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그게 아니라니까요. (3)
릴리의 병실을 나선 정지우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어수선했던 하루를 릴리가 위로해 준 느낌이었다.
나흘 뒤, 토요일이면 유니온 시티의 모든 이들이 기대하던 개막전이었다.
리그 전체로 따져서 첫 경기는 오후 1시 45분에 시작하는 맨유와 토트넘, 본머스와 애스턴 빌라전이었고, 유니온 시티는 그보다 15분 뒤인 오후 2시에 선덜랜드와의 홈경기로 프리미어리그를 시작한다.
솔직히 해 볼 만한 상대였다. 거기에 레드 블레이트에서 갖는 홈경기란 이점도 있었다.
정지우는 습관처럼 차창 밖으로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버스를 탄 사람 대부분이 상점이나 건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과 달리, 생각해 보면 정지우는 늘 하늘을 보곤 했다.
혼자 지내면서부터였다.
언제고 변하지 않는 모습이 좋았고, 저 어딘가 그리운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를 박상민과 바튼이 반갑게 맞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두 놈이 멀뚱멀뚱 소파에 마주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준석이랑 정렬이는 너 나가고 바로 출발했어. 이 친구가 태워다 주고 2시쯤 돌아왔고.”
옷을 갈아입은 정지우는 식탁 한쪽에 올려진 바나나를 집어 들었다.
“선덜랜드 경기 영상 좀 볼 건데 같이 볼래?”
“그래. 과일 좀 깎을까?”
“난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정지우가 소파로 움직였고, 교대하는 것처럼 박상민이 식탁으로 향했다.
경기 영상을 찾는 동안 박상민은 사과와 멜론, 바나나를 담아 정지우가 앉은 소파로 돌아왔다.
“안 깎아?”
“귀찮잖아. 그냥 먹자.”
그동안 어딘가 주눅 들어 보이던 박상민의 변한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셋이서 선덜랜드의 경기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
조동익은 새색시처럼 얌전한 태도로 맞은편에 앉은 허양수를 바라보았다.
이진용의 부친인 이충도가 장담했던 대로 사건은 큰 문제 없이 수습되었다.
돈의 힘이다.
그리고 그 돈을 처먹은 허양수가 인맥을 동원해서 사건을 무마한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얼마나 먹었을까?
조동익은 불현듯 떠오른 궁금함을 누르며 조신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까 두 배를 불렀는데도 한 놈은 아예 처음부터 거절했고, 또 다른 놈은 잘 넘어오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흥! 대답은 잘도 하십니다.”
대답을 안 했으면 더 지랄했을 거면서.
사람의 눈에는 참 많은 것이 담긴다. 그리고 허양수는 그런 걸 놓칠 사람이 아니다.
허양수의 시선을 피해 조동익은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이놈들을 어떻게 잡아 죽인다?”
조동익에게 연결된 에이전시를 이용해 박용근이 데려간 선수들을 빼내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영국에서 있었던 커뮤니티 실드 관련 기사마다 저런 감독과 선수들을 월드컵 예선전에 불러오라는 제안과 욕설이 지긋지긋하게 달리는 판국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이대로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면 나도 더는 감쌀 방법이 없어요.”
“박용근과 정지우를 빼놓고 이번에 넘어간 세 놈을 국가대표로 선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거참,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들으시네.”
분명 존댓말인데도 조동익에게는 욕설보다 더 치욕스럽게 들렸다.
“박용근과 정지우란 놈을 빼놓으면 그걸 납득하겠냐구요. 세 놈이 아니라 박용근과 정지우란 놈을 넣어야 면피라도 하지. 설마 나더러 정말 그놈들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란 뜻은 아니시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동익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허양수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우리가 예선을 통과할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이틀 뒤에 있을 예선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면 바로 탈락이고, 비기면 다음 경기를 4점 차로 이겨야 합니다.”
“이번 예선전을 이길 확률은요?”
“이미 김문호 감독의 목표가 무승부입니다.”
허양수가 고약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이번에 가는 선수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턱과 입술을 쓰다듬던 허양수가 한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마지막 경기가 사우디아라비아전이지요?”
“예.”
조동익은 불똥이 튀기 전에 재빨리 답을 했다.
그런데 그때 허양수가 야비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하면 방법이 있겠는데? 우리가 UAE와 비기면 말이지요.”
허양수는 자신이 살아나기 위해서라면 조동익쯤 얼마든지 수렁에 밟아 넣을 사람이었다.
