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95화 (195/262)

제8장. 원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쯤. (1)

경기 명단에서 제외됐다고 하지만, 운동을 멈출 이유는 없는 거다. 정지우는 구장으로 나가 동료들과 천천히 달리며 몸을 풀었다.

힘겨웠던 경기와 긴 비행, 한국과 영국의 시차를 생각할 때, 정지우에게 주어진 열흘의 휴식은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리그 경기에 집중할 계획이라면 마틴은 승점을 노릴 만한 경기에 반드시 집중해야 한다.

혹시 그에게 감춰진 다른 계산이 있는 걸까?

박용근이나 정지우에게도 말하지 못할 그런 계산이?

아니다. 마틴을 믿는다. 그는 축구라는 세상에서 박용근 다음으로 정지우가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인 거다.

그가 비록 모든 것을 설명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결정을 따르고, 그가 원하는 결과에 도움 되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달리기를 끝마쳤을 때였다.

운동복 차림의 마틴이 느긋한 걸음으로 그라운드 가운데로 나섰다. 그는 중앙 부근에 준비해 놓은 공을 툭툭 차면서 정지우에게 느긋하게 다가왔다.

“Ji, 무리할 필요 없어.”

정지우의 오른쪽 눈을 보며 마틴이 픽 웃었다.

“애스턴 빌라전에는 얀센을 투입할 예정이다. 서브로는 기예르모를 대기하게 할 생각이고. 괜찮겠지?”

“선수 기용은 전적으로 코치의 영역입니다.”

“이런! 그라운드의 지휘자가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로군.”

팔짱을 낀 마틴은 마치 스태프와 농담을 주고받는 듯한 태도로 시간을 끌었다.

“오늘은 평소에 하던 훈련보다 강도를 줄이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구단 이사회가 자네를 계속 경기에 내보내라고 나를 괴롭힐 테니까.”

골대 쪽에 있는 얀센과 기예르모를 보며 마틴이 슬쩍 건넨 말이었다.

“자네는 어떨지 모르지만, 리그 중반이 되면 주전 선수들의 체력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지. 거기에 부상이 발생할 수도 있고.”

마틴은 정지우를 다독이는 느낌이었다.

“우리처럼 주전 선수들이 정해져 있는 팀들의 한계는 분명해. 그래서 나는 리그 성적에 집중하기로 한 거고.”

이미 사무실에서 들었던 말이어서 정지우는 가벼운 표정으로 그와 함께 얀센과 기예르모를 바라보았다.

“어때? 오늘은 몸을 풀 겸 해서 얀센과 기예르모를 좀 봐주었으면 싶은데?”

“알겠습니다.”

답을 한 정지우의 등을 마틴이 가볍게 두드렸다.

이사회가 구단의 운영을 맡는다면 경기의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은 감독의 몫이었다.

물론 이사회가 감독에게 요구하는 성적과 그에 따른 압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그런 일들은 어차피 선수들 영역 밖의 문제였다.

오늘 마틴은 사무실에서, 그리고 또 그라운드에 나와서까지 정지우를 존중하는 듯한 태도로 대해 주었다.

실력을 인정받는다고 그런 마틴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승점 1점이 소중한 상황에서 정지우를 경기에서 제외하는 것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정지우는 얀센에게 먼저 다가갔다.

“컨디션은 어때?”

“젊어진 느낌인데?”

“그래? 그럼 더 잘됐네. 얀센, 주말에 있을 애스턴 빌라전에 선발로 나가게 될 것 같아.”

공을 집어 들던 얀센이 빠르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코치는 우리가 그렇게 준비하길 원하고 있었어. 물론 명단이 나올 때까지는 우리 둘만 아는 거로 하는 거고.”

“왜? 왜 내가?”

“왜 이래? 유니온 시티를 프리미어리그로 이끈 건 당신이잖아. 그 거칠었던 챔피언십 리그에서 골대를 지켰던 골키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얀센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거 안 바뀔 거야. 내가 오늘부터 열흘간 부상자 명단에 올랐으니까.”

가족에게 단 한 경기라도 프리미어리그에서 선발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던 얀센이었다. 이제 그는 프리미어리그는 물론이고, 유니온 시티의 유로파 리그 첫 경기에서까지 선발로 나서게 되었다.

