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94화 (194/262)

제7장. 그럴 수만 있다면. (2)

유니온 시티의 집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잠깐이라도 들렀다 가시죠.”

“그렇게 하면 내가 공항으로 나온 의미가 퇴색되지. 피곤할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가 좋아. 구단의 요구 사항이니까 내일 병원에 들르는 것 잊지 말고.”

정지우에게 안과 검사를 당부한 마틴은 서두르는 것처럼 승합차를 타고 출발했다.

바로 뒤를 이어 박상민이 탔던 두 번째 승합차가 도착했다.

“감독님, 고생하셨어요.”

“뭐하러 내려. 얼른 가서 쉬어. 준석이 너는 꼭 다리 풀어 주고.”

“예, 감독님. 그럼 가 보겠습니다. 쉬세요.”

빡빡하게 예의 차릴 사이는 아니었고, 긴 비행을 마친 뒤라서 지금은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신준석과 신윤희, 유정호 역시 박용근의 권유대로 바로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난 정지우는 병원으로 움직였다.

자고 일어나자 푸르뎅뎅한 멍이 눈 주변으로 퍼지고 있어서 한국에서보다 흉해 보였다.

눈을 꼼꼼하게 살핀 의사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앞으로 열흘가량은 무리하지 말라는 주의도 주었다.

릴리의 상태가 궁금해서라도 병원에 들렀을 일이었다.

진료를 마친 정지우는 당연하게 그녀의 병실로 향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정지우를 발견한 메기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릴리가 고개를 돌렸다.

“Ji! Ji!”

정지우를 향해 양팔을 쭉 뻗은 릴리가 맑게 웃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 정지우는 릴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이렇게 움직여도 돼?”

“좋아졌어. 그리고 나, Ji가 뛰는 경기를 봤어! 굉장했어!”

꼬마 아가씨가 어찌나 빠르게 말을 하는지, 건강은 어떠냐는 말조차 물어볼 틈이 없었다.

“눈이 많이 아파?”

“아니, 검사받았는데 괜찮대.”

릴리의 질문에 답을 한 다음이었다.

“Ji, 놀라운 소식이 있어.”

“뭔데요?”

메기가 모처럼 밝은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이대로라면 한 달 뒤에 퇴원도 가능하대.”

“예?”

정지우는 얼른 고개를 돌려 릴리를 보았다.

시선을 받는 것이 쑥스럽고, 건강해졌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여자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오! 릴리! 굉장한데?”

릴리가 쑥스러운 눈을 하고 웃었다.

“고마워, Ji. 나는 요즘 매일 꿈속에서 사는 느낌이야.”

“메기, 난 실제로 도운 게 별로 없어요.”

“그렇지 않아, Ji. 당신이 릴리를 지켜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굉장한 수술을 상상조차 못했을 거야.”

정지우가 릴리에게 ‘이제 레드 블레이트에 마스코트가 등장할 일만 남았군.’ 하고 말을 건넸을 때였다.

의사 가운을 걸친 데이지가 병실로 들어섰다.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었는데, 그런 걸 표시 내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 왔어요?”

릴리에게 연결된 기계들을 살핀 데이지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정지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제 오후요.”

데이지는 답을 하는 정지우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디밀고, 멍이 퍼진 오른쪽 눈을 이리저리 살폈다.

“안과 검사는 받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구단 지시로 들렀다 올라왔어요.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고, 열흘 정도만 조심하라던데요.”

데이지는 의사였다. 그러니 상처를 볼 수 있고, 또 상태를 물어볼 수 있는 거였다.

정지우가 답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선물은요?”

상체를 바로 세운 데이지가 툭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공이 이런 식으로 날아왔다면 막았을 것 같은데, 데이지가 날린 질문에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뭐예요? 한국에 다녀온 건데 정말 그냥 왔어요?”

이런 땐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 건지.

그저 단순하게 건넨 농담일 거다. 그러니 이런 말에 또 가슴이 흔들리는 건 멍청한 일이다.

“너무했어요. 다치는 거 보고 걱정도 했는데.”

정지우가 픽 웃었을 때였다.

“용서해 줄 테니까 저녁 사요.”

메기와 릴리가 ‘오!’ 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왜 이러지?

영국에서 이런 식으로 저녁을 사라는 말이 데이트를 의미한다는 것쯤 충분히 짐작할 텐데.

장난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데이지도 혹시…….

진심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정지우는 데이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이러는 건데요?’

