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58화 (158/262)

제1장. 그렇게 하면 방법이 있겠소? (2)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든 장진모가 책상 앞에 선 직후에 휴대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예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전화기에 대고 혼잣말로 답을 한 그는, 종이컵과 노트북을 내려놓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 이렇게 아침부터……? 어? 여보세요? 감독님! 저 장진모입니다!”

주위를 돌아본 장진모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부장 방으로 뛰어들었다.

“야! 너는 좀!”

장진모의 표정과 손짓을 본 부장이 입을 얼른 다물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아침부터 잡상인이 들어와서. 그럼요, 감독님!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졸지에 잡상인 역할을 맡게 된 부장이 얼른 달려가서 문을 닫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장진모가 쓰는 시늉을 하자 부장이 재빠르게 움직여 커다란 메모판과 펜을 가져다주었다.

[장 기자님, 지금부터 하는 통화가 기사화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약속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게 좀 있어요. 장 기자님은 이번 조 부회장의 제안을 신뢰할 수 있다고 봅니까?]

“예선 통과하면 전부 사임하겠다는 것 말씀이시죠?”

[그렇소.]

“감독님,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그 사람들 물러날 생각 없다고 봅니다. 예선을 통과하면 다른 오만 가지 핑계를 댈 거구요.”

[내 생각도 그래요.]

장진모는 탁자에 앉아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졌다.

[솔직히 말하면 예선에 나갈 생각은 있소. 대신 이번만큼은 더 이상 바보짓 하고 싶지 않아서, 혹시 예선을 통과했을 때 저들이 다른 말을 할 수 없게 할 방법이 있을까요?]

장진모가 메모장에 ‘영국 출장 가능?’이라고 적은 직후였다. 부장이 떠받들듯 두 손을 뒤집어서 연신 들어 보였다.

“감독님, 그러지 마시고, 여기가 지금 오전 9시 조금 넘었거든요. 오늘 안으로 제가 출발해서 찾아뵙겠습니다. 뵙고 말씀하시죠.”

[만나고 나서도 기사를 쓰지 말라고 요구할지 몰라요.]

“그런 거 분명한 게 저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아무튼, 가장 빠른 비행기로 출발해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통화를 마친 장진모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 앞으로 들었다.

“박 감독님 맞지?”

“맞아요.”

“이번 예선전 출전하겠다는 거지?”

“그런 거 같은데요?”

“예에에-!”

고함을 지르던 부장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바깥을 살폈다.

“어휴! 이 기특한 놈! 얼른 출발해라. 그리고 다른 신문사가 냄새 못 맡게 비행기 표는 개인 카드로 사. 추측 기사 나가면 공연히 박 감독님만 난처해진다.”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형! 그거 일단 가지고 있어 봐요. 잘하면 협회를 아예 꽁꽁 옭아맬 수 있겠어.”

“알았다. 안심하고 다녀와. 정지우랑 박상민, 그리고 거기 있는 선수들도 출전하겠지?”

“가서 만나 보면 알겠죠. 갑니다!”

문을 향한 장진모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준 부장이 씨익 웃으며 창가로 움직였다.

“축구가 당신들 것이 아니거든. 이제는 진정 축구를 위해 뛰는 코치와 선수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국민에게 돌려줘야지. 안 그래?”

부장의 눈빛이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다.

***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박용근은 장진모 기자가 올 것을 알려 주었다.

“일단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섣불리 말이 나가지 않게 조심하자. 미안하지만, 결정을 내릴 때까지 너희 둘만 알고 있고, 준석이와 정렬이에게도 다른 말을 하지 마라.”

“예, 감독님.”

말이 퍼져 나갔을 때의 상황을 익히 짐작하는 두 사람이다. 그리고 동기들은 믿어도 가족들은 언제고 말실수를 할 수도 있다.

정지우와 박상민이 단단하게 답을 했다.

“예선전을 나가겠다는 말을 뱉는 순간, 어떤 이유를 붙여도 협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꼴이 된다. 저들을 쫓아내기 위해 예선에 나간다는 인상을 주면 무조건 이 싸움에서 지는 거다.”

확실히 박용근은 정지우보다는 생각이 깊었다.

“장 기자와 충분히 의논하고 명분을 잡은 다음에 확신이 서면 나가는 것으로 하자. 한 달 이상 여유 있으니까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장은 리그 경기에 집중해야 할 때다.”

“예.”

대답을 들은 박용근이 픽 하고 웃으며 정지우를 보았다.