“우리 부회장님이 조금 수고해 주시면 말이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허양수의 말이 조동익에게 확신처럼 다가왔다.
“일단 결과를 지켜봅시다. 그리고 박용근 키즈라는 나머지 놈들 관리 잘하세요. 엉뚱한 소리 지껄이거나 다른 마음 품지 못하도록. 아시겠어요?”
“예.”
“예선에서 탈락하면 그놈들을 모아서 기자회견을 해야 합니다. 박용근이 월드컵 예선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정지우도 그래서 전반만 뛰고 국가대표를 그만둔 거다. 아시겠지요?”
“그게…….”
“왜요? 애들이 충성심이 뛰어나서 안 할 것 같다, 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시려구요?”
“아닙니다.”
운동장처럼 널따란 허양수의 사무실 바닥에 조동익의 맥 빠진 답이 힘없이 널브러졌다.
***
아침에 박용근이 출근한 뒤에 정지우는 박상민, 바튼과 함께 공항으로 출발했다.
전은주가 도착한다는 연락이 얼마나 기뻤던지 아침부터 설렐 정도였다.
오늘까지 훈련이 없어서 식사를 챙기러 오겠다는 신윤희를 말렸고, 오전은 정지우와 박용근, 박상민이 그럭저럭 해결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장의 경계 구조물에 팔을 걸치고 선 정지우는 시선을 잠시도 돌리지 않았다.
30분 조금 넘게 기다렸을 때였다.
전은주가 커다란 가방을 3개나 올린 카트를 밀며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사모님!”
정지우가 먼저 움직였고, 박상민과 바튼이 그 뒤를 따랐다.
긴 비행의 피곤함이 전은주의 얼굴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괜찮아.”
정지우의 등을 쓸어 준 전은주가 박상민과 바튼과 인사를 나누었다.
카트를 밀고 끌며 주차장으로 향했고,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정지우는 신준석과 이정렬이 집을 옮긴 일, 그리고 유정호와 신윤희의 관계를 말했고, 전은주는 커뮤니티 실드에 대한 한국의 반응을 알려 주었다.
“꽃집은요?”
“옆집 아주머니가 맡아서 하기로 했어.”
“피곤하시면 잠깐이라도 주무세요.”
전은주가 지친 얼굴인데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독 이 나이대의 여자들은 헤어스타일이 다 비슷하다.
조금 심하게 보글거리는 머리 모양 말이다.
어머니의 모습이 어땠는지 지금은 기억에서 흐릿했다.
그냥 뭉뚱그린 모습만은 분명하게 있는데 세세한 부분은 떠오르지 않는 거였다.
집에 도착한 전은주는 음식 가방을 가장 먼저 열었다.
정지우와 박상민, 바튼이 달려들어서 도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들어가서 좀 쉬세요.”
“집을 좀 치워야지.”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감독님 오실 때까지 잠깐이라도 쉬세요.”
정지우는 전은주를 방으로 밀다시피 들어갔다.
그러나 방의 상태가 전은주를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흐트러진 침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신윤희에게 내밀지 못했던 빨랫감들이 한쪽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제가 할게요.”
“빨래는 내가 좀 더 나을 거야.”
그때 박상민이 화려하게 깎은 과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사모님, 이거 드시면서 좀 쉬세요.”
“그래, 상민아. 네가 빨래 좀 해라. 내가 방 치울게.”
“왜들 이래?”
“쉬시라구요.”
“나 안 피곤해.”
전은주의 미소가 마치 커다란 보상처럼 정지우에게 다가왔다.
“아 참! 지우야! 이거!”
옷 가방을 한쪽에 놓던 전은주가 가방에서 네 귀퉁이를 묶은 분홍색 보자기를 꺼내 들었다.
“병원에 있다던 릴리라는 아이 있잖아. 이게 맞을지 모르겠는데, 선물하면 어떨까 해서 가져왔어.”
전은주가 꺼낸 것은 색동이 예쁘게 박힌 한복이었다.
솔직히 한복이 예쁘다는 생각은 처음 해 봤다.
“굉장하네요!”
“마음에 들어?”
“그럼요! 릴리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화려한 장식이 달린 족두리까지 함께 있었다.
아무튼 박상민이 빨랫감을 들고 나갔고, 정지우가 청소기를 돌리며 전은주의 일을 줄였다.
“바튼! 소파 좀 정리해 줄래?”
“물론입니다!”
