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92화 (192/262)

제6장. 코리아상스(KoreaSangce) (2)

부천의 빌라에 도착한 시간은 얼추 자정쯤이었다.

“어? 죄송합니다. 잠이 깊게 들었었나 봐요.”

“경기를 마친 선수가 이 시간에 잠이 든 게 뭐가 죄송할 일이냐?”

박용근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정호가 먼저 주변을 살폈고, 기자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빌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유정호는 곧바로 승합차를 타고 움직였다.

“피곤할 텐데 그냥 잘래?”

“괜찮으시면 저녁 먹고서 잘게요.”

“그래. 그럼 들어가서 손 씻고 나와.”

전은주의 권유에 정지우는 얼굴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여보, 지우 어디 아픈 거 아니겠지?”

“벌써 자정이다. 거기에 저 아이라고 왜 시차를 못 느끼겠어? 정신력으로 버틴 거지. 얼른 저녁 먹여서 좀 더 재우자.”

박용근의 말이 아니어도 전은주는 이미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 문을 열고 있었다.

“도와줄까?”

“아냐. 당신도 오늘은 정말 피곤한 거잖아. 오늘만큼은 그냥 내가 준비할게. 미리 다 해 둔 거라서 할 것도 많지 않아.”

전은주가 고기를 프라이팬에 담는 동안 박용근은 물을 따라서 탁자에 놓았다.

그때 정지우가 욕실에서 나와서 주방으로 다가왔다.

“뭐 하냐? 오늘은 그냥 쉬어라.”

말을 건네면서도 박용근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부어오른 정지우의 눈을 살폈다.

“수저는 제가 놓을게요. 그런데 영국 집을 좀 작은 거로 바꿔 달라고 할까 봐요.”

“왜? 유지비가 많지? 얼마나 나오니?”

전은주가 고개를 돌리며 던진 질문에 정지우와 박용근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유지비는 구단에서 부담하는 건데요, 저는 이상하게 이 빌라가 더 포근하게 느껴져서요. 그래서 드렸던 말씀이었어요.”

그제야 전은주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 제가 할게요.”

“안 돼. 기름이라도 튀면 어쩌려고 그래? 그냥 앉아 있어.”

“그럼 밥을 뜰까요?”

“야! 그건 내 일이야. 어딜!”

셋이서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밥을 먹고 나서 30분쯤 뒤에 정지우는 눈에 한가득 졸음을 담고서 방으로 들어갔고,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당신은 안 피곤해?”

“소화나 시키고. 당신 왜 그래? 뭐 좋은 일 있어?”

“오늘이 자꾸 꿈 같아서. 벤치에 있는 당신도 멋있었고, 그라운드에서 뛰는 지우도 더할 나위 없이 빛나 보였거든.”

박용근이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그날 저녁 내내 뉴스는 월드컵 본선 진출과 관련된 소식들을 전했고, 11시부터는 경기를 다시 편성해서 새벽 1시까지 방송했다.

박용근은 TV를 틀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서 그런 내용을 알지 못했다. 거기에 기자들에게서 오는 전화를 피하기 위해 아예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려놓았던 참이다.

아침에 일어난 전은주가 혹시나 몰라 번호를 확인하다가 김문호의 이름을 발견하고 박용근에게 알려 주었다.

오전 7시경이었다.

박용근은 곧바로 김문호의 번호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박 감독?]

“응. 무슨 일이야?”

[그래! 모를 것 같더라. 지금 난리 났다. 다른 소리 말고 아침 먹고 문 꼭 걸어 잠그고 있어. 내가 유정호 사장한테 부탁해 놨으니까 9시나 10시까지 도착할 거야.]

박용근은 힐끔 전은주를 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어제 경기에 문제라도 생긴 거야?”

[그게 아니라! 새벽 6시에 허양수 회장이 협회 돈을 허하수 의장과 허상수 국회의원에게 빼돌린 자료들이 뉴스에 올라왔어. 거기에 조동익 부회장은 아들 유학 비용, 일등석을 이용한 호화 가족 여행에 협회 돈을 썼고, 한승관은…….]

말을 하던 김문호가 지친다는 것처럼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넷을 켜 봐. 선수들이 그렇게 뛰어서 월드컵 본선을 이뤘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참에 협회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여간 절대 문 열지 말고, 이 전화번호로 연락할 테니까 꼭 집에 있어.]

뭐가 급한지 김문호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야, 여보?”

“협회 비리 건이 터졌나 본데?”

박용근이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아차 했다.

정지우가 자고 있는 걸 깨울 뻔한 거다.

끼이익.

그러나 그때 정지우가 거실로 나왔다.

“편히 주무셨어요?”

“그래. 잘 잤니?”