엉뚱한 놈!

아무렴 협회를 물겠다고 달려드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다.

오전에 개인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점심을 먹고 기예르모와 함께 반응속도를 높이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1.5미터 길이의 정사각형을 두 개, 그리고 그 한가운데 정지우와 기예르모가 각각 섰다.

네 귀퉁이에 색깔이 다른 콘을 세워 놓는데, 코치가 불러 주는 색이나 번호를 빠르게 터치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레드!”

휘이익! 터억!

기예르모가 정지우와 비슷한 속도로 오른쪽 앞에 있던 붉은색 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왼쪽 앞부터 시계 방향으로 1번 노란색, 2번 붉은색, 3번 파란색, 마지막으로 4번 검정의 순서였다.

“1번! 블루! 옐로우! 3번! 3번! 레드!”

코치가 숫자나 색을 부를 때마다 뒤쪽에 있던 스태프가 반응을 일일이 체크했다. 거기에 동영상을 찍고 있어서 훈련이 끝나면 평균 반응속도까지 나온다.

단순해 보이는 훈련이지만, 15분 만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힘이 들었다.

“10분 휴식!”

시간을 확인한 코치가 휴식을 알리자 기예르모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정지우는 무릎에 손을 짚고 서서 길게 숨을 뱉어 냈다.

지루한 훈련이다.

그러나 이런 훈련이 결정적인 순간에 실점을 막아 준다.

못할 것 같아? 내가?

당신들이 더는 축구판을 더럽히지 못하게 막아 낼 테니까 지켜보라고.

정지우는 아이스박스를 열어 비타민 음료를 꺼내 들었다.

“정말 이 훈련을 자진해서 신청한 거 맞습니까?”

“응. 왜?”

다가와서 물병을 꺼내 든 기예르모가 지친다는 표정으로 음료수 병의 뚜껑을 돌렸다.

그때 박상민과 무둔바가 골대 앞으로 다가왔다.

“코치! 휴식 시간을 이용해 우리도 이 훈련을 할 수 있습니까?”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필드 트레이너와 상의해서 결정하는 게 좋지. 이런 훈련이 모두에게 효과가 나타난다면 어느 팀이고 하고 있지 않겠나?”

“그렇군요. 그렇다면 반응속도를 올리는 다른 훈련이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이 훈련이 최선이라고 알고 있다.”

휴식기에 함께 운동했던 기억 때문인지 쉽게 생각했던 무둔바가 굵직한 머리를 끄덕이며 반대편 골대로 걸어갔다.

다른 선수들 대부분이 돌아간 다음이었다.

무둔바, 박상민, 신준석은 정지우를 따라 오전 훈련을 마치고 개인적인 수비 훈련을 함께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던 정지우가 혹시나 해서 고개를 돌린 관중석에 이정렬이 있었다.

그는 히죽거리는 얼굴로 전화기의 버튼을 양손 엄지로 빠르게 눌러 대고 있었다.

누구와 저렇게 문자를 주고받는 거지?

영국에 사는 사람은 아닐 거고, 한국은 지금 자정쯤일 텐데?

“준비해!”

정지우의 시선을 코치가 잡아당겼다.

지금은 훈련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장진모는 다크서클이 볼 중간까지 내려온 데다 퉁퉁 부은 얼굴로 레드 블레이트에 들어섰다.

“장 기자님! 어서 오세요!”

“잘 지냈어요?”

“아뇨. Ji가 협조해 주지 않아서 힘겨운 시간이었어요.”

단정한 복장의 에이미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미스터 유에게서 들었어요. 박 코치는 리저브 팀 훈련이 끝나면 이리 오기로 했으니까 잠시 쉬고 계시면 돼요.”

“에이미 사무실이잖습니까?”

“괜찮아요.”

장진모는 고맙다는 의미로 미소를 건넨 다음 ‘그라운드를 둘러봐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세요. 마침 Ji와 동료 골키퍼, 그리고 Sang, Jun, Lee가 모두 훈련 중이니까요.”

“고마워요, 에이미.”

“내가 안내할게요.”

에이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에이미, 내가 급하게 오느라 다른 곳을 들를 만한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장진모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에이미에게 내밀었다.

“지난번 도움에 대한 작은 답례요.”

“내게 주는 선물인가요?”

장진모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 ‘열어 봐도 되죠?’ 하는 질문이 넘어왔다.

“물론이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에이미는 시원시원하게 포장을 벗기고 상자를 열었다.

“와우! 정말 아름답네요!”

