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그게 아니라니까요. (2)
콰앙!
2층 문을 걷어차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야! 야, 이눔아!”
다급한 이정렬 부친의 음성 뒤로,
쾅! 쾅! 쾅! 쾅!
계단을 부술 것처럼 거칠게 내려오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정렬이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녀석이 기다란 소파를 돌아 박용근이 앉아 있는 1인석 옆으로 걸어갔다.
“감독님!”
혹시 받는 게 너무 적다고 감독님께 대드는 건 아니겠지?
정지우의 눈빛이 빛나는 것을 본 유정호와 박상민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순간이었다.
털썩!
이정렬이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박용근의 앞에 다부지게 무릎을 꿇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무릎에 통증을 느낄 정도로 거친 동작이어서, 보고 있던 신윤희와 신준석의 모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 계단을 타고 이정렬의 부친과 모친이 내려왔다.
“아버지께서 저 모르게 에이전시와 연락하셨고, 스트라이커를 구하는 팀이 있다고 해서 이적을 의논하셨답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뻑뻑한 분위기여서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저는 감독님, 지우와 함께 뛰는 경기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저! 이런 축구 하고 싶었습니다, 감독님. 저, 감독님 밑에 있을 겁니다!”
계단의 끝에 선 이정렬의 부친이 입도 떼지 못하고 바라보는 앞이었다.
“일어나.”
박용근이 거절하기 어려운 음성으로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축구하는 놈이 무릎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움직여? 얼른 일어나!”
쭈뼛쭈뼛.
이정렬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떨궜다.
“정렬아.”
“예, 감독님.”
“넌 어딜 가도 내 제자다.”
“예.”
이정렬의 답을 들은 박용근이 시선을 들어서 그의 부친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원하시면 이적하셔도 됩니다.”
“큼.”
이정렬의 부친이 헛기침으로 답을 대신했다.
분위기가 뻑뻑한 것이 저녁을 한 번 더 먹은 느낌이었다.
“감독님, 정렬이 아버님이 곤란할 것 같아서 말을 꺼내지는 않았는데, 제게도 이적을 권유하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그때 신준석의 부친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수비수를 구하는 다른 팀이 있다면서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습니다.”
말은 신준석의 부친이 꺼냈는데, 시선은 죄 이정렬의 부친에게 돌아갔다.
“저야 죽이든, 살리든 감독님께 자식 맡긴 입장이고, 또 저 모자란 놈이 운동하면서 밝은 얼굴 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몰라서 거절했었습니다. 그리고.”
신준석의 부친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사실 준석이도 이 집에 더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남부끄러운 말씀인데…….”
말을 하던 신준석의 부친이 유정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뭐야? 그새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일단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아이를 낳고 할 생각입니다.”
이를 악물었는지 신준석 부친의 볼이 씰룩였다.
“힘든 일을 좀 줄이고, 못난 자식이지만 애 아빠 될……. 끙! 아무튼, 한집에서 편하게 지내게 하고 싶어서 이사를 결심했던 것입니다.”
신준석이 황당한 얼굴로 유정호와 신윤희를 번갈아 보았다.
유정호와 신윤희 모두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유정호야 그렇다 쳐도, 얌전하디얌전한 신윤희가?
도대체 언제? 시간이 없었는데?
신윤희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정지우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유정호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욕심 부리지 말라고 했었지요!”
어색하고 찝찝한 침묵을 깬 것은 이정렬의 모친이 던진 타박이었다.
“귀가 팔랑귀야! 팔랑귀!”
정돈하지 못한 파마머리의 모친이 거실을 걸어서 이정렬의 옆에 섰다.
“감독님, 저이가 여기 처음 오자고 했을 때도 겨우 자리 잡은 아이 앞길을 망치는 건 아닌지 걱정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혹시 하고 흔들렸었어요. 죄송해요.”
“일단 앉으세요.”
박용근이 자리를 권하고 있었는데도 모친은 움직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감독님. 오늘 이 아이가 하는 걸 보고 마음이 섭니다. 저도 준석이네처럼 이 아이 죽이든 살리든, 이제부터 감독님께 맡기렵니다. 받아 주세요.”
시선을 돌린 박용근이 정지우를 본 뒤에 입을 열었다.
“프로 선수입니다. 이적을 하지 않는다면 팀에 남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어딘지 냉정하게 들리는 답이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정렬의 모친이 고개를 돌려 입을 움찔거리며 남편을 노려보았다.