남자들끼리 사는 생활에 익숙한 두 사람과 그런 거 좋아하는 철없는 영국 놈이 설치는 모습에 전은주가 두 손을 들었다.
“그만해, 지우야.”
“쉬실 거죠?”
“그래, 알았어. 점심은 어떻게 할래?”
“돼지 불고기에 비벼 먹죠. 걱정 마시고 좀 쉬세요.”
어제와 같은 공간에 전은주 한 명이 도착한 것뿐인데 이렇게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불고기를 굽고, 박상민은 넓은 접시에 밥을 준비했다.
별거 없다.
그렇게 준비한 밥에 돼지 불고기를 부어서 비벼 먹는 게 전부인 거다.
그런데 그렇게 식사 준비를 마치고 방에 들어갔을 때, 전은주는 침대에 모로 누워 양손을 머리 아래에 넣은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조심조심.
정지우는 이불을 들어 전은주를 덮어 주었다.
“응? 내가 잠이 들었니?”
“괜찮아요. 조금 더 주무세요.”
“점심 먹어야지?”
“준비 다 되면 말씀드릴게요.”
잠결에 전은주가 웃었다.
살금살금 방을 나온 정지우가 식탁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끼리 먼저 먹자.”
“너, 사모님 오시고 눈빛이랑 표정이 바뀐 거 아냐?”
“내가?”
접시에 밥을 비비며 정지우가 시선을 들었다.
“그래! 이건 뭐 나 오늘 행복해요, 이건데?”
좋았다. 나쁘지 않다. 이런 분위기 말이다.
밥을 먹고 정리까지 마친 정지우는 다시 소파로 움직여 선덜랜드의 경기 영상을 보았다.
“아직 볼 게 남았냐?”
“자꾸 보다 보면 버릇 같은 게 보이거든. 결정적인 슈팅을 날릴 때 팔이나 어깨의 움직임이 있는 선수가 있어. 왼쪽? 오른쪽? 이것만 알아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지.”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꼭 슈팅만이 아니야. 경기하다 보면 빤히 아는 기술이나 패턴에 당할 때가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 영상을 반복해서 보면 상대 팀의 빈 곳이 보일 때가 있어. 리그 경기는 정해진 팀이 돌아가면서 하는 거니까 이런 게 정말 큰 도움이 되지.”
“잠깐만, 지우야! 미안!”
박상민의 말에 정지우는 화면을 정지시켰다.
“좀 전에 내가 공을 뺏었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거지?”
“흠, 나 같으면 치고 달리다가 수비수 둘이 붙는 순간에 빼 줄 것 같은데?”
대화를 마친 정지우는 바튼에게 박상민의 질문을 전해 주었다.
“Ji, 선덜랜드는 거칠고 빠른 축구에는 강하지만, 정교한 축구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내가 감독이라면 짧은 패스를 이용해 잘게 자르고 들어가라고 지시하겠어요.”
셋이서 같은 장면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너는 패스가 좋잖아. 이런 상황에서 골키퍼인 내가 가장 부담스러운 패스는 페널티 에어리어 앞쪽으로 떨어지는 공이야. 뛰어나갔는데 공이 바운드 되면 정말 위험하니까.”
“그렇다면 패스를 낮고 빠르게 넘겨주는 게 좋겠지?”
이 정도야 박상민도 당연히 알고 있는 거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영상을 확인하고, 또 그 상황 속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었다.
“상민아, 공을 주고 다음에는 어디로 움직일래?”
“뭐?”
“결정적인 패스를 했다고 반드시 골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만약 저 상태에서 레믹이나 정렬이가 공을 빼앗긴다면 상대 팀이 그냥 기다려 주겠냐?”
“아!”
박상민이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시선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물론 그냥 서 있지는 않겠다만, 내가 본 세계적인 미드필더들은 대부분 공을 주고 나서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위치를 찾아 움직였어.”
박상민이 화면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박상민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는데, 정지우는 반드시 바튼에게 영어로 묻고 그의 답을 다시 우리말로 전해 주었다.
“저거네! 저기서 왼쪽으로 공을 돌리는 거네!”
박상민이 경기 장면 하나를 놓고 퀴즈를 맞힌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거에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제대로 속을 수 있다.”
정지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영상을 외우기 시작한 박상민에게 반드시 필요한 조언이었다.
정지우가 서브로 오래 돌지 않았다면 아마 비슷한 실수를 했을 거였다. 하긴, 서브로 그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영상을 통해 선수들의 버릇을 외우는 습관도 생기지 않았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