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6화 (116/262)

제1장. 다 같은 마음이었다 (2)

적당하게 몸을 푼 정지우가 벤치로 움직이고 난 이후에 선발 선수들이 통로를 걸어 나왔다.

“우와아아-!”

함성, 박수, 그리고 목청 큰 남자의 ‘후반엔 한 골 넣어 버리라고!’ 하는 고함이 뒤엉켜서 그라운드로 쏟아져 들어왔다.

짝짝! 짝짝짝!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짝짝! 짝짝짝!

“The world has ever seen!”

입스위치 FC 원정 팬들이 손뼉을 쳐 가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오늘 승리해서 챔피언십에 잔류하자는 그들의 염원이 단순한 응원가를 통해 울려 나오는 동안,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은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켰다.

상대가 응원하는 것을 막지 않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기예르모는 전반과 같이 골대 앞으로 가서 포스트와 포스트 사이를 걸었고, 점프해서 크로스바를 터치했다.

“이예에-!”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올 때, 양 팀 선수들은 중앙선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벤치에서 보기에 왼편이 입스위치, 오른편이 유니온 시티다.

삐이이익!

주심의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데이빗이 공을 흘려주었다.

레믹이 받아서 뒤편에 있는 라파엘에게 차 주었고, 라파엘이 카알, 카알이 무둔바, 무둔바가 다시 포그이에게 건네주었다.

한눈에도 입스위치 선수들은 다급해 보였다.

거칠고, 투박하게 뛰어다니는 그들의 몸에서 땀과 함께 잔류하겠다는 의지가 그라운드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데이빗이 공을 잡을 때마다 두 명 이상이 달려들었고, 카알이 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효율은 없었고, 공보다 빠를 수도 없었다.

투욱! 툭!

포그이가 차 준 공을 꼼빠니가 그대로 앞으로 밀어 주었다.

브라운은 입스위치의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공을 몰고 가다가 다시 뒤로 돌렸다.

우르르!

3명의 입스위치 선수가 꼼빠니에게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투우욱!

꼼빠니가 공을 카알에게 차 주었고,

투욱!

카알이 데이빗에게, 데이빗이 다시 맥슨에게 넘겼다.

같은 패스라도 이번은 멋졌다.

상대 선수들이 공을 향해 달려 나오는 바람에 페널티 에어리어 앞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툭! 툭툭! 투욱!

“우와아아아-!”

서너 번 공을 몰고 들어가던 맥슨이 느닷없이 앞으로 툭 차 놓고 입스위치 진영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수비수와 일대일 상태에서 그는 좀 더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에 있는 레믹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툭! 툭!

레믹은 오른발로 공을 잡아서 발바닥으로 굴리는 동작으로 공을 돌리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투욱!

그러고는 페널티 에어리어의 선을 따라 골대와 평행하게 달렸다.

“우와아아아아-!”

쏠듯! 쏠듯!

레믹의 동작을 따라 입스위치 선수들은 두 번이나 몸을 던졌는데, 그는 결국 슈팅을 날리지 않았다.

툭! 툭!

뒤로 물러난 레믹은 공을 다시 꼼빠니에게 넘겨주었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어떤 경기는 지루해서 45분이 2시간쯤 느껴지는 경기도 있는데, 또 몰입하게 되면 ‘언제 그 시간이 다 지났지?’ 할 정도로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겨야 하는 입스위치, 이기고 싶은 유니온 시티, 다급한 원정팀과 여유 있는 홈팀.

입스위치 FC가 굉장히 불리한 조건 같은데, 마지막 경기를 이렇게 만든 건 유니온 시티의 책임은 아닌 거였다.

입스위치 원정 팬 중 남자, 여자, 어린아이들이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챔피언십의 잔류가 유니온 시티의 승격보다 기쁘게 느껴질 거다.

비기기만 해도 잔류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면 지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원정 팬들의 심정이 어떨까?

공은 다시 뒤편을 돌다가 오른쪽 꼼빠니에게 넘어갔다.

퍼어엉!

꼼빠니는 공을 잡기 무섭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센터링을 날렸다.

휘이이익! 터엉!

레믹과 브라운, 맥슨이 몸을 날렸는데, 공은 맥슨의 머리에 맞았다.

“우-!”