솔직히 얀센 정도 되는 경력의 선수가 고작 선발이라는 소식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좀 웃긴다. 그의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랬다.

“훈련 안 해?”

“해야지! 전보다 좀 더 강도를 높여서.”

정지우는 얀센과 기예르모의 훈련을 도우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지났을 때쯤 마틴은 쥬피터의 사무실을 찾았다.

“어서 오게.”

구석구석에 미소를 바른 얼굴로 쥬피터가 마틴을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는데 중요한 시기여서 눈치만 보고 있었지. 그래, 어쩐 일인가?”

말과는 달리 쥬피터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찾아온 마틴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실망하실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난 희망적인 소식을 듣는 게 더 좋다네.”

홍차를 놓아 준 쥬피터가 마틴의 맞은편 탁자에 앉았다.

“내가 크게 좌절할 소식이 아니었으면 싶군.”

“리그 경기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그 이야기에 내가 실망해야 하나?”

이런 능구렁이!

마틴은 입맛을 다신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캐피털 원 컵과 유로파 리그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흠, 우선 차를 좀 들자고.”

쥬피터는 찻잔을 들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달칵.

홍차로 목을 적신 쥬피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컵 대회야 그렇다고 쳐도 유로파 리그는 좀 의외군. 이사회는 물론이고 우리의 홈 팬들까지 무척이나 기대하는 경기였는데 말일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지금의 스쿼드로는 리그에서 성적을 거두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수 보강을 요구하는 건가?”

“박 감독과 함께 온 Sang이 활약하고 있고, 리저브 팀의 훈련 성과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보게, 마틴,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쥬피터가 불편한 심기 7에 인내 3을 섞은 표정으로 불만을 쏟아 냈다.

“레드 블레이트를 새롭게 단장할 정도로 커다란 투자를 앞둔 상황일세. 그런데 팀을 맡은 감독이 우리 팀의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다니.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잘못된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잘못 말한 거겠군? 이제 유로파 리그에 대한 판단이 조금 바뀌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오늘 Ji를 열흘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렸습니다.”

“후우-!”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한숨이었다.

“이보게, 마틴.”

마틴을 부른 쥬피터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마틴은 허벅지에 두 손을 올리고 깍지를 끼고 있었다. 저렇게 손가락을 끼우고 있을 때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라서 어지간해서는 돌이키지 못한다.

“이런 태도는 좋지 않아. 내가 아무리 자네에게 힘을 실어 주려고 해도 유로파 리그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들은 이사회는 자네에 대해 몹시 불편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어.”

“그렇다면 후임으로는 박 감독을 추천합니다.”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던 쥬피터가 기가 막힌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웃음을 뚝 자른 그가 이번엔 냉정한 얼굴을 하고 마틴을 노려보았다.

“혹시 다른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나?”

“그런 의미일 수도 있겠군요.”

“Ji는? Sang? 박 감독……. 아! 자네의 후임으로 추천한 것을 보면 박 감독은 아닌 게 분명하군.”

“회장님.”

“말하게.”

“지금 새로운 선수를 보강한다고 해도 팀의 전력이 강해지지는 않습니다. 나는 이번 시즌을 유니온 시티에서 보내고 싶고,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끝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유로파 리그를 포기하겠단 말인가!”

성질난 개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씩씩대는 쥬피터의 목에서 울려 나왔다.

“자네가 요구한 것을 내가 거절한 적이 있나? Ji의 연봉! 박 감독과 한국 선수들의 영입! 하다못해 느닷없이 마스코트라고 나온 아이의 수술비와 그 아이의 급여까지 나가게 해 줬어!”

“불편하시다면 그 비용은 내가 개인적으로 구단에 반환하겠습니다.”

“하아!”

답답함과 분노가 극에 달한 게 분명했다.

한숨을 푹 내쉰 쥬피터가 엄지와 중지로 이마의 양 끝을 꾹꾹 눌러 댔다.

“이보게, 마틴, 우린 엄청난 투자를 앞두고 있어. 그것도 상환이 아니라 증자를 통한 투자일세.”