‘억지로 용기 낸 거예요. 싫다면 분명하게 말해 줘요.’

언젠가 복도에서처럼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심장이 조금은 빨리 뛰는 느낌이었고, 릴리와 메기의 앞에서 용기를 내줄 정도로 데이지도 같은 감정이었다는 사실이 가슴 설렜다.

이상하게 경기에 나서기 직전 같아서 정지우는 먼저 나직하게 숨을 들이켰다.

“저녁 사죠. 선물을 준비 못한 덕분에 이런 기회를 얻은 거니까, 그냥 오길 잘한 거네요.”

데이지를 민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생각해 낸 대꾸였다.

정지우가 생각하기에도 참 멋진 대꾸였…….

“선물을 사 왔으면 내가 저녁을 샀겠죠.”

그러나 확실히 이런 대화는 데이지가 한 수 위였다.

아무튼, 얼떨결에 저녁 약속을 잡았다.

데이지가 나서 준 덕분이었다.

집에 도착한 정지우는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에게 안과 검진 결과를 알려 주었고, 이어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식사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냐?”

그런데 홍삼 봉지를 입에 물고 소파에 앉았을 때, 박용근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건네 왔다.

“병원에 다녀온 뒤로 네 표정이 평소와 달라 보이는데, 혹시 눈에 이상이 있는 걸 말 못한 거냐?”

전은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박용근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소파로 다가왔다.

“지우야, 눈이 많이 안 좋은 거니?”

두 사람의 걱정하는 얼굴과 정말 그런 건가 하고 불안해하는 박상민을 보자 더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의사와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요.”

“뭐?”

박용근이 멍한 얼굴로 전은주를 돌아보았다.

“그때 집으로 초대하면 어떠냐던 의사 기억하세요? 오늘 병원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는데, 그거 말고는 다른 일 없었어요.”

“그러니까 너, 병원에 가서 데이트 약속을 하고 왔다는 거냐? 그래서 그렇게 점심 먹는 내내 표정이 이상했던 거고?”

“그냥 저녁 먹기로 한 건데요. 제 표정이 그렇게 이상했어요?”

박용근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고, 전은주가 비슷한 얼굴로 웃었으며, 박상민은 부러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이 녀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냥 저녁 먹는 거라면서?”

“감독님께서 해 주신 말씀도 생각나고, 정렬이가 실수한 모습을 지켜본 것도 있어서 그래도 되나 여쭙고 싶었어요.”

“훈련에 방해될 정도냐?”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방해될 수도 있다는 뜻이구나?”

놀라서 시선을 들었을 때, 박용근은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한눈팔지 말라고 한 건 경기나 훈련에 방해받을 정도를 말한 거지, 네 나이에 식사하는 것까지를 염려한 것은 아니었다. 설마하니 여자를 만나는 거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지?”

“그렇다기보다는…….”

박용근이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만나다 보면 다툼도 있을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신경 쓸 일도 생기고 하지 않을까요?”

“이 녀석! 전에는 그저 릴리인가 하는 아이를 돌봐 주는 의사라고 하더니, 저녁 한 번 먹는 걸로 이렇게 걱정할 정도였냐?”

“예?”

박용근과 전은주는 어쩐지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녁은 언제 먹기로 했냐?”

“아직 약속을 정하지는 않았어요.”

“경기에 방해되지 않는다면 저녁 먹는 것쯤 상관없다. 마음이 간다면 그것을 억지로 막을 수도 없을 테고, 좋은 사람이라면 네가 알 거다. 네게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웃음기를 지운 박용근이 진지하게 전해 주는 말이었다.

“정렬이는 경기 전날에도 컨디션을 조절 못할 정도로 빠져들었던 것이 문제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문제없었을 거다.”

“예.”

정지우가 답을 한 다음이었다.

“지우야, 저녁 먹으면서 내가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전해 줄래?”

전은주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잠시 세 사람이 하나로 뭉쳐 정지우를 놀리며 즐거워했다.

농담은 거기까지였다.

한 시간쯤 뒤부터 정지우는 박상민과 함께 애스턴 빌라의 경기 영상을 보았다.

12일 애스턴 빌라와의 리그 5라운드, 17일 카라바크와의 유로파 리그, 다시 21일 스토크시티와의 리그 6라운드, 이어서 25일에 웨스트햄과의 캐피털 원 컵까지, 그야말로 살인적이라고 할 만큼 경기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이곳 팀들은 정말 빠르고 많이 뛰어. 그러다 한순간에 템포를 뺏거나 뺏기면 그게 골이 되더라구.”