간단하게 아침 인사를 마친 뒤에 박용근은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했다.

월드컵 진출에 관한 기사가 메인 화면을 가득 메웠고, 허양수와 조동익, 한승관의 비리에 관한 기사가 속보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문호가 왜 한승관의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는지 박용근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접대부 있는 술집과 퇴폐 마사지 가게에서 수시로 법인 카드를 사용했고, 심지어 선수들의 전지훈련과 해외 경기에 사용하는 반찬값과 숙박비에서 현금을 빼돌렸다는 내용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거기에 사회부 기사에서는 허상수 국회의원이 국가 기밀을 외부로 유출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보도가 올라와 있었다.

박용근은 고개를 갸웃했다.

국회의원이나 되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국가 기밀을 외부로 유출했을까?

박용근은 이어진 기사를 보며 쓸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허상수 의원에게 적지 않은 협회 돈을 빼 준 허양수는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것과, 덩달아 조동익과 한승관도 이번만큼은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거, 참!”

마지막에 한숨을 내쉰 박용근은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쭉 디밀었다. 보도 기자의 이름이 장진모로 되어 있어서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응. 협회 일이 좀 커졌다.”

박용근이 마우스 휠을 돌려서 대강의 기사 제목을 보여 주었다.

“무섭네요.”

정지우는 배고프단 말을 하는 것처럼 그저 덤덤하게 한마디만 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유정호가 오기를 기다리며 박용근은 TV를 켰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경기의 주요 장면, 시청 앞 광장을 시작으로 축구 팬들의 응원 모습, 김문호와 신준석, 박상민의 인터뷰, 그리고 본선에 올라가면 상대할 팀에 관한 내용이 우선 나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허양수 회장이 거액의 협회 돈을 빼돌려 허상수 의원에게 전해 준 증거가 밝혀졌습니다. 허상수 의원은 국가 기밀을 빼돌린 혐의까지 받고 있어서 사태가 심각합니다. 양상조 기자가 자세하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어진 내용은 허양수가 긴급 체포되었고, 그 일에 협조한 혐의로 조동익과 한승관이 별도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밤사이에 얼굴이 퀭하게 변한 조동익과 술이 덜 깬 듯한 얼굴의 한승관이 수사관들과 함께 움직이는 영상도 나왔다.

밤을 꼬박 새운 장진모는 부장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열심히 뛰어 준 감독님과 선수들에게 미안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원래 계획대로 며칠 뒤에 터트릴 것 너무 서두른 거 같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장진모는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거 없다. 나도 네 의견에 동의해서 바로 기사 올린 거니까. 어차피 터트릴 거라면 저들이 이름 팔려고 애쓰기 전에 이렇게 처리하는 게 훨씬 좋지.”

“그래도 이번에 많이 배웠습니다. 언제 자료들을 그렇게 모아 두셨어요?”

“미친놈! 아무렴 내가 놀고만 있었는지 아냐? 가자! 가서 뜨끈한 국밥에 소주 한잔하자.”

“예.”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란 잔인한 직업이기도 해. 다만 이런 기사를 쓸 때 절대 사심이 없어야 하고, 사회를 조금이라도 맑게 하겠다는 사명감은 반드시 지녀야 하는 거다.”

부장의 말에 장진모가 묵직하게 답을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유정호의 도움으로 부천의 빌라를 빠져나온 세 사람은 서울의 한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정해진 방이 2개여서 짐을 대충 풀었을 때 김문호가 들어섰다.

“박 감독! 피곤할 텐데 어쩌냐?”

들어선 그는 전은주, 정지우와 차례대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야 내일 출국하니까 그나마 낫지. 자네야말로 어제부터 줄곧 못 쉬었을 텐데, 앞으로도 쉽지 않아 보여서 그게 걱정이다.”

“나는 괜찮아.”

동그란 탁자에 김문호가 앉는 동안, 전은주는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저는 옆방에 가 있을게요.”

“괜찮아. 네 덕분에 모든 걸 바로잡을 기회가 생긴 건데. 그리고 너도 이제 다 컸다. 언제고 우리 축구를 이끌어야 할 사람이니까 같이 앉아. 괜찮지? 박 감독?”

“나야 상관없지.”

박용근까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서 정지우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여기는 이것밖에 없어요.”

“고맙습니다.”

종이컵에 탄 봉지 커피를 받은 김문호가 힐끔 정지우를 보았다.

“저는 그냥 물 마실게요.”

정지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은주가 앞에 물병을 놓아 주었다.

“그래. 운동선수는 몸을 알아서 관리해야지. 참! 오후에 병원 예약해 놓았으니까 꼭 들러서 점검해라. 아! 그리고 어제 경기 뛴 선수들이 전화했더라. 오늘 다 같이 모여서 밥 먹기로 했다고, 그거 좀 알아봐 달라던데?”

