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43화 (143/262)

제4장. 그게 아니라니까요. (1)

정지우는 골키퍼 코치를 만나기 위해 레드 블레이트의 스태프 사무실에 들어섰다.

“첼시전에서 파브레가스 슈팅 장면을 다시 보고 싶은데요.”

“그거야 가지고 있지. 이쪽으로 앉아.”

컴퓨터에서 영상을 찾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여기 있어.”

아래쪽에 100분의 1초까지를 표시한 숫자가 빠르게 흘러가며 파브레가스의 슈팅이 화면에 올라왔다.

골대 뒤편, 좌측, 우측, 그리고 멀리서 찍은 네 번의 영상을 모두 보고 난 다음이었다.

화면을 정지시킨 골키퍼 코치가 궁금한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이걸 갑자기 왜 찾았나?”

“거리도 그렇고, 타이밍도 그렇고, 분명히 잡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손에서 빠져나갔거든요. 점프를 좀 더 키우기 위해 뭘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골키퍼 코치는 먼저 고개를 갸웃했다.

“실점을 전혀 하지 않는 골키퍼란 없어. 반대로 아무리 훌륭한 스트라이커라고 해도 모든 슈팅을 골로 연결할 수는 없지.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아, Ji.”

“코치, 난 점프를 좀 더 늘릴 훈련이 필요해요.”

“시즌 중에는 무리야. 경기도 생각해야지. 지난 휴식기에 했던 훈련도 사실 좀 과했어.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 어떤 선수도 자네처럼 훈련한 적은 없었으니까.”

잠시 대화가 끊겼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른 탓이었다.

“지금처럼만 해도 돌아오는 시즌에 분명 주목받는 골키퍼가 될 거라는 데 10파운드 걸지.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

“점프가 조금 더 필요하다니까요.”

“다음 시즌에 자네가 원하는 진짜 목표가 뭐야?”

“무실점이요.”

“전 경기에서?”

정지우의 표정을 본 골키퍼 코치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프리미어리그 우승팀이 되지. 모르긴 몰라도 자네 몸값이 3천만 파운드(한화 520억 상당)는 갈걸?”

몸값이 중요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목표가 있었고, 박용근과 함께 그것을 이루고 싶을 뿐이었다.

“자네 진심이야?”

정지우의 눈을 바라본 골키퍼 코치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후우! 이런 목표를 가진 골키퍼를 처음 만난 거라서 내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게다가 앞으로 계속 경기를 해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 거고. 그런데도 훈련을 하겠다는 거지?”

정지우의 눈을 본 골키퍼 코치는 아예 고개를 저었다.

“마틴과 먼저 의논하고, 그 뒤에 우리 스태프, 그리고 트레이너들과 순서대로 상의해 보겠다. 그 정도 시간은 줄 수 있겠지?”

“알았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지우를 따라 골키퍼 코치가 함께 일어섰다.

“일단 편하게 생각해. 지나친 집중은 오히려 경기력을 망칠 수도 있어.”

“그러죠.”

용건을 마친 정지우는 사무실을 나와 식당으로 들어섰다.

동기 세 놈은 탁자에 몰려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끝났냐?”

“그래. 감독님 스케줄 확인하고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아까 들렀다 가셨어. 리저브 팀 훈련 때문에 늦으실 거라고 우리끼리 먼저 가라고 하시던데?”

“차는?”

“너 나오면 구단 사무실에 말하라고 하셨고.”

“알았어. 있어 봐.”

구단 사무실이라야 식당이 있는 복도의 건너편 왼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팀 스크립터 클락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집으로 가는 차량을 여기에서 말하라고 하던데?”

“오케이, Ji.”

클락이 뒤를 돌아보며 눈짓하자 마흔 중반쯤 된 직원이 다가왔고, 정지우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유정호였다.

“오늘 렌트할 집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어?”

“둘러볼 곳이 많지 않더라구.”

동기들이 2층으로 올라간 것을 본 정지우가 방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입는 편안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그걸 빤히 알고 있는 유정호가 정지우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물론 속옷을 갈아입을 것도 아닌 데다, 편하게 지내던 사이여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정지우가 옷을 갈아입은 다음이었다.

“지우야.”

“할 말 있어서 그래?”

