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7화 (117/262)

제2장. 동대문의 개들. (1)

사람들이 축구만 바라보고 사는 건 아니다.

예선전에 분통이 터진 한국 축구 팬들이 저주에 가까운 댓글을 달고, 커뮤니티마다 분노에 가득 찬 글들이 올라온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고.

챔피언십 리그가 끝나고 정확하게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장진모 기자가 또 한 건 해냈다.

<박용근 전 김문호 축구 교실 감독, 유니온 시티 리저브 팀 감독 계약>

물론 공식 오피셜이어서 다른 기자들도 비슷한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런데 장진모는 달랐다.

쥬피터 구단주와의 독점 인터뷰를 따냈고, 그 내용을 기사에 붙였기 때문에 클릭수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 :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서도 유니온 시티 팀에 관심을 가진 팬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의 팬들께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쥬피터 : 이렇게나마 한국 팬들께 인사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반갑습니다. 지난 시즌을 우리는 환상적으로 보냈습니다. 한국의 팬들이 우리 구단을 응원해 준다는 것 역시 그런 환상적인 일 중 하나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장 : 이제 프리미어리그에서 경기하게 됩니다. 감회나 각오를 들을 수 있을까요?

쥬피터 : 많은 스태프와 선수들이 애써 준 덕분에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무엇보다 미스터 어메이징, Ji의 활약이 컸습니다. 스태프, 선수들, 관중들 모두 앞으로 맞이할 프리미어리그에서 Ji가 펼칠 활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쥬피터의 인터뷰는 영어 원문을 삽입해 놓았다.

그가 한국의 팬들을 위해 립서비스를 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장진모가 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는 증명 같은 거였다.

<장 : 많은 선수들이 있지만, 정지우 선수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지우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쥬피터 : 그를 내가 평가한다고요? (웃음) 그는 한마디로 환타스틱하고 어메이징한 선수입니다. 우리가 그와 다음 시즌을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입니다. Ji의 플레이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나와 우리 스태프는 더 많은 분들이 Ji의 플레이를 통해 감동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쥬피터가 점잖은 얼굴에 웃음을 담고 있는 사진이 인터뷰 기사 중간에 담겨 있었다.

<장 : 박용근 감독과도 계약하셨습니다. 그분과 계약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쥬피터 :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뛰어난 지도 능력을 갖춘 분과 함께할 기회를 잡았고,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스태프들 모두 박 감독님이 우리 리저브 팀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장 :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요?

쥬피터 : 벌써 끝나는 건가요? (웃음) 정지우 선수는 많지 않은 경기에서 우리 유니온 시티가 보여 주고 싶은 플레이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한국 팬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마지막 사진에서 쥬피터가 어색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손을 흔드는 사진이 연달아 있었다.

기사의 마지막에 장진모는 ‘축구의 종주국에서 인정받는 우리 감독과 선수들이 정작 고국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의 월드컵 진출은 요원할 것이다.’라는 따끔한 일침을 달아 놓았다.

전은주가 푸짐하게 차려 놓은 저녁이었다.

식탁 한가운데에서 삼겹살이 익어 가고, 비장했던 소주가 식탁에 올라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지우가 내민 잔에 박용근이 소주를 채워 주었는데, 그 순간 전은주의 눈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해 보았나?

새벽에 일어나 도박 사이트를 통해 정지우를 응원하면서 단 한 조각도 덕을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 내내 불고기 들려 보내고, 전지훈련비를 내준 거?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번도 아깝다거나, 본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때 정지우가 보여 준 모습만으로도, 박용근과 전은주를 챙겨 준 마음만으로 차고 넘치게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정지우가 박용근을 이끌어 주었다.

연봉? 감독의 지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축구가 인생의 전부인 박용근이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한다.

“이 사람이? 지우 기다리잖아. 얼른 잔 받아.”

“응, 여보.”

전은주가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눈은 벌겋게 변해서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이다.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잔을 채워 주며 정지우가 건넨 말에 전은주는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소주병을 내려놓은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빙 돌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전은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사모님이 예전에도 이렇게 울음이 많으셨어요?”

“갱년기가 왔나 본데?”