“지우야, 같이들 바람이라도 쐬고 올래?”
“예.”
정지우는 동기 셋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이다. 입고 있는 복장 그대로 나가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정지우가 현관을 나설 때쯤에야 이정렬의 부친이 어색하게 소파로 움직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이곳의 여름은 한국의 봄 날씨와 비슷해서 밤에는 선선했다.
“후우!”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고 내뱉자 그나마 속이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미안하다.”
“됐어, 인마! 오늘까지 말 안 했으면 서운할 뻔했어.”
정지우의 말을 들은 이정렬이 답답한 얼굴로 동기들을 돌아보았다.
“원래 아버지가 좀 그러셨었잖아. 그런데 이번엔 좀 심하신 거야. 어지간하면 저러다 그냥 넘어가실 줄 알았는데, 왜 저렇게까지 하셨는지 모르겠다.”
“너, 나중에 엄청 혼나는 거 아니냐?”
“상관없어. 그냥 욕 좀 먹고 마는 게 낫지, 이 바닥에서 너희랑 척지고 무슨 경기를 얼마나 뛰겠냐? 그리고 다른 팀에 갔다가 또 데니 같은 놈하고 시비 붙으면? 어후! 무섭다.”
“이 자식이, 계산이 쫙 서 있었네!”
대화를 주고받던 신준석이 이정렬의 뒤통수를 툭 쳤다.
“지우야, 미안하다.”
“됐다니까! 너 혹시 이런 걸 원하는 거냐?”
정지우가 웃는 낯으로 이정렬의 뒤통수를 때려 주었다.
“그래! 에이, 이제 속은 후련하다!”
뒤통수를 매만지며 이정렬이 웃었다.
잠시 어색한 웃음이 지난 다음이었다.
“부탁이 하나 있다.”
정지우가 동기 셋에게 말을 건넸다.
운동복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신준석과 이정렬,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는 정지우와 박상민.
덩치가 작지 않은 데다, 어두운 저녁이어서 불량배 넷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프로 선수들이니까 어디로 이적하든 그건 능력이고, 자유다. 대신 앞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가장 먼저 감독님이 아셨으면 좋겠다. 만약 한 번 더 이런 말이 뒤에서 들리면, 그때는 어떤 이유를 대든 간에 용서가 안 될 것 같다.”
“미안해.”
“알았다.”
신준석과 이정렬의 답을 들은 정지우가 박상민을 바라보았다. 놈이 아직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짓 하면 우리 어머니, 싱크대에 떠 놓았던 물그릇 집어던지실 거다. 난 너한테 찰싹 붙어서 따라다닐 거니까, 어느 팀에 가더라도 너 이적 조건에 나 끼워 줘.”
신준석이 코로 픽 웃은 다음에 얼른 팔등으로 코밑을 닦았다.
“더럽다!”
박상민의 말에 또다시 코로 웃은 신준석이 이번엔 아예 몸을 돌리며 코를 문댔다. 실제로도 이번은 좀 더러워 보였다.
“그나저나 윤희 누나는 좀 의외지 않냐?”
신준석이 불편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화제는 유정호와 신윤희에게 돌아갔다.
영국에서, 밤에 이렇게 편하게 동기 셋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쁘지 않았다.
함께 살아가는 데는 분명 이렇게 투닥거리는 것이 포함된 걸 거다.
늘 좋을 수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유정호가 불러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 부모들과 박용근은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동기들과는 그럭저럭 풀었다.
이정렬의 부친 역시 미안해하고 계면쩍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정지우는 찜찜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부친의 눈에 남은 묘한 감정이, 기껏 물에 헹구어 꺼낸 그릇에 붙어 있는 고춧가루처럼 묻어 있어서였다.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은 많았다.
합숙 훈련비 때문일 수도 있었고, 회식 순서를 건너뛸 때도 그랬다.
정지우는 박용근만 보기로 했다.
내일 2명의 동기가 집을 떠나도 박용근과 함께 있다는 것에 만족할 생각이었다.
무실점 기록을 세우고 싶다.
그래서 이번 시즌이 끝났을 때 골키퍼 순위 1위에 서 있을 계획이었다.
박용근에게 배운 축구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려 주는 데 그만한 것은 없는 거다.
박용근의 품을 벗어난 제자들의 모습?
미안하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당장 부족한 실력을 쌓을 훈련을 준비하기도 바빠서였다.