그리고 크로스바를 살짝 벗어난 공은 그대로 관중석을 향해 날아가고 말았다.

맥슨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앙선을 향해 달려 나왔는데, 꼼빠니의 패스 재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휘이익!

입스위치의 골키퍼가 공을 길게 던져 주었다.

왼쪽 사이드에서 공을 받은 입스위치의 5번 선수가 앞으로 넘겨주었고, 그 공은 바로 유니온 시티의 중앙으로 넘어왔다.

무둔바와 라파엘이 버티는 중앙을 뚫기에 입스위치의 공격수들은 정교함이나 힘이 부족했다.

센스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라파엘, 힘이 좋고 위치를 차지하는 능력이 뛰어난 무둔바의 조합은 입스위치의 공격수들에게 넘기 어려운 벽처럼 보였다.

거친 숨소리, 공을 달라는 고함, 그리고 스터드가 다급하게 잔디를 밟는 소리까지, 그것들을 통해 정지우가 앉아 있는 벤치로 입스위치의 간절함이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당연하게 입스위치는 공을 외곽으로 돌렸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스웰던이었다.

그는 거친 동작으로 입스위치의 선수를 압박했다.

콰악! 콰다당!

공을 빼앗기 위해 뻗어 낸 발에 입스위치 선수가 넘어졌는데, 뒤엉킨 과정이라고 판단했는지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우우-!”

원정 응원단이 안타깝고 분한 탄성을 뱉어 내고, 주저앉은 입스위치 선수가 양팔을 들어 보였으나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후반이 그사이 30분쯤 흘렀다.

테크니컬 에어리어 있던 마틴이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준비해!”

정지우는 몸을 일으켜 운동복 상의 지퍼를 내렸다.

단조로운 경기였다. 지루한 면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갑을 낀 정지우가 벤치를 벗어나는 순간,

“예에에에에-!”

절호의 슈팅 찬스가 나온 것처럼 관중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러 댔다.

팀 스크립터가 대기심에게 달려가서 교체를 알리는 동안, 정지우는 발목을 돌려 가며 사이드라인 앞에 섰다.

벤치에서 맡을 수 없던 잔디 냄새, 좀 더 뚜렷하게 들리는 선수들의 고함과 거친 숨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감싸는 관중들의 함성이 정지우의 교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삐익!

공이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가자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대기심이 등번호가 적힌 패널을 높게 들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홈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속도로 뛰어나오는 기예르모에게 손뼉을 쳐 주었다.

벤치 앞으로 달려온 기예르모가 양손을 들어 정지우와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그라운드를 빠져나왔다.

이런 경기에서 공연히 파울 받을 이유는 없는 거다.

정지우는 천천히 달리는 것처럼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텅!

가까운 쪽 크로스바를 발로 한 번 찬 후에, 반대편으로 뛰어가 역시 발바닥으로 툭 걷어찼고, 중앙으로 돌아와 높다랗게 몸을 띄웠다.

툭!

“예에에에에에에에-!”

주심이 한숨을 푹 쉬는 것처럼 상체를 들썩인 후에 휘슬을 입에 물었다.

삑!

입스위치의 공이었다.

벤치 반대편 중앙선 부근이라 딱히 위협적인 위치는 아니었다.

몇 차례 공이 오간 뒤에 유니온 시티의 포그이가 공을 잡았고, 그는 바로 카알에게 넘겨주었다.

공을 받은 카알은 바로 정지우를 향해 뒤로 흘려주었다.

퍼어어엉!

정지우는 있는 힘껏 공을 앞으로 차 주었다.

정규 시간이 5분가량 남았다. 그리고 이렇게 평범한 경기는 추가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4분을 넘기지 않는다.

챔피언십에서 밀려 나가면 팀의 절반은 부서져 나간다.

줄어든 예산, 빡빡한 일정, 그리고 이리저리 팔려 가는 선수들까지.

입스위치 선수들은 정말이지 절박한 느낌으로 뛰어다녔다.

그들이 원하는 한 골이 챔피언십에 잔류를 허락하는 증명이 되고, 오늘 경기를 위해 달려온 팬들에게 더할 수 없는 선물이 될 거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경기 종료를 앞두고 레드 블레이트가 조금씩 다시 흥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시즌에도 레드 블레이트에서 경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들과의 대결이다.

