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59화 (159/262)

제2장. 그게 저의 역할입니다. (1)

원래 신준석, 이정렬 가족과의 저녁 약속이 잡혀 있던 날이었다. 그 저녁 식사에서 박용근은 장진모 기자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전에 한 번 함께 저녁을 했었고, 오늘의 식사 자리도 기사로 나가지 않는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어우! 이 불고기가 엄청나게 생각났었습니다.”

장진모는 하여간 많이 먹었다.

저녁 내내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는데, 박용근의 언질에 따라 월드컵 예선전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감독님, 저희는 웨스트햄 경기가 끝나면 다음 날 돌아갈 생각입니다.”

적당하게 저녁을 먹고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실 때였다.

영국 생활이 지겨웠던지 신준석의 부친이 후련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여러모로 행복했습니다. 이 녀석들 고등학교 합숙 훈련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저랑 안식구는 젊어진 느낌도 들었습니다.”

신준석의 부친이 웃는 낯으로 유정호를 보았다. 그를 보면서 웃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지우 덕분에 좋은 사윗감도 얻었고, 이번에 영국에 와서는 얻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유정호와 신윤희의 고개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아래로 떨어졌다.

“이놈이 조금이라도 감독님 지시를 어긴다거나, 혹은 사람 구실 못하는 거 같으면 패서라도 사람 만들어 주시고, 그마저도 귀찮으시면 그저 연락만 주십시오. 제가 달려와서 이놈 다리를 확 그냥!”

그의 음성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쯤 앉아 있는 이들 모두 알 수 있었다.

“지우야, 혹시 이 녀석이 엉뚱한 짓거리 하거나, 감독님 말씀을 어기는 일이 생긴다면 구석으로 끌고 가서 죽도록 패 버려라.”

“아버지는? 제가 왜 감독님 말씀을 안 듣겠어요?”

“이놈아! 너! 지난 경기 보면서 나도 알고, 엄마도 알고, 누나도 알았어! 실력이 이렇게나 늘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은혜를 모르면 너는 사람 아니다.”

“예.”

신준석의 가족은 원래 좀 유쾌한 편이다.

그래서 분명 진지하게 대답한 것인데도 신준석 특유의 넉살이 묻어 있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희도 함께 돌아갈 겁니다.”

이정렬의 부친이 웃음 끝을 붙잡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말이나 표정에는 웃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용근이 답을 했는데, 그때도 이정렬의 부친은 장진모를 힐끔거리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저런 표정과 시선은 이골이 날 만큼 봤다.

가정환경이 어려운 정지우를 향한 시선이 특히 그랬는데, 후보 골키퍼들 가족의 불만은 지금의 이정렬 부친 눈빛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누구는 박용근을 찾아가 항의도 했었고, 누구는 돈 봉투를 디밀었다가 돌려받으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었다.

반면에 다른 포지션 부모들은 정지우를 챙겨 주었다.

팀 성적이 좋아야 뛰는 선수들이 좋은 대학이나 프로팀에 진학하는 거다. 그러니 필드 플레이어 선발로 뽑힌 학생의 부모들은 오히려 정지우의 선발을 반기고 있어서, 항의는 늘 후보 선수가 다른 학교로 옮기는 선에서 마무리되곤 했었다.

저녁을 먹었고, 장진모까지 넙죽 보약을 먹은 뒤에 다시 홍삼을 주르륵 입에 문 뒤에야 신준석과 이정렬, 그리고 두 사람의 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신준석의 가족들, 그리고 불만이 그대로 남은 이정렬 가족의 인사로 북적였던 저녁이 정리되었다.

“어떻게, 한숨 주무시고 이야기할까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견딥니다.”

긴 비행, 시차 때문에 부족한 잠, 거기에 배불리 먹은 뒤의 포만감까지, 말과 달리 장진모의 눈꺼풀이 반쯤은 내려앉아 있었다.

“이정렬 선수 아버님은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기자는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궁금한 걸 못 참는 걸까?

모른 척할 만도 하련만 장진모는 이정렬 부친의 태도를 콕 집어서 질문을 던졌다.

“자리를 옮깁시다.”

“그러시죠.”