마틴이 워낙 단호한 태도여서인지 쥬피터의 음성과 태도가 애원조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 팀과 선수들을 이용한 홍보로 충분히 만족한다네. 그런 그들에게 당장 유로파 리그만큼 홍보 효과를 거둘 만한 것이 더 있나?”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면…….”

“자네는 내게 리그 우승을 장담했었어!”

“그 목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12일부터 주르륵 이어지는 경기를 앞두고, Ji를 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그런 소리를 하나!”

다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도 마틴은 단 한 조각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보게, 마틴,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리그 경기에 집중하겠습니다.”

“후우! 그것이 Ji를 선발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회장님.”

“뭐든, 어떤 것이든, 하고 싶은 요구가 있다면 다 말해 보게.”

쥬피터가 시선을 내린 곳에서 마틴은 여전히 깍지를 끼고 있었다.

“세상에서 Ji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박 감독일 겁니다.”

“그야 그렇지.”

“박 감독을 제외하면 다음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정지우를 인질로 협박하는 건가?

쥬피터가 이를 악문 바람에 그의 볼이 씰룩였다.

“이대로 두면 Ji는 반드시 부상이 옵니다.”

“자네에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군.”

“열흘은 우리의 리그 우승을 위한 투자입니다.”

“앞에서 승점을 쌓지 못하면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중하위권에서 맴돌 수도 있어.”

번들거리는 쥬피터의 눈을 마틴은 피하지 않았다.

“짐작하고 계시잖습니까? 우리 선수들이 그때쯤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요.”

“흐음, 정말 궁금한 것이 있네. 도대체 무엇이 자네를 이렇게 고집쟁이로 만든 건가?”

“다른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그러니 이번 시즌에 나 역시 최고의 성적을 내야 합니다.”

잠시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마지막 경고일세. 나는 자네의 권한을 회수할 수 있어.”

“두 번째로 말씀드립니다. 그렇다면 후임으로 박 감독을 추천합니다.”

쥬피터가 흐느끼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감정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짧은 침묵이 다시 한 번 흘렀다.

“부탁이 있네. 유로파 리그 첫 경기에서만큼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게. 그렇게 해 준다면 자네를 원망하지 않겠네. 투자자들에게는 Ji의 부상을 핑계 댈 생각이니까 말일세.”

마틴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겠나?”

“그 경기에도 Ji가 부상자 명단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물론이지.”

지쳐서 대꾸하기도 어렵다는 듯 나온 대답이었다.

인생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가 어떤 눈빛과 태도를 보이는지 궁금하다면 꼭 지금의 얀센이 정답일 거다.

“무리해서 좋을 것 없어.”

“몇 개만 더 하자.”

훈련이라면 동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인 정지우가 그를 말릴 정도였다.

휘익! 터억! 휘익! 터억!

정지우는 스태프와 함께 얀센에게 공을 던져 주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능숙한 플레이를 펼치는 골키퍼였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갖지 못한 탓인지는 몰라도 순발력과 점프가 아쉬웠다.

그래서 위로 던져 주는 공을 제법 막아 내던 그가,

휘익! 툭!

느닷없이 옆으로 튕겨서 공을 던져 줄 때면 쉽게 자세가 무너지곤 했다.

“헉헉! 헉헉!”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자칫하면 내일 피로가 안 풀릴 수도 있어.”

“그러지.”

토요일 경기이기 때문에 내일 오전에 간단하게 몸을 풀고 점심을 먹을 때 명단이 나온다.

정지우는 얀센과 함께 라커룸으로 걸었다.

“Ji.”

그라운드를 절반쯤 빠져나왔을 때였다.

“혹시 내가 방향을 못 잡으면 전에 기예르모를 도와줬던 것처럼 나를 도와줄 수 있나?”

얀센이 진지한 얼굴로 정지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떡해서든 골대를 지켜 내고 싶다는 나이 든 골키퍼의 간절한 바람이 그의 눈에 가득 담겨 있었다.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대신 내 판단이 틀렸다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쯤은 해 줘야 해.”

얀센이 픽 웃으며 장갑 낀 오른손을 들었다.

꽈악!

골키퍼끼리 손을 마주 잡았고, 오른쪽 어깨를 툭 하고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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