유정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응.”

집을 옮기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겠구나 싶었다.

방에 딸린 작은 서재로 움직인 정지우와 유정호가 탁자에 마주 앉았다.

“먼저 미안하다.”

눈치를 살피는 얼굴로 유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집을 옮기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너랑 먼저 의논했어야 했는데, 내가 윤희 씨에 미쳐서 잠시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건 괜찮아, 형.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는 왜 이런 말을 형이 먼저 해 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는데, 결정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겠구나 싶었어. 그 말 하려고 이런 거야?”

유정호는 여전히 무거운 얼굴이었다.

“사실 오늘 집을 알아보면서 우연히 정렬이 아버님 전화 통화를 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지?

한숨을 짧게 내쉰 유정호가 문 쪽을 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정렬이 아버님이 다른 에이전트와 연락하는 것 같더라. 어쩐지 원래는 준석이와 함께 지내기로 했었던 건데, 오늘 대뜸 작더라도 정렬이 혼자 지낼 집이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구.”

정지우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누군가 바람을 집어넣는 모양인데 솔직히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들은 건, 준석이보다야 더 받아야지요, 스트라이커고, 골도 넣었는데요, 하는 아버님 말씀이 전부다.”

말을 마친 유정호가 미안함을 대신하는 것처럼 커다랗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래서 언제 옮기는 건데?”

“내일부터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놨어. 너도 알잖아? 여기는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거.”

정지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 선수다.

받는 돈이 그 선수의 능력을 가장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바닥이라, 많이 받고 싶다는 것을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너무 빠른 거다.

아직 영국 리그에 적응도 하지 못했고, 어제 겨우 데뷔 경기를 치렀는데 벌써 이러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것도 박용근이 추천한 선수로 와서 고작 한 게임 해 놓고.

정지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형.”

“말해.”

“형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건 존중할게. 대신 다음번에 형과 관련된 일이 있다면 반드시 형이 말해 줬으면 좋겠어.”

“미안하다.”

유정호의 사과를 들으며 정지우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미안할 건 없고. 그나저나 형이 내 일은 계속 봐주는 거 맞지?”

“야! 그런 말은 좀 아니다.”

“알았어.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 윤희 누나랑 그렇게 발전한 거야?”

유정호가 머쓱하게 웃는 것을 본 정지우는 더 묻지 않았다.

이정렬은 부친과 모친 앞에서 불만스럽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어제 골을 넣었던 게 하늘이 도운 거다. 두말할 것 없어. 집 옮기고 나면 이적 알아보자. 지우에게는 음식이랑 약 챙겨 주고, 감독님께는 내가 따로 인사드리마.”

“아버지, 지우랑 상민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요.”

“이놈아! 그래서 골을 누가 넣었는데! 막말로 너 혼자한테 패스한 것도 아니고. 상민이가 겨우 살려 낸 공을 골로 연결한 건 완전히 네 실력인 거잖아! 그러니 잔말 말아.”

“그게 아니라니까요.”

“허어, 참. 감독님이 정해 준 연봉이 한국보다는 많다만, 스트라이커가 귀하다는데 여기 수준에 비하면 헐값이더라. 너 축구를 얼마나 오래 할 것 같으냐? 천년만년 할래? 메뚜기도 한철이고,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지.”

못마땅해하는 이정렬에게 부친은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너 이곳에 오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자는 게 아니야. 그건 마음에 계속 품고 있어야지. 대신 어제 골을 넣은 것으로 감독님께 대한 체면치레는 대강 한 거다.”

“왜 이렇게 급하게 하시려는 건데요?”

“9월 1일에 이적이 마감된다잖냐. 그때에 맞추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하는 거고. 저녁 먹을 때도 그렇고, 당장 결정 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알았지?”

대답을 하지 않는 이정렬을 부친이 답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엄마가 남아서 뒷바라지를 할 거다. 이게 어디 우리 좋아서 이러냐?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지우가 받는 걸 생각해 봐! 지우 받는 것에 네 몫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이정렬은 답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틴은 그의 사무실에서 박용근, 골키퍼 코치, 그리고 통역을 맡은 앤디 킴과 함께 있었다.

골키퍼 코치가 노트북으로 영상을 먼저 띄웠다.