박용근의 제안에 네 사람이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준석이와 정렬이를 못 믿는 게 아니라, 한국에 돌아가는 가족들에게서 말이 새어 나갈까 봐 입단속을 했던 겁니다. 이정렬의 아버님은 지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던 정렬이 때문에 속이 상하셔서 그러신 걸 거구요.”

“그런 걸 저렇게 직접 표현합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봐 왔던 사이고, 정렬이만 못 나갔으니까 충분히 서운할 만합니다. 거기에 개인적인 인터뷰를 요청한 게 있는데 그것까지 거절했으니.”

“아! 그래서 기자라고 하니까 저를 그렇게 보신 거군요. 하긴, 인터뷰를 거절하셨는데 기자가 와서 저녁까지 먹으니 충분히 서운하실 수 있겠군요.”

장진모가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도 함께 끔벅였다.

“장 기자, 그러지 말고 우선 한숨 자고 내일 맑은 정신에 이야기합시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여기 정지우 선수나 박상민 선수가 들어도 상관없다면 제가 생각하는 바를 먼저 말씀드릴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장진모가 눈을 두 번쯤 세게 감았다가 뜬 뒤에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느끼해 보일 정도로 쌍꺼풀이 짙어졌는데, 눈빛만큼은 분명 초롱초롱하게 바뀌어 있었다.

“허양수 회장이 협회의 예산 중 꽤 많은 부분을 허하수 의장과 허상수 의원에게 돌린 정황을 잡았습니다. 원래는 그 내용을 오늘쯤 터트릴 생각이었습니다.”

박용근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조동익 부회장의 기자회견에 저도 참석했었습니다. 느낌은 알 수 있지요. 기자들 사이에서 현재 협회 행정에 반발하는 기류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솔직히 기자들도 다르지 않거든요.”

식탁에 있는 전은주가 충분히 들을 정도로 장진모의 음성은 또렷했다.

“해외 경기를 취재하면 없던 애국심도 생깁니다. 형편없는 경기를 하게 되면 기자들도 치욕스럽거든요. 이번 협회의 행동은 도를 넘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께서 결심하시면 이 기회에 협회를 바로잡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장진모가 정지우를 돌아보았다.

“예선을 통과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우리 팬들과 국민에게 자긍심, 승리의 기쁨을 돌려주고 싶어요.”

장진모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박용근을 보았다.

“감독님과 선수들이 협회에 대항하는 느낌을 주시면 곤란합니다. 그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4점 차로 이긴다면 그때 허양수의 협회비 도용을 터트리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협회장만 바뀌지 않겠소?”

“사건이 큽니다. 말을 바꿀 수가 없지요. 조동익 부회장과 한승관 위원이 사용한 부정적인 거래까지 모두 털어 냈으니까요. 두 사람 내용이 크진 않아서 단독으로 터트리면 별거 없지만, 예선 통과, 협회비까지 엮이면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한승관이라야 소주값 정도 썼을 텐데?”

박용근의 질문에 장진모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그 양반이 잘 다니던 단란주점이 있어서 그쪽부터 거꾸로 팠지요. 워낙 씀씀이도 좋았고, 떠벌리기를 좋아해서 별로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단란주점까지 쫓아다니는 거요?”

“그럴 리가요! 그냥 자기 입으로 어디라고 알려 주어서 그걸 참고했을 뿐입니다.”

어딘가 미심쩍은 답이었지만, 그렇다고 더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 정도면 굳이 우리가 예선을 통과하지 않아도 충분히 문제 되는 거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진모가 분명하게 답을 했다.

“이 정도로는 절대 조동익 부회장은 물러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검찰 조사도 적당히 해결할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까요. 그게 사실 허양수 회장이 봐준 거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미 김문호의 이야기와 기사를 통해 다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예선을 통과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허양수 회장의 기사에 조동익 부회장과 한승관 위원이 협회비를 돌려쓴 것까지 터트린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가요?”

“무엇보다 국민들의 시선이 달라집니다. 다들 포기한 경기에서 승리를 이뤄 내는 것이니까요. 스포츠를 담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심을 다해 뛰어서 얻어 낸 승리가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는 배운 것 같습니다.”

“축구 팬들의 관심을 이용하시겠다는 거지요?”

“그렇다기보다는 성원을 바라는 겁니다.”