박상민이 TV에 시선을 둔 채로 그동안 느꼈던 것들을 혼잣말처럼 털어놓았다.

“몸싸움도 장난 아니지.”

박상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본적인 힘으로 버티지 못하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살아남기 어려운 리그인 거 같아.”

정지우는 영상에 시선을 준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에 박상민, 신준석과 함께 앤디 킴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Ji, 구장에 도착하는 대로 코치 사무실로 들러 달랍니다.”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마틴을 만나서 인사라도 할 참이었다.

고작 일주일 만이다.

그런데도 레드 블레이트에 들어섰을 때 집으로 돌아온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지난 6년 동안, 이렇게까지 홈구장이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Ji! 멋진 경기였어!”

“부상은 어때?”

하나둘씩 들어서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았고, 오른쪽 눈 주변으로 번진 멍이 점점 시커멓게 변한 것을 제외하면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나 감독님 만나고 올게.”

박상민과 신준석에게 말을 건넨 정지우는 곧바로 마틴의 방으로 움직였다. 그 짧은 복도를 지나며 마주친 스태프와 직원들이 하나같이 엄지를 치켜들며, 사우디전에서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똑똑.

노크를 하자 대답 대신 마틴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와. 피곤은 좀 풀렸나?”

“충분히 쉬었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마틴의 책상 앞에 앉았다.

“인상적인 예선이었다. 본선 진출을 축하해.”

“동료들이 잘해 준 덕분입니다. 다만, 정렬이가 부상을 당해서 그게 좀 아쉽습니다.”

“축구란 그런 운동인 거지.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후에 자네를 검사한 의사에게서 의견서가 도착했다. 눈에 올라온 출혈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열흘 정도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다더군.”

책상에 올린 두 손을 깍지 낀 마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열흘 정도 자네를 부상자 명단에 올릴 생각이다.”

멍만 남은 부상으로 열흘이나? 코뼈를 다친 선수들이 안면 보호대를 착용하고 달리는 리그에서?

“코치, 선수 선발은 전적으로 코치의 권한인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필요는 없어.”

“돌아오는 애스턴 빌라전을 시작으로 유로파 리그, 그리고 캐피털 원 컵, 다시 리그 경기를 잇따라 치러야 합니다. 명단에서 빠질 만큼 부상이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내게 문제가 있습니까?”

“Ji,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정지우의 눈을 본 마틴이 설명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FA컵 일정도 곧 돌아와. 그러니 자네 말대로 우리처럼 선수층이 얇은 팀이 감당하기에는 가혹한 일정이지.”

당연하게 정지우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번 시즌을 4위 안의 성적으로 마무리하게 된다면 우리는 챔피언스리그에 진출 자격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목표를 좀 더 선명하게 만들려는 거다.”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가능한 리그 순위에 집중하겠다는 생각입니까?”

“그렇지.”

마틴이 만족스럽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9월이다. 그런데도 우리 팀은 예상 밖의 성적에 선수들 전체가 페이스를 오버해서 뛰고 있지. 이 상태에서 정규 리그가 좀 더 격렬해지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일정을 강요하는 12월을 맞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마틴이 정지우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것처럼 말을 건넸다.

“우리는 부상을 경계해야 하고, 자네와 Sang이 없는 경기에서 최소한의 성과를 이루는 법을 익혀 둬야 해. 그래야 리그 4강과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이룰 수 있어.”

성적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리그 전체를 내다보는 시선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정지우는 새삼 프리미어리그 감독으로서 마틴의 능력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지금 준비해 놓지 않으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밀려나게 돼. 초반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관록 있는 강팀들은 늘 12월을 기준으로 저력을 발휘하니까.”

선수층이 든든한 팀의 위력은 장기 레이스에서 당연하게 빛난다.

“그런 팀들이 치열하게 자네와 Sang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있을 거다. 우리와 경기를 치렀던 첼시나 아스널이라면 반드시 다음 경기에서 대책을 내놓겠지.”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네와 Sang이 그들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다른 선수들이지. 당장 다른 팀들이 Sang을 꽁꽁 묶으면 우리는 강등을 면하는 것에 만족하는 팀이 된다.”

마틴의 마지막 말이 아팠다.

경기를 지켜 낼 수는 있지만, 승리를 가져올 수는 없는 골키퍼의 한계를 분명하게 집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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