“이 장면을 보여 달라고 해서 찾아 줬었습니다. 이때 부족했던 점프 훈련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던 겁니다. 솔직히 염려되는 점이 더 많습니다.”

앤디 킴이 박용근에게 말을 전해 준 다음이었다.

마틴이 의견을 묻는 의미로 박용근을 보았다.

“슬럼프 기간이 길었던 만큼 각오가 새로운 것도 있을 거고, 전에 보였던 실력이 나오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했을 겁니다.”

당연하게 앤디 킴이 영어로 말을 전했다.

“전에 보였던 실력이라니요? 지금도 Ji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입니다.”

박용근의 말을 전해 들은 골키퍼 코치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부상 우려 때문에 훈련에 개입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또 골키퍼 코치가 있어서 그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고 싶지 않았구요. 다만, 전에 지우가 보였던 점프나 반사 신경이 둔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오- 후!”

감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탄식을 골키퍼 코치가 쏟아 냈다.

“지우와 좀 더 의논하겠습니다. 그다음에 훈련 계획을 짜는 것으로 하지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스터도 Ji의 리그 무실점 목표가 허황되지 않다고 여기는 겁니까?”

“지금까지 누구도 세우지 못했던 기록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수가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목표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놀란 표정의 골키퍼 코치와 다르게 마틴은 감정을 수습한 얼굴로 대화를 듣고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질문이 더 오간 다음이었다.

“먼저 일어나게.”

골키퍼 코치를 내보낸 마틴이 책상을 앞에 두고 박용근과 마주 앉았다.

“앤디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군요.”

마틴은 앤디를 힐끔 바라본 뒤에 바로 말을 이었다.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온이 Lee를 영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박용근의 표정을 살핀 마틴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코치도 모르고 있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미스터 유가 아니라 한국의 에이전시가 움직인 것이니까요. 박 코치도 알고 있었으면 싶어서 꺼낸 말입니다.”

“확실한 이야기인가요?”

“제안은 분명하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정도로 빠르게 나온 것도 그렇고, 또 입단속을 못한 것도 아쉬운 일입니다. 혹시 우리 구단에 연봉 인상을 요구할 생각이라면?”

마틴은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단은 그를 놓아줄 생각입니다.”

한국이라면 모를까, 이 바닥에 인맥이 없는 박용근이었다.

그렇지만 마틴이 대놓고 이야기를 건넨 것으로 봐서 충분히 신빙성 있으리란 확신쯤은 들었다.

“정렬이 때문에 감독님을 곤란하게 한 것이라면 미안합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적료를 챙길 테니까요. 짐작하기로 9월 1일이 이적 마감이기 때문에 Lee 쪽에서 속도를 내려고 할 겁니다.”

박용근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 선수가 돈을 더 받을 기회를 잡겠다는 것이라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마틴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이적료 때문에라도 쥬피터 구단주는 만족해할 겁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마틴 감독을 따라 박용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 분위기가 정말 죽여줬다.

누군가 코를 꽉 막고 있는데 입으로 음식을 넣는 기분, 딱 그런 느낌의 저녁이었다.

누군들 밥이 제대로 넘어가겠나.

대강 식사를 마쳤고, 보약을 먹은 뒤에 소파에 앉아 홍삼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감독님, 저희는 내일 오후에 짐을 옮길 생각입니다.”

말을 꺼낸 것은 이정렬의 부친이었다.

신준석의 부친이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박용근은 넉넉한 얼굴로 웃었다.

“지우의 집입니다. 그리고 이미 다 큰 선수를 제가 꼭 데리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구요. 결정하셨다면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정렬의 부친이 홀가분한 얼굴로 답을 하고는 ‘그럼 짐을 좀 챙겨야 할 것 같아서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친을 따라 올라간 이정렬, 미안해하는 신준석의 가족, 면목 없는 유정호, 괜히 죄지은 얼굴로 앉아 있는 박상민.

뭐, 다른 팀에 가겠다면 그걸 탓할 일은 아닌 거다.

방법이 좀 졸렬하긴 하지만.

‘감독님께 오늘이라도 말씀드렸어야지.’

정지우가 이정렬에게 아쉬운 점을 떠올렸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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