박용근이 잠시 고개를 갸웃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예선을 통과할 확률이 무척 낮은 건 아실 테고, 그렇게 됐을 경우에 그 성원이 이 아이들에게 비난으로 쏟아지지는 않겠소?”

“그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언론은 언론을 아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드시겠지만, 잘못된 것을 알면서 피하지는 마십시오.”

“흠.”

나직한 한숨과 묵직한 침묵이 커피에 부은 크림처럼 뒤엉켜 거실에 내려앉았다.

“감독님, 예선을 통과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정지우와 박상민까지 궁금한 눈으로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이건 뭐.”

박용근은 아예 고개조차 젓고 있었다.

“가능성을 퍼센티지로 말하라면 정말 답이 없는 거요.”

“그렇군요.”

“내게 인터뷰를 요구했는데, 그건 어떤 내용을 담을 생각인 거요?”

“포장을 멋지게 해야죠. 감독님의 결정이 협회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우리 축구 발전을 위한 거라는 것으로요. 그런 다음,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면 됩니다.”

정지우와 박상민을 돌아보며 씨익 웃은 장진모가 다시 시선을 박용근에게 돌렸다.

“더러운 건 제 손으로 치우겠습니다. 기자란 그런 거라고 배웠습니다. 세상에 더러운 것들을 알리고 치우는 역할, 그래서 축구 팬들과 국민들에게 바른 협회, 제대로 된 대표팀을 돌려주는 일, 그게 저의 역할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서 장진모가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이정렬의 부친은 분통을 터트렸다.

“봤지! 우리가 부탁했던 인터뷰를 거절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 햐! 세상 참! 박 감독도 결국 저렇게 변하는군.”

“이이가, 정말! 그냥 친해서 밥 먹는 거라잖아!”

“보고도 그런 소릴 해! 다음 경기 보면 당신도 알게 될 거야! 우리 정렬이가 인터뷰하고 하니까 마음이 급해진 거지. 다음 토요일에 방송 나간다니까, 그날 또 쟤는 출전 안 시키겠구만.”

“애, 들어.”

“그게 대수야! 멀쩡한 애를 이적도 못하게 해 놓고 앞길을 콱 막는데? 정렬이 자리를 상민이 놈에게 주잖아!”

소파에 앉은 이정렬의 부친은 분이 안 풀리는지 냉장고로 걸어가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셔 댔다.

“기가 막혀서. 뭐?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야? 그거 우리 들으라고 그런 거 아냐?”

이정렬의 모친도 그 부분은 서운했는지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기 자식은 경기에 나간다 이거 아냐. 어휴!”

이정렬의 부친은 거칠게 물병을 내려놓았다.

“보자. 이번 경기에 또 안 내보면 방법을 찾아야 해. 이깟 돈 어디 가면 못 받겠어? 막말로 커뮤니티 실드에서, 어! 그 세계적인 첼시를 상대로 골을 뽑아낸 애야!”

누가 앞에라도 있는 것처럼 이정렬의 부친은 삿대질까지 해 대고 있었다.

“당신도 봤지만, 방송에서 쟤 내보내려고 얼마나 매달렸어? 어? 그런 애가 인터뷰하는데 그거 좀 옆에 있어 주면 어디 덧나? 얼굴에 화상 입어? 참, 나!”

“그만해요. 토요일에 방송 나간다면서. 그럼 됐지.”

“내 말이! 그때 경기까지 나가서 골을 딱 넣으면 얼마나 보기 좋으냐고! 아니, 없는 기회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왜 우리 손으로 차린 밥상을 자꾸만 엎느냐 이거지!”

말을 마친 이정렬의 부친이 기다랗게 숨을 토해 냈다.

***

대화를 마친 장진모가 2층 방으로 올라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계단을 통해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상민이 너, 나랑 잘래?”

“그래야겠지?”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엄청난지 방문을 닫았는데도 거실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한순간 코 고는 소리가 뚝 잘렸는데, 정지우는 누가 코를 막은 것처럼 숨이 콱 막히는 느낌마저 들었다.

푸아하! 따르르르릉!

들리면 귀가 괴롭고, 안 들리면 숨이 막힌다.

박용근, 전은주, 정지우, 박상민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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