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0화 (160/262)

제2장. 그게 저의 역할입니다. (2)

이틀이 정신없이 흘렀다.

정지우는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고, 아침을 먹고 나간 장진모는 저녁에 들어와 박용근과 의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장 보기에 이정렬의 태도는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준석아, 너 좋다는 사람 있는데 소개 한번 받을래?”

“얀마!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예쁘냐?”

“죽이지! 우리끼리 얘긴데, TV에 나오는 애야.”

신준석, 박상민과 곧잘 농담도 주고받았는데, 26살이나 된 프로 선수에게 여자를 멀리해라, 훈련에 집중해라 따위의 충고를 하기는 어려웠다.

이틀 뒤면 웨스트햄과 프리미어리그 2라운드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오후 훈련을 끝낸 정지우는 평소처럼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넷이서 주차장으로 나와 앤디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이렇게 함께 출발해서 신준석과 이정렬을 가는 길에 내려 주면 되는 거였다.

“상민아, 먼저 들어가. 나는 병원에 들렀다가 갈게.”

“뭐냐? 또 데이트냐?”

박상민에게 말을 한 건데 질문은 신준석이 던졌다.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우리 팀 마스코트라면서?”

“그럴래?”

“그래! 집에 일찍 가 봐야 슬프다. 정렬이처럼 문자로 연락할 사람도 없고.”

“그러자.”

정지우의 답에 박상민까지 나섰는데, 이정렬은 집으로 가겠다고 답을 했다.

“너 인마, 좀 일찍 자. 그러다가 토끼 눈 되겠다.”

“걱정하지 마.”

이정렬이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하품을 커다랗게 했다.

밤에 스마트폰의 밝은 불빛을 계속 보면서 잠을 못 자는 건 동체 시력과 체력을 유지해야 하는 프로 선수에게 독이 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경기에 나서지 못해 답답한 놈에게는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교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정지우가 좀 더 확실한 자리를 잡고 있어서 더 그런 것이 걸렸는지 모른다.

“들어갈게.”

이정렬이 손을 흔들고 태연한 얼굴로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자 앤디가 곧바로 밴을 움직였다.

“저 자식, 아무래도 자꾸 빠지는 거 같은데?”

신준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들 가시면 저 녀석 불러서 얘기나 한번 하자.”

“봐서. 처음 나오면 외롭잖아. 어쩌면 향수병이 시작되는 걸 수도 있고.”

“그러면 힘들긴 하지. 그나저나 다음 경기에는 저놈 꼭 나갔으면 좋겠는데. 아! 그랬다가 지금 연락하는 아가씨가 정렬 씨, 나 정렬 씨가 멋있어서 죽을 것 같아요. 보고 싶어요, 이러면 또 어쩌지?”

“미친놈.”

박상민이 기가 막힌 것처럼 신준석을 나무라며 웃었다.

성 마테오 병원에 도착한 정지우는 동기들과 함께 바로 릴리의 병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복도를 향해 있는 창을 통해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메기가 먼저 정지우를 보았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릴리가 창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좀 더 야윈 얼굴과 왼손에 매달린 링거줄, 그리고 이제는 내려온 머리칼이 거의 없는 비니가 아프게 정지우의 눈에 담겼다.

메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었다.

“Ji!”

“잘 지냈어?”

릴리를 안아 준 정지우는 신준석과 박상민을 소개했다. 그나마 영어 공부를 좀 했다고 두 녀석 모두 인사를 건넸다.

“지난 경기에서 Sang의 활약은 정말 멋졌어.”

릴리의 말을 전해 주자 박상민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마워.’ 하고는 웃었다.

“데이지는요?”

“데스크에 물어보면 연락해 줄 거야.”

“그럼 잠깐 다녀올게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는 메기와 대화를 나눈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잠깐 의사와 의논할 게 있어서. 릴리 좀 위로해 주고 있어.”

“말이 통해야지.”

“그동안 배운 거 억지로 써 봐.”

신준석과 박상민을 병실에 남겨 두고 정지우는 데스크로 향했다.

“닥터 데이지를 만나고 싶은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간호사가 구내전화를 들어서 정지우가 왔음을 알렸다.

“Ji,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데이지가 오기 전에 간호사의 전화기로 함께 사진도 찍었다.

“고마워요, Ji.”