전 세계의 많은 축구 팬이 관심을 가지고 매 경기를 지켜볼 것이고, 유니온 시티의 성적과 선수 명단, 그리고 이적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팀이 된다는 의미였다.

정규 시간이 끝나 가자 대기심이 전광판을 높다랗게 들어 추가 시간이 3분임을 알렸다.

“제발 좀 넣어 봐!”

앳된 고함이 레드 블레이트에 애처롭게 울려 나왔다.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고함을 지른 소년에게 오늘은 잔인한 날이 될 거다.

콰악! 콰다당!

삐이익!

무리하게 달려들던 입스위치의 선수와 꼼빠니가 부딪쳐서 경기가 잠시 중단됐다.

누가 봐도 꾀병이나 엄살이 아니어서 빨리 일어나라고 손짓도 못한다. 게다가 일어난다고 해도 공격권은 유니온 시티에게 있는 거였다.

팀 닥터가 달려가자 주심이 두 팔을 아래로 내려 그라운드 밖에서 치료할 것을 지시했다.

절뚝거리며 꼼빠니가 나가고, 주심이 지정해 준 자리에 데이빗이 공을 세워 놓았다.

삐이이익!

추가 시간마저 이미 지나 있었다.

퍼어어엉!

데이빗이 골대를 향해 기다랗게 공을 날렸고, 선수들이 솟구쳤다.

터엉!

브라운이 공을 따냈다.

그의 머리에 맞고 아래로 떨어진 공이 그라운드에 튕기는 순간이었다.

투우욱!

레믹이 귀신처럼, 입스위치 팀에게 저승사자처럼 나타나 골대를 향해 공을 밀어 넣었다.

철렁!

공은 입스위치 골키퍼가 뻗은 다리를 타고 넘는 것처럼 골대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예에에에에-!”

잔인한 장면이었다.

레믹이 양팔을 벌리며 골대를 지나 홈 관중들이 있는 앞으로 달리는 동안, 원정 응원단에 있던 금발의 소년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가끔 영국 리그에서의 축구가 전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도시와 도시가 맞붙는 처절한 전쟁.

진 팀의 관중들은 분하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이긴 팀은 그 맞은편에서 환호성을 터트린다.

레믹은 공중으로 뛰어오르지도 않았고, 뽀빠이 흉내를 펼치지도 않았다. 그저 달려간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디민 자세로 어깨를 두드리기만 했다.

모두들 알고 있어서 그랬을 거였다.

이번 골이 입스위치 관중들과 선수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말이다.

중앙선에 양 팀 선수들이 모여 선 다음이었다.

삐이익!

주심이 경기를 다시 시작하라고 휘슬을 불었다.

투욱!

입스위치 선수가 공을 옆으로 밀어 준 직후였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이이익!

주심은 바로 경기를 종료시켰다.

“예에에에에에에에-!”

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났다.

아스널전부터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즌이었다.

정지우는 양손 검지를 높게 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끝났어요! 다음 시즌은 목표했던 것들을 이루고 싶어요.’

손을 내렸을 때 관중들은 어깨를 붙잡고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를 불러 댔고, 선수들이 뒤엉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정지우는 골대를 벗어나 벤치를 향해 걸었다.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쳤고, 다가오는 입스위치 선수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벤치 앞쪽으로 선수들이 모였다.

“헤이! 코치에게 추억 하나쯤 선물해야지!”

데이빗의 제안에 우르르 달려가서 마틴을 둘러싸 위로 들었다.

“헤이! 헤이! 헤이!”

그를 높다랗게 들 때마다 관중들이 함성을 질러 주었다.

재킷이 뒤틀리고, 셔츠가 바지에서 기어 나온 마틴이 팔을 뻗어 데이빗과 정지우의 어깨에 걸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의 응원가에 맞춰 그들과 선수들이 한 몸처럼 제자리에서 뛰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다음 시즌을 기대하는 관중들의 열기가 경기 때보다 더 강렬하게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레믹에서부터 반대쪽 끝에 선 무둔바까지, 이 순간만은 다 같은 마음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언제 들어도 심장을 뛰게 하는 응원가가 끝났다.

“이예에에에에에에-!”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정지우는 높다랗게 든 손으로 계속해서 손뼉을 쳐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박수를 치는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다음 시즌이 이렇게 기대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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