리그 시작을 앞두고 있어서 1군 선수들은 이틀간 휴식이었다. 그러나 리저브 팀 훈련은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박용근 혼자 출근하게 되었다.
짐을 옮기기 전에 불편하고 서운했던 감정들은 집을 옮긴 뒤에 초대하는 자리에서 풀기로 했다.
그때는 전은주까지 와 있을 테니까 실제로 그런 편이 더 좋을 수 있었다.
“다녀오세요!”
앤디 킴과 함께 출근한 박용근을 배웅하고 정지우는 옷을 갈아입었다.
“어디 가려고?”
“데이트.”
“뭐?”
박상민이 놀란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일찍 올 거야!”
신준석과 이정렬 가족들의 짐이라야 정말 올 때 가져왔던 커다란 가방이 전부였다. 거기에 음식을 담았던 가방은 텅텅 비어서 거든다고 나서는 것이 거북할 정도였다.
저녁이면 다시 볼 사람들을 배웅하는 것이 불편해서 정지우는 병원으로 갈 생각으로 먼저 집을 나섰다.
“그동안 고마웠다, 지우야. 멀리 가는 거 아니니까 저녁이나 내일 다시 보자.”
“예. 다녀올게요.”
정지우는 신준석과 이정렬의 부친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성 마테오 병원에 있는 릴리의 병실로 들어섰을 때, 메기와 데이지가 함께 있었다.
“Ji!”
정지우를 반갑게 맞아 준 릴리가 TV 중계로 보았던 커뮤니티 실드에 대해 조잘조잘 평가를 늘어놓았다.
“유니온 시티는 전방 압박이 좀 더 필요해.”
이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틀림없이 병원의 누군가가 해 준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꺼내 든 걸 거였다.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철저하게 역습으로 경기를 풀어야 이번 시즌 가능성이 있는 거래.”
“누가 그래?”
결국, 릴리는 전해 들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하고 말았다. 얼굴이 붉어져서 말을 못하는 릴리를 위해 정지우는 얼른 다른 질문을 꺼냈다.
“수비는? 수비는 어떻게 해야 하지?”
“수비는……?”
엄마인 메기를 힐끔 본 릴리가 다시 앙증맞은 입술을 움직였다.
“수비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골키퍼가 있어서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아.”
빠져 버린 머리칼을 감추기 위해서 비니를 쓰고 있는 릴리의 명쾌한 분석이었다.
정지우와 메기, 데이지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Ji, 개막전에는 선발로 나설 수 있어?”
“아직 명단이 안 나왔어.”
“닥터 데이지가 개막전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어.”
“정말?”
상체를 돌린 정지우의 시선 앞에서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고 있어서 단호하고 강단 있어 보였다.
“항암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내 볼 생각이에요. 이번 주 마지막 검사 결과를 보고 결정할 거구요.”
데이지의 표정에 담긴 가능성을 본 정지우가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Ji는 항상 골대 앞에 이렇게 서 있잖아.”
릴리가 양팔을 널따랗게 벌렸고, 그 바람에 왼팔에 연결된 링거 팩이 가볍게 흔들렸다.
“나 아프고 무서울 때나, 잠이 들 때 그 모습을 떠올려. 내가 자는 동안 Ji가 침대 옆을 그렇게 지켜 줄 거라고. 병이 날 데려가지 못하게.”
초록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눈이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한 대로 지켜 달라는 듯이 말이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정말이지?”
“그럼. 어떤 병도 릴리를 데려가지 못해. 내가 이렇게 지켜 낼 거니까.”
정지우가 양팔을 쭉 펴는 순간이었다.
꽈아악!
릴리가 그런 정지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작은 몸집에 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지우는 릴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릴리의 숨결에 독특한 약 냄새가 묻어 있었다.
“Ji, 만약에 Ji를 속이고, 병이 몰래 날 데려가면 우리 마미를 지켜 줄 수 있어?”
정지우는 릴리에게서 천천히 상체를 빼내며 그녀의 초록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지키는 침대에 병이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해?”
도리도리.
“나 믿지?”
끄덕끄덕.
“마미는 릴리가 빨리 나아서 지켜 줘. 너무 시간이 걸리면 나이 먹은 나까지 지켜 줘야 할지 몰라.”
‘어떻게 하지?’ 하는 표정으로 메기를 바라본 릴리가 입을 길게 늘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닥터 데이지가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할 때까지 씩씩하게 치료받아. 알았지?”
“Ji가 살았던 나라?”
이번엔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