그렇게 두 장의 사진을 찍고 났을 때 데이지가 엘리베이터를 내려 걸어왔다. 의사 가운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어서 수술복 바지를 입고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서 와요. 그렇지 않아도 연락할까 했었어요.”

“좀 알아봤어요?”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죠.”

데이지는 엘리베이터의 앞쪽에 있는 휴게실 공간으로 움직였고, 나무를 잘라 놓은 것처럼 생긴 둥그런 의자를 가리켰다.

“Ji, 릴리는 국제선 비행기를 타기 어려워요.”

데이지가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장시간의 비행도 그렇지만, 기압에 따라 상태가 위험해질 수 있어서 아무래도 의료진을 이쪽으로 초빙하는 형식을 취해야 할 것 같아요.”

이게 이렇게 되나?

한국에서 일본은 가까워서 괜찮은 거였나?

데이지가 정지우를 살폈다.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게 생각나서. 그럼 그 의료진을 초빙할 수는 있구요?”

“스케줄을 알아보고 있어요. 학회나 이런 쪽으로 맞춰 보려고요. 우리 병원에서도 수술을 직접 볼 기회가 생긴다는 것 때문에 무척 협조적이구요.”

“비용은요?”

“초빙하는 데 비용이 좀 더 드는데, 대신 입원 비용이 줄어들어서 처음 예상했던 금액 정도가 될 것 같아요. 수술 담당 의사들이 요구할 장비는 단기 임대로 처리할 생각이구요.”

이 정도면 정지우가 듣기에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고생했어요, 닥터 데이지.”

“그냥 데이지라고 불러요. 왜 갑자기 그래요?”

“그러죠. 필요하면 구단이나, 아니면 내 개인 번호로 언제고 연락 줘요.”

“알았어요. 이번 토요일 경기에 나가나요?”

“그건 내일 점심때나 되어야 알 수 있죠. 매스컴에 선발 발표는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하구요.”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가 참 재미있는 운동이더라구요.”

이런 건 뭐라고 답하기 좀 그렇다.

“지난 경기에서 무둔바인가요? 그 선수의 헤더를 막는 모습은 정말 굉장했어요!”

처음으로 데이지가 열광하는 팬들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땐 어떤 거예요? 보고 느끼나요? 아니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가요? 공을 끝까지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높게 떠오르면 떨어지는 방법도 평소에 훈련하나요?”

머리를 뒤로 묶은 데이지가 뭘 물어보았지 할 만큼 정신없이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과 맑은 목소리가 참 좋았다.

“질문이 너무 많았나요?”

“그렇긴 하죠. 나중에 시간 되면 훈련할 때 한번 와요. 설명하는 것보다는 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훈련하는 걸 볼 수도 있어요?”

“얼마든지요. 입장료를 내야 하긴 하지만.”

정지우는 평일 훈련 스케줄을 대강 알려 주었다. 나머지는 구단에 연락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 볼게요.”

“그래요.”

대강 이야기가 끝났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병실을 향해 걸었다.

“수술 스케줄은 15일 이내에 나올 거예요. 당신이 비용을 지불해 준 덕분에 최고의 팀과 장비를 구할 수 있어서 희망이 생겼어요. 고마워요.”

“그때까지 릴리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죠?”

“그럴 거 같아요.”

병실 앞에 도착했다.

“고마워요, Ji. 훈련하는 모습 보러 꼭 갈게요.”

팔을 뻗는 데이지를 정지우가 가볍게 안았다.

영국에서 흔히 하는 가벼운 인사였고,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따듯했다. 놓고 싶지 않을 만큼.

다른 사람에게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허그를 마치고 바라보았을 때, 데이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구나 싶었다.

착각일지 모른다.

공연히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걸 거다.

“들어갈게요.”

“그래요.”

데이지에게 인사를 건넨 정지우가 병실로 들어갔다.

“왜?”

신준석과 박상민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담당 의사야. 영국식 인사고.”

한국말이어서 메기와 릴리가 무슨 말을 하나 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 훈련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갔을 때 선발 명단이 나왔다.

정지우가 선발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기 셋 중에서 신준석이 웨스 모건 대신 선발에 올라와 있었고, 박상민과 이정렬은 서브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너희 둘, 우리랑 같이 가서 저녁 먹을 때까지 웨스트햄 영상을 함께 보자. 궁금한 거 풀고 나면 실력이 부쩍부쩍 는다니까!”