박용근의 실없는 대꾸에 정지우와 유정호가 흐느끼듯 웃었고, 코를 훌쩍인 전은주가 밉지 않은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우리 사모님, 이제 웃으시네?”

“얘는!”

정말 정지우의 넉살이 많이 늘었다.

“감사합니다. 저 받아 주셔서요.”

그러나 두 번째 건넨 정지우의 말에 전은주는 또다시 눈물이 울컥 올라온 얼굴을 했다.

“이 녀석이 자꾸 울렸다, 웃겼다 할래?”

“제가요?”

“그래! 너 때문에 삼겹살 다 탄다.”

“그럼 안 되죠.”

정지우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박용근이 잔을 들었다.

“다음 시즌을 위해서 건배하자.”

감정을 추스른 전은주까지 훌쩍이며 잔을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당장 내일부터 박용근의 통역을 맡게 된 유정호의 말을 끝으로, 잔을 부딪친 네 사람이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행복이란 거 별거 없는 거였다.

이렇게 네 사람이 앉아서 함께하는 저녁이면 되는 거다.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바튼이 없으니까 아쉬운데?”

“지우에게 온 선물들과 편지가 꽤 많은가 봅니다.”

박용근이 고기를 집으며 건넨 말을 유정호가 받았다.

FA컵 결승 이후로 유니온 시티에 편지와 과자, 손으로 그린 정지우의 모습, 심지어 옷과 양말까지 날아들고 있었다.

수취인은 당연하게 정지우였다.

식사 중에도 유정호는 액정이 밝아질 때마다 전화기를 확인했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 신청이 엄청납니다. 거기에 광고 출연 교섭도 있구요.”

유정호의 말을 들은 박용근이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광고나 방송은 당분간 잊었으면 좋겠다. 한참 폼을 끌어 올려야 할 때 그런 것에 시간을 빼앗기면 다음 시즌에 반드시 탈이 난다.”

“예. 저는 관심도 없어요. 솔직히 빨리 훈련이나 했으면 싶어요.”

정지우가 답을 하는 사이에 전은주가 젓가락으로 잘 익은 삼겹살을 밥에 올려 주었다.

한두 살짜리 애가 아닌 거다.

그런데도 전은주가 반찬을 올려 줄 때마다 정지우는 행복한 얼굴로 밥을 입에 넣고 있었다.

딩동! 딩동!

그때 벨이 울렸다.

영국 시간으로 오후 6시 30분쯤이었다.

“바튼인가 본데요?”

유정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현관으로 움직였다.

정지우와 박용근이 돌아봤고, 안쪽에 있는 전은주가 수저를 준비하느라 몸을 일으킨 다음이었다.

“누구세요?”

그런데 현관으로 움직인 유정호가 뜻밖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장진모입니다! 삼겹살 구우시는 거죠! 배가 고파서 그런데, 질문이나 취재 말고 밥만 한 끼 주십시오!”

현관 밖에서 얼마나 우렁차게 소리쳤는지 주방 안쪽에 있는 전은주에게도 장진모의 고함이 그대로 들릴 정도였다.

정지우와 박용근이 현관을 향해 움직였다.

커튼을 쳐 놓았지만, 바깥에 선 이의 윤곽은 거의 다 보인다.

“감독님! 취재 없습니다! 냄새 죽이네요! 감독 취임하신 거 축하드리려고 왔습니다! 아끼고 아끼던 팩 소주도 가져왔습니다! 싫으시면 이것만 전해 드리고 가겠습니다! 취임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 축구 만세!”

사람이 건네는 음성에도 분명 감정이 담긴다.

애절한 것 같기는 한데, 뻔뻔한 넉살이 덕지덕지 묻은 장진모의 고함에 안에 있던 네 사람이 모두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열어 주자. 배고프다는데 그걸 돌려보내기는 그렇고.”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유정호가 어떻게 하느냐는 투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감독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상관없어요.”

정지우가 답을 했을 때였다.

“밥 한술하고 삼겹살 한 점만 주십시오! 예!”

이어진 장진모의 애절한 외침에 네 사람이 또다시 웃고 말았다.

