을 맡길 선수가 필요하면 일단 박상민을 찾고 있어요! 정말 자랑스럽구요! 앞으로 우리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할 때 정지우와 박상민이 좋은 예가 되거든요!』
TV가 후반전을 시작했다.
데이빗은 계속해서 굳은 얼굴로 그라운드를 보았다.
끙끙대고서도 결국 풀어내지 못한 문제의 해답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박상민의 활동량을 따라 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카알과 데니, 꼼빠니를 이용해 묶였던 맥슨을 풀어내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당장 맥슨은 레믹보다 편안하게 달리고 있다.
저런 것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데이빗은 골대로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보았다.
질문했어야 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무둔바처럼 그를 붙들고 매달려서 배우고 익혔어야 했다.
무실점 우승? 아니, 우승? 그것도 아니면 승격 첫해에 4위 안에 드는 성적?
팀의 주장으로서 그런 성적을 위해서라면 벤치에 줄곧 있어도 상관없다고 늘 생각했으면서 막상 팀이 원하는 역할을 줄 때 한 걸음 물러났었다.
콰다당!
그때 데니가 아르노토비치와 부딪쳐 벤치 앞쪽에 쓰러졌다.
“헤이! 데니! 힘들더라도 일어나! 힘으로 붙는 거야!”
옆에 있던 동료들과 스태프는 물론이고,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있던 마틴까지 데이빗을 돌아보았다.
“승리를 위해 달려! 무실점 우승이다! 우리가 챔피언이 될 거다!”
데이빗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리며 동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직후였다.
“내 목소리보다 더 크구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관중의 고함이 통로 옆쪽에서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데이빗!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주장이야! 절대로 그걸 잊지 말라고! 선수들에게 유니온 시티의 정신을 전해 줘!”
이어진 목청 큰 관중의 고함은 유니온 시티 선수들 전체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같았다.
경기는 그때부터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았다.
원래부터 이랬어야 할 경기였는지 모른다.
철강 팀 유니온 시티와 남자들의 팀 스토크 시티라면 말이다.
콰아악! 콰다당!
삐이익!
『어후! 박상민! 고통스러운 모습입니다! 이건 퇴장도 가능할 태클일 것 같은데요?』
『발목을 직접 노린 거 같네요. 아! 그러네요. 스터드를 들고 발목을 노렸어요!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심이 달려가 크르키치를 향해 옐로카드를 높게 들었다.
『박상민 선수!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위험한 태클이었어요.』
관중들이 이런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유니온 시티 관중들은 웃옷을 벗어 들고 빙빙 돌리며 스토크 시티 관중들을 더욱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