점심을 먹는 내내 박상민은 영상 홍보 대사가 된 것처럼 떠들었다.

“정렬아.”

정지우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이정렬을 불렀다.

“오늘은 스마트폰 하지 말고 일찍 자. 동체 시력 떨어지면 결정적인 순간에 표시 난다.”

“그래.”

이정렬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답을 했다.

“아후! 내일이면 자유다!”

포크를 내려놓은 신준석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우리 아버지, 안 그러실 거 같은데, 잔소리 대마왕이야. 나이가 드시면서 이상하게 말이 많아지시네.”

정지우와 박상민의 눈치를 살필 수도 있을 텐데, 신준석은 또 그런 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오히려 편한 느낌이었다.

“지우야.”

“왜?”

웃는 말끝에 이정렬이 정지우를 불렀다.

“내일 내가 투입될 가능성이 있을까?”

잠이 부족한 눈을 하고 이정렬이 던진 질문이었다.

“아버지랑 어머니 가시기 전에 후반이라도 뛰게 해 달라고 감독님께 부탁하는 건 어떨까?”

정지우가 답을 하기도 전에 이정렬이 또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이런 건 분명하게 답을 해 주는 게 맞다.

“감독님이 그런 거로 선발 주시는 분이 아니잖아. 그리고 리저브 팀이 아니면 마틴 감독 소관이라 교체에 관해서 약속하시기도 어려울 거 같고.”

이정렬이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먹은 정지우는 동기 셋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경기 영상을 보자는 박상민의 말에 이정렬까지 그러기로 해서, 넷이 모두 정지우의 집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저희도 왔어요.”

“그래! 어서 와! 간식 좀 줄까?”

“조금 전에 점심 먹고 왔어요. 저희 그냥 경기 영상 볼게요.”

정지우와 박상민은 방에서 편한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신준석과 이정렬이 입고 있는 운동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박상민이 능숙하게 영상을 찾아 돌렸다.

“준석아, 저기 나오는 15번 사코, 그리고 8번 쿠야테, 27번 파예를 잘 봐 둬. 저 세 명이 치고 달리면 한순간이더라구.”

녀석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빠르게 돌리며 계속해서 신준석에게 느낌을 전해 주었다.

“지금 같은 거! 쿠야테는 직선으로는 빨리 달리는데 중앙으로 치고 들어올 때는 속도가 떨어지더라구. 드리블도 단순하고. 그러니까 네가 저기! 저 앞을 막으면 결국 옆으로 나올 수밖에 없지.”

박상민이 손날을 세워서 신준석이 막았으면 하는 공간을 가리켰다.

“저기서 공을 뺏으면 데니나 꼼빠니에게 넘기는 게 가장 효과적이고. 정렬이가 내일 교체로 들어간다면 정렬이 앞으로 뿌려 주는 것도 좋고.”

영상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넷이 축구에 관해 떠들었다.

이곳 시간이 오후 2시 30분쯤이니까, 한국은 밤 11시 30분쯤 된 시간이었다.

이정렬의 전화기로 자꾸만 문자가 날아왔는데, 녀석은 세 번에 한 번쯤 답을 했다.

박상민이 영상을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또 봐?”

“아까 얘기했던 것들을 생각하고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속도로 보는 거지.”

신준석과 이정렬이 묘한 표정으로 박상민을 보았다.

“너 지난번 선덜랜드 경기는 몇 번이나 봤냐?”

“그거? 한 열 번?”

박상민이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정지우를 바라보며 답을 건넸다.

“그럼 너, 그 경기에서 공을 잡을 때 어떻게 움직일 거라는 거 아예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그게 아냐. 지금 영상을 보는 것처럼 상대 팀 선수들의 움직임이 딱 느껴지면서 저 선수는 어떻게 움직일지, 공간을 어떻게 파고들어 갔을 때 흔들리는지를 알게 되는 거지.”

“캬하!”

신준석이 감탄사를, 이정렬은 침묵을 토해 냈다.

“이렇게 노력하는 거 감독님도 아시냐?”

“질문을 계속 드렸으니까. 함께 보실 때도 있었고.”

박상민은 신준석과 이정렬이 자신처럼 실력이 늘기를 바라는 게 분명했다.

솔직히 두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녀석의 진심에는 어딘가 겉도는 이정렬이 정신을 차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혹시라도 내일 기회를 잡는다면 이정렬이 멋진 활약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건 정지우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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