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그럴 수만 있다면. (1)
점심을 먹은 뒤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병원에 다녀온 다음이었다. 박용근의 방에서 별 이상 없더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을 때 방의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박용근이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갔을 때,
“감독님, 저 장진모입니다.”
하는 답이 들렸다.
황당했지만 장진모라면 충분히 이럴 수 있는 사람 같았고, 문을 열어 줘도 문제없을 사람처럼 느껴졌다.
달칵.
“감독님! 안녕하셨습니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들어온 장진모가 정지우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 정지우 선수도 같이 있었네요.”
장진모는 먼저 전은주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후, 정지우와 악수를 나눴다.
“갑자기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일단 앉읍시다.”
박용근의 권유로 셋이서 작은 탁자에 둘러앉았고, 정지우를 억지로 말린 전은주가 서둘러 커피를 준비했다.
“제 부장님께서 기사를 급히 올린 바람에 어렵게 만든 승리의 분위기를 망친 것 같다고, 그 점에 대해 사과드리고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었구요.”
장진모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진지한 태도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소신껏 처리했던 일일 테니 굳이 그렇게 생각할 건 없소. 다만, 아는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 편치 않을 뿐이지요.”
박용근이 점잖게 답을 했을 때, 전은주가 종이컵을 장진모의 앞에 놓아 주었다.
“정지우 선수의 부상은 좀 어떻습니까?”
“병원에 다녀왔어요. 괜찮다고 하네요.”
“다행입니다. 아! 뜨거!”
장진모가 커피를 입에 넣었다가 다급하게 뗐다.
“하하하! 아후! 조금 뜨겁네요!”
역시, 이 사람은 어쩐지 허술한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협회는 외국인 감독으로 움직이기로 한 모양입니다. 송인수 위원이 김문호 감독님을 기술 위원으로 초빙하려는 것 같구요. 아무래도 누군가는 급한 일들을 처리해 줘야 하는데, 이제부터라도 사심 없는 분들을 모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부분이야 이제부터라도 남은 사람들이 잘할 거라고 믿어야지요.”
“말씀하시기 곤란하시겠지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저 나름으로 우리 축구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진모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설마? 인터뷰를 노리고 찾아온 거였나?
박용근과 정지우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저기, 제 부장님에게 공부 정말 못하는 딸이 한 명 있는데, 감독님과 정지우 선수 사인받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온 김에 좀 부탁드릴까 하고.”
박용근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전은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고, 정지우도 비슷한 얼굴로 함께 웃고 말았다.
“영국에 가시면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요. 여기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뒷면에 이왕이면 이름을 좀 넣어서 부탁드립니다.”
수첩 사이에서 사진을 꺼내 든 장진모가 박용근 앞에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못생겼지만 예쁜 뭐, 이렇게 좀 해 주십시오.”
“예쁘게 생겼구먼.”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박용근이 먼저 사인했고, 정지우가 그 아래에 비슷하게 적어 주었다.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일단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스포츠부로 옮겨 와서 감독님과 정지우 선수를 만난 것이 제겐 정말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장진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기는 한데 붙잡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혹시 부서를 옮기시나?”
장진모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이번 사건 취재로 다시 사회부로 옮깁니다.”
어쩐지 그런 것 같았다.
“자! 그럼 기회가 있을 때 또 봅시다.”
박용근이 손을 내밀었고, 장진모가 공손하게 잡았다. 그런 다음 그는 정지우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영국의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그 엄청난 환호를 절대 못 잊을 거 같네요. 정지우 선수,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아쉬움 묻은 미소를 끝으로 장진모가 방을 나섰다.
“저 양반은 어딘가 기자 같지가 않아.”
박용근의 말이 장진모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았다.
정지우는 박용근과 함께 이정렬의 병원을 찾는 일을 의논했고, 다음으로 영국에서 있을 경기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한 시간쯤 흘렀을 때였다.
띵동! 띵동!
올 사람이 없는 방의 벨이 또 울렸다.
이번엔 정지우가 얼른 일어나서 문으로 다가갔고, 밖이 보이는 렌즈에 고개를 가져갔다.
“어? 상민인데요?”
정지우가 문을 연 곳에 박상민이 짐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너 뭐야?”
“감독님! 저 왔습니다!”
“어쩐 일이냐? 내일 출발이잖아?”
방으로 들어선 박상민은 전은주에게도 꾸벅 인사를 건넸다.
“김 감독님께 전화드렸다가 감독님과 지우가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버지께서 저만 편하게 집에서 자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저 오늘 지우랑 자야 합니다.”
“상민아! 뭐하러 그래? 가서 부모님하고 하루 더 보내.”
정지우의 말에 박상민이 씨익 웃었다.
“짐 다 챙겨 왔어. 그리고 참! 우리 어머니가 너 좋아하는 낙지 젓갈 싸 주셨다. 그것도 이 가방 절반만큼.”
박상민이 가방을 앞으로 디미는 그 순간에,
띵동! 띵동!
벨이 또 울렸다.
이번엔 또 뭐지?
정지우가 문으로 시선을 주는 사이에 박상민이 얼른 문으로 움직였다.
“준석이랑 오영이, 재범이 오기로 했어.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다고.”
문에 달린 렌즈로 밖을 확인한 박상민이 얼른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우르르.
세 녀석이 온다고 했었다. 그런데 열린 문 앞에는 덩치가 커다란 사내 녀석들이 수두룩하게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준석이 형한테 들었어요. 김 감독님이 이곳 11층에 따로 장소 예약해 두었다고, 거기에서 저녁 먹으면 된다고 하시던데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반가움만큼이나 어수선함도 컸다.
“그건 뭐냐?”
거기에 선수들마다 손에 작은 찬합을 들고 있었다.
“지우 형이 영국에 살잖아요. 우리끼리 집에서 한 가지씩 가져왔어요. 저녁 따로 사 먹을 것 없이 이거로 먹으려구요.”
복도에서 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정지우가 프런트에 전화로 확인한 뒤에, 김문호가 예약했다는 11층의 장소로 모두 움직였다.
떡, 전, 부침개, 밑반찬, 박상민의 모친이 준비해 주신 낙지 젓갈, 김밥, 유부초밥, 잡채, 불고기.
커다란 테이블에 음식이 잔뜩 깔리자 뷔페 식당에 들어선 느낌마저 들었다.
모두 둘러앉아서 호텔에서 준비해 준 접시와 젓가락을 이용해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회복 훈련은?”
“각자 집에서 했습니다. 이상하게 이번엔 기자분들이 많이 찾아오셔서 그거 피하느라고 곤란하기도 했구요.”
김오영이 쑥스럽게 웃으며 답했고,
“그런데 상민이 형이 넣은 마지막 골은 보면 볼수록 웃기지 않아요?”
이재범이 정지우를 향해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어제는 너무 피곤하니까 잠도 안 오더라구요.”
선도민의 하소연과,
“그래도 어제처럼 뛸 수 있는 축구를 하고 싶습니다.”
김범주의 바람이 이어졌다.
이렇게 숨듯이 모인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함께 뛴 선수들끼리 나눈 뒤풀이가 나쁘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님! 많이 배웠습니다.”
“지우 형, 응원할게요.”
그렇게 모두 돌아가고 나서 방에 다섯 사람이 남았다.
“너도 가라니까. 나 혼자 자는 게 편해.”
“나 이대로 집에 가면 혼난다니까. 우리 어머니 당부였어.”
박상민이 어쩐지 전과 다르게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서서 더는 돌아가라고 하기 어려웠다.
“아! 나도 오늘은 여기서 잘까?”
“좁아! 그냥 가!”
“서운하다!”
정지우가 신준석과 장난처럼 대화를 주고받을 때, 박용근은 김문호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박 감독, 어때? 애들 보니까 좋지?]
“이 사람아, 전화라도 좀 해 주지.”
[그렇게 놀라는 맛도 있어야지. 8시에 유정호 사장이 호텔로 갈 거야. 정렬이가 그때 도착할 거고.]
“움직일 수 있다고?”
[수술을 안 받아도 될 거 같다던데? 일단 상태를 지켜보자고 하고. 휠체어로 움직인다니까 이따가 만나 봐.]
“그럴게.”
전화를 끊은 박용근이 내용을 알려 주었다.
이정렬은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유정호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감독님.”
녀석은 계면쩍은 얼굴이었는데 예상보다 크게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난 다음이었다.
“쌀알 크기 정도로 바깥쪽 복숭아뼈가 부서진 게 있는데요, 수술을 해도 뛰고 나면 붓는 건 피할 수 없다고, 그럴 바엔 이대로 지내보다가 통증이 느껴질 때 빼자고 했어요.”
“그렇구나. 재활은?”
“일주일 뒤부터 시작하면 된다는데, 구단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몰라서요.”
박용근이 정지우를 보았다가 다시 이정렬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일 도착하니까 가는 대로 바로 알아서 답을 주마. 아무래도 전화로 의논하기는 좀 그런 문제이기도 하고.”
“예, 감독님.”
답을 한 이정렬이 정지우를 보고는 멋쩍게 웃었다.
“건방 떤 거, 이렇게 벌 다 받은 거야. 아버지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하시고. 다리 나으면 그때부터 내 축구 시작이다. 도와주라.”
“어이구, 우리 정렬이가 달라졌어요!”
신준석의 농담이 잔잔한 웃음을 만들었고, 불편했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닦아 주었다.
공항은 전쟁터 같았다.
몰려든 팬과 취재 기자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정지우 일행은 결국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했고, 간단하나마 질문에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전에 대한 질문과 답이 몇 개 오간 다음이었다.
“이번에 협회 회장과 부회장이 엮인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죠?”
기자들은 참 희한하다.
그런 질문은 꺼내지 않기로 해 놓고는 끝내 약속을 어기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른 기자들이 혹시나 하고 눈치를 살피는 순간이었다.
박용근이 그대로 몸을 돌렸고, 정지우와 동기 둘이 뒤를 따랐다.
“그러게 왜 그런 질문을 해! 저 양반을 몰라?”
“쟤네, 아예 다음부터는 공식 인터뷰에서 빼자! 에이!”
오래된 기자들의 질책을 덮으며, ‘정지우 선수! 우리가 응원할게요!’ 하는 팬들의 응원이 들렸다.
일행이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눈물을 감추지 못한 신윤희를 유정호와 전은주가 다독여서 함께 움직였다.
출국장 안에서도 사인 요청과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요청이 끊이지 않는 걸 제외하면 다른 일은 없었다.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의 좌석에 앉고 나자, 지난 경기가 꿈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박용근과 전은주가 있고, 반대편에는 박상민과 신준석이 있는데도 말이다.
돌아오는 토요일을 시작으로 경기들이 몰려 있었다.
가장 먼저 애스턴 빌라와 프리미어리그 5라운드 홈경기가 있고, 이어서 유로파 경기가 있었으며, 다음으로 프리미어리그 6라운드 경기, 이어서 캐피털 원 컵 대회까지.
선수층이 얇은 유니온 시티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정이었다.
정지우는 의자에 몸을 묻고 슬쩍 눈을 감았다.
이동 간에는 역시 자는 게 가장 좋았다.
긴 비행을 마치고 영국에 도착했을 때 클락과 앤디 킴이 기다리고 있다가 일행을 맞았다.
“Ji, 코치가 라운지에서 기다려. 잠시만 기다려 줘.”
클락이 얼른 뛰어갔다가 마틴과 함께 돌아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먼저 나왔다.
“눈은 어때?”
“따로 검사한 결과 괜찮다고 들었습니다.”
정지우를 먼저 살핀 마틴은 이어서 박용근, 전은주와 인사를 나눴다.
“멋진 경기였습니다.”
“지우도 그렇고, 정렬이의 부상도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공항에 언제까지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클락이 운전하는 차에 박용근 내외, 정지우, 마틴이 탔고, 앤디 킴이 운전하는 차에 남은 인원이 올라갔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이제는 친근하게 느껴지는 영국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승합차는 유니온 시티를 향해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릴리가 있고, 데이지와 빌이 사는 곳.
정지우의 축구와 삶이 새롭게 시작된 곳을 향해서 달리는 길이었다.
마중까지 나온 마틴은 정지우와 박용근에게 우선 좀 쉬라고 권유하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다른 팀에서 접촉할까 봐 불안해서 나온 건가?
마틴의 옆모습을 슬쩍 본 정지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국의 오래된 건물들을 보면 이제 자연스럽게 데이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솔직히 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지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이정렬이 이런 식으로 정신 팔렸다가 슬럼프를 맞았다.
자칫 마음이 흐트러지면 손에 잡았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고, 모두에게 실망을 남기게 될지 모른다.
정지우의 시선을 끌었던 건물이 달리는 승합차의 뒤편으로 천천히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