“이런 분위기에서 공연히 말 나올 것 같아서요. 다음에 기회를 한번 만들게요.”

“흐음!”

김문호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협회는 송인수 위원 비상 체제로 돌아가기로 했어. 그리고 본선이 확정되었으니까 최대한 서둘러서 실력 있는 외국인 감독을 초빙하기로 했고.”

“자네, 안 서운해?”

“난 처음부터 욕심 없었어. 솔직히 내 능력으로 벅차기도 했고. 자네와 지우 덕분에 여기까지 이루고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게 된 것만도 감사하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김문호가 웃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정도 했으니까 축구 교실을 제대로 해 보든지, 아니면 축구 용품점을 열든지, 어느 걸 해도 먹고는 살지 않겠어? 우리 마나님은 축구 용품점을 같이하자고 하던데?”

종이컵을 든 두 사람이 비슷하게 웃은 다음이었다.

“정렬이는?”

“하아! 그게 아무래도 두 달은 깁스를 해야 하는가 보더라고. 그렇지 않아도 담당 의료진은 유니온 시티 구단에 의논해서 이곳에서 치료하는 게 어떠냐고 묻던데…….”

박용근이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렬이도 그렇고, 구단에 이야기해야 하는 자네도 그렇고. 면목이 없다.”

“그거보단 정렬이가 상심이 클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네. 한참 폼이 올라오던 참이었는데. 가기 전에 밤에라도 한번 볼 수 있게 시간을 만들어 줘.”

“그러지.”

답을 한 김문호는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야, 이번에 정말 애 많이 썼다.”

“다들 열심히 뛰어 준 덕분입니다.”

정지우의 답에 김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오전 비행기지?”

“응. 그런 것까지는 신경 쓰지 말자. 조용하게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고마워, 박 감독.”

김문호의 진심 가득한 인사가 경기의 피로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느낌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전화기가 울어 대서 박상민의 모친은 아예 코드를 뽑아 버렸다.

박상민이 자는 것을 깨우지 않겠다고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느지막이 차린 아침이었다.

힘겨운 얼굴을 한 부친까지 세 식구가 또 아침부터 땀을 흘리며 거실에 준비한 밥상에 둘러앉았다.

박상민이 밥을 뚝 떠서 노모가 차려 준 곰국에 부어 넣었을 때였다.

달그락.

부친이 덜덜 떠는 손으로 당신 밥의 절반을 떠서 박상민의 국그릇에 넣어 주었다.

“아버지, 저 충분해요. 밥 더 가져다드릴게요.”

“나는 이렇게 많이 먹으면 속이 불편해. 어여 들어.”

벌이도 못하고, 운동하는 자식 먹으라고 고기 한번 구워 줄 수 없는 아버지가 내일 떠나는 아들에게 무언가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떠 준 밥이다.

이걸 어떻게 싫다고 하겠나.

박상민은 먹먹한 가슴을 눌러 가며 커다란 사발에 담긴 밥을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들어가세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소화 좀 시켜야지.”

힘겨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데도 부친은 계속 거실에 있겠다고 우겼다.

“방에 들어가세요. 저도 방에 있을게요.”

못 이기는 척하는 부친을 부축해서 박상민은 안방으로 들었다.

후끈한 열기가 갇혀 있는 안방은 건강한 사람이 누워 있어도 병이 생길 판이었다.

“아버지, 집 꼭 옮기세요.”

“나는 이걸로 됐어.”

“옮기세요, 아버지. 그래서 옮기신 집 사진 좀 보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영국에서 펄펄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깎은 사과를 접시에 담은 모친이 슬쩍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이렇게 두 분 계신다는 생각하면 영국에서 마음 편하게 못 자요. 그러니까 절 위해서 옮기세요. 예?”

부친이 모친을 바라보았다.

이런 양반이 아니었다. 끌이 아니라 괄괄한 성격으로 돌을 쪼갠다던 평택의 돌쟁이였던 부친이었다. 그런 부친이 모친을 바라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묻고 있는 거였다.

“아들 덕에 호강 좀 합시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서 힘에 부쳐요. 남들한테 나도 아들 덕 봤다는 소리 좀 듣고 싶구요.”

모친이 어쩐 일인지 다부지게 말을 건넸는데 부친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 꼭 사진 보내 주세요. 저 진짜로 마음 편하게 축구 하게요.”

“그래, 고맙다. 내가 아버지 잘 모실게.”

꿋꿋한 척하고는 있지만 모친은 눈이 붉게 물들었고, 부친은 물먹은 병아리처럼 애꿎은 천장을 향해 눈만 끔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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