얇은 선들로 이루어진 작은 브로치였다.

와락!

에이미가 장진모에게 달려들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장 기자님.”

“내가 더 고맙죠.”

장진모가 그녀의 등을 넉넉하게 쓸어 주었다.

현지 시간 오후 3시 40분, 한국은 밤 12시 40분, 에이미의 포옹으로 졸음을 털어 낸 장진모가 그라운드로 나선 시간이었다.

장진모의 눈에 가장 먼저 땀을 뻘뻘 흘리며 반복 훈련을 하고 있는 정지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고작 1분 지켜본 것으로 훈련의 방식을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훈련이었다.

지금까지 보인 것으로 부족했을까?

아니면 저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무실점을 기록했던 걸까?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코치가 불러 주는 방향으로 다리와 손을 뻗어 콘을 터치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지우의 상의와 바지가 축축해 보일 정도로 젖었고, 그의 턱을 따라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도 이렇게까지 싸우고 있었던 거구나.”

장진모는 정지우의 옆에 주저앉아 있는 기예르모를 보았다.

바로 저 차이가 경기에서 실력으로 증명되는 걸 거다.

“헤이!”

반대편 골대 앞에서는 박상민이 무둔바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작지 않은 체격의 박상민이 귀엽게 보일 정도로 무둔바는 덩치가 컸다.

와락!

그런데도 박상민은 그를 상대로 공을 지켜 내고 있었고, 신준석의 마크를 피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게 박용근 키즈의 힘이겠지?

뒤에 서 있어서 정지우의 표정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상민과 신준석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저들이 어떤 생각으로 축구를 하고, 얼마만큼의 열정을 지녔는지를 말이다.

강렬한 햇빛, 녹색의 잔디, 그리고 텅 빈 파란색 관중석이 땀 흘리는 선수들과 함께 여름을 견디고 있었다.

“장 기자님.”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에이미가 뒤에서 다가왔다.

“박 감독님이 도착하셨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그녀의 재킷에 매달린 브로치가 통로를 향해 커다랗게 돌았다.

“감독님!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경기는 정말 멋졌습니다.”

“먼 길 왔을 텐데 피곤하지 않아요?”

“피곤은요? 아직 팔팔합니다. 그나저나 불편한데 이제 말씀 좀 편하게 해 주시죠?”

“그건 천천히 합시다. 자, 우선 이리 앉아요.”

유니온 시티와 관련된 사진들이 걸려 있는 벽, 스탠드, 작은 냉장고와 음료대, 책장까지.

전형적인 구단의 사무실이었다.

박용근은 장진모에게 책상 앞 의자를 권하고는 구석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약간 비스듬하게 그와 마주 앉았다.

“나는 아직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것이 어색하더군요.”

“그건 좀 그렇죠. 오히려 이렇게 책상 앞에 앉는 건 좀 괜찮은데요?”

장진모의 대답에 박용근이 웃었다.

“아차! 시원한 것 한 잔 마실까요?”

박용근은 상체를 기울여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잔을 찾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병째로 음료를 들이켰다.

“장 기자님이 집에서 식사하고 사진 찍은 것을 기사로 내지 않는 것 보고 한 번쯤 믿어 보고 싶었소. 그리고 내게 소리쳐 주던 것도 기억났고.”

“이번 출장도 다른 언론사가 눈치챌까 봐 개인 카드로 티켓을 끊었습니다. 결론이 적당하지 않다면 절대 기사로 쓰지 않겠습니다.”

박용근의 염려에 장진모가 단단하게 답을 주었다.

“솔직히 난 협회에 완전히 마음 떠났었소. 김 감독이 좀 걸리긴 했는데, 막말로 국가대표 감독까지 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도 했었고.”

장진모는 그 흔한 메모 하나 하지 않고 박용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우가 그러더군요. 예선전에 나가고 싶다고. 실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싶다고. 그래서 순수하게 응원해 주는 축구 팬들에게 축구를 돌려주고 싶다고.”

장진모는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박용근의 말을 전해 듣는 순간, 그라운드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하던 정지우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직후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기 때문이었다.

“예선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인 건 장 기자도 잘 아실 거고. 그렇더라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나와 우리 선수들이 예선을 통과했을 때, 저들이 다른 말 못하고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는 방법이 있겠소?”

“인터뷰를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기사로 작성할 인터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방법이 있겠소?”

“있을 것 같습니다.”

박용근은 잠시 장진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인터뷰하겠소.”

그러고는 분명하게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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