달칵.

유정호가 문을 열어 주자 장진모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장진모입니다! 여기!”

그는 정말 누런 종이봉투에 팩 소주를 담아 왔고, 다른 손에 전은주를 위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김문호는 송인수와 함께 허양수 협회 회장과 마주했다.

녹차가 앞에 놓였고, 형식적인 인사가 지나갔지만, 뻑뻑하기만 한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침묵이 제법 흐른 다음이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김문호가 나직하게 말을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당하게 해야지! 대국민 사과까지는 그렇다고 쳐! 나더러 박용근이나 정지우에게 찾아가라는 게 말이나 돼!”

몸을 일으킨 김문호가 앉아 있는 허양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당신 몇 살이야?”

“뭐……? 뭐?”

“내가 당신 직원이야? 나 이 빌어먹을 축구판에서는 더 이상 축구 안 한다니까!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하자! 네가 그 회장이란 직함 다는 게 누구 덕이냐!”

당장에라도 발로 걷어찰 것처럼 김문호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직접 그라운드에 나가서 뛰어! 애꿎은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확! 나이도 어린 게!”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기는 했지만, 허양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지금의 김문호는 뒷일 전혀 계산하지 않고 발길질을 날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판때기에 박용근을 부르라고? 뒷구석에서 또 호박씨 깔 게 뻔한데? 오해하지 마라. 난 축구 버렸고, 박용근이는 영국에서 정지우랑 잘나가고 있으니까! 이런 판때기에서 죽어라고 뛰어서 너 잘되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나 용근에게 전화 못한다!”

“당신! 말 다 했어?”

“당신? 이게 진짜! 확!”

허양수가 분명 움찔했다. 그런데도 지기 싫어서인지 얼른 이를 악물고 김문호를 노려보았다.

“좋아! 내가 지금까지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참고 있었는데, 지금 이 내용까지 고대로 인터뷰해 주마! 그렇지 않아도 1번 개가 자꾸 꼬리 내려서 속상했는데, 대신 2번 개가 짖어 줄 테니까 어디 한 번 해 보자!”

눈이 시뻘겋게 변한 김문호가 정말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상황이 이러면 말릴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송인수는 입을 꾹 다물고 탁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배경이 좋으시다고? 장진모 기자라고 알지? 내가 나가는 길로 그 양반 찾아갈 건데, 어디 나부터 날려 봐라.”

김문호가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김 감독님! 날 봐서 일단 앉아 보세요!”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송인수가 얼른 일어나 김문호의 팔을 안듯이 붙잡았다.

허양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말리지 말라고 외쳤어야 할 그 허양수가 말이다.

“감독님! 제발 좀!”

송인수가 서너 차례 더 매달리고 나서야 김문호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후우! 이보쇼, 회장님.”

허양수는 마른침만 삼키며 대꾸가 없었다.

“내가 여기 온 걸 오해하면 안 되는 거요. 막말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리저브 팀 감독이 된 사람을 다시 불러오자고 했으면 그만한 예우를 갖추라는 거야.”

반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댓말은 더더욱 아닌 말투로 김문호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당신은 전혀 상관없겠지만, 이런 축구라도 응원해 주는 국민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알겠어? 내가 여기 온 게 당신 잘되라고가 아니라, 그런 축구 팬들을 외면하지 말자는 여기 송 위원 말씀 듣고 온 거라고.”

“흐흠.”

“빨리 결정해! 시간 아까우니까!”

“내가 사과하면 되겠… 소?”

김문호가 피식 웃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선수 선발 전권 부여해 주고, 두 경기 기술 분석관은 내가 하는 조건이야. 그렇게 해야 나도 박 감독에게 매달릴 명분이 서지.”

“끄응.”

허양수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려 낸 다음이었다.

“한국 축구가 당신 거란 생각 버려. 우리 축구는 국민들과 축구인들이 만든 거야. 당신 폼 잡으라고가 아니라, 그런 축구 팬들과 선수들에게 봉사하라고 그 자리 마련해 준 거고!”

같잖다는 표정으로 동대문 2번 개가 따끔한 